14
2016.07
#4 1부2장 성령대부흥운동과 한국선교의 출발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14, 2016

제2장 성령대부흥 운동과 한국선교의 출발

 


1. 성령대부흥운동의 시작 

 

1905-1907년 사이의 성령대부흥운동은 기존의 한국교회 교인들에게는 신앙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죄에 대하여, 회개에 대하여, 신앙생활에 대하여 새로운 각오를 하면서 깨끗한 씻음과 새로운 탄생을 맛보게 한 것이다.

동시에 이 시기가 독립협회에 대한 탄압과 친일파의 등장으로 한국이 정치적으로 일본에게 국권을 상실할 무렵이었다. 한국인들은 나라의 비극적인 상황에서 기독교를 하나의 도피처로 혹은 또 다른 돌파구로 생각하였다. 종래의 배척적인 혹은 비수용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수용의 자세로 바꾼 것이다.

성령대부흥운동은 또한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 분수령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를 대표하여 한국에서 20여 년 선교하면서 한국인들의 심성과 신앙을 잘 알고 있던 언더우드 부인(Mrs. Lillias H. Underwood)은 성령대부흥운동의 원인을 꼽으면서, 그 첫 번째가 정치적인 상황이 교회의 증가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나라의 민족적인 질병과 정치적인 봉기, 즉 청일전쟁과 콜레라 엄습, 황후의 살해와 이어지는 어려움들, 독립협회 운동, 노일전쟁, 일본인의 강점과 식민지화 등 새로운 시련이 닥칠 때마다 교회로 나오는 숫자는 증가하였다.29) 


1904년 9월부터 목포에서 사역하기 시작하여 1905년 11월 광주에서 진료소를 시작 하면서 성령대부흥운동이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의료 선교사 놀란(J. W. Nolan)도 언더우드 부인과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지금이야말로 한국에 집중할 시기라고 말한다고 해서 내 자신이 이기적이라거나 근시안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30)라고 말하였다. 군산의 불(W.F. Bull) 선교사도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한국인들이 수용적인 마음의 상태에 있으며 복음을 들으려 하고 또한 요청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포획된 사슴과 같아서 제시되는 첫번째 도피처로 곧바로 숨으려 한다”31)라고 하였다.

미국 필라델피아 신문사(The Philadelphia Press)의 기자로서 1906년에 한국의 상황을 관찰하기 위하여 내한하였던 윌리엄 엘리스(William T. Ellis)는 이렇게 보았다.


나라 전체는 따기를 기다리는 익은 과일과 같다. 지도자들은 공개적으로 기독교만이 이 나라를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극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다. 2년 전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다.32)


불 선교사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처럼”이라고 표현하고, 엘리스는 보다 더 부드럽게 “따기를 기다리는 익은 과일과 같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선교활동 을 하던 모든 선교회와 선교사들이 1905-1907년에 이르는 2년 사이에 한 목소리로 “지금은 한국 선교의 대전환점이다”33)라고 의견을 피력한 것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었다. 이 대전환점은 한국교회에 무엇을 남겼는가?  

29) Mrs. Horace G. Underwood, “Concrete Christianity in Korea”, The Missionary, April 1909, pp.261-262.?
30) J. W. Nolan, “Korea Experience at Chunju”, The Missionary, October 1905, pp.496-497.

31) Rev. W. F. Bull, “Era of Great Things in Korea”, The Missionary, September 1905, pp.455-456.

32) The Editor, “The Open Door in Korea”, The Missionary, March 1907, p.102.
33) 지금이야말로 한국에 대한 선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견해는 많이 있었다. 영국 성공회 소속 성직자인 가스코인(William Gascoyne)은 1907년 10월 28일자 London Times에서 “………… 원래의 모임에 있었던 한국인들은 마치 웨슬리의 개종자들처럼 멀리 폭넓게 흩어져서 믿음을 선포하고, 웨슬리의 개종자들처럼 놀랍도록 성공하였으므로, 한국을 통하여 극동지방에 기독교의 빛이 전파되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은 수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2. 한국교회의 탄생 


1884년 9월, 앨런이 한국에 도착한 이래로 한국교회는 꾸준히 발전하였다. 북장로회 내에서만 하더라도 1894-1895년 사이에 미조직 교회가 13곳, 조직교회가 1곳, 세 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수가 286명이었으나, 10년이 지난 1904-1905년 사이에는 미조직교회가 418곳, 조직교회가 10곳, 성찬 참여 교인수가 9,756명에 이르렀다.34) 교인수만 하더라도 34배가 증가하였으며, 비조직 교회수는 32배, 조직 교회수는 10배가 늘었다. 이렇게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동안에 선교사 및 한국인 협력자(지도자) 들의 인력은 크게 부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세운 네비우스 선교원칙에 따라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선교’(self-propagation) 원칙에 충실하면서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초기에는 한국인 협력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선교사의 사랑(舍廊)에서 한국인 지도자급에 속하는 소수를 상대로 성경을 집중적으로 교육시킨 다음에 이들로 하여금 각 곳에 흩어진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돌보게 하였다.

그러다가 이들에 대한 신학적 교육의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남북장로교 한국선교 회는 각각 지역에 산재한 선교부에 ‘신학반’(theological class)을 두어서 신학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신학반’ 가운데 하나가 평양선교부에서 마펫 (Samuel A. Moffet)이 1901년 자기 사랑에 김종섭, 방기창 두 사람을 데리고 시작한 신학반이었다. 1901년 2명으로 시작한 평양 선교부의 신학반은 1902년에 6명으로 늘어나 고, 1904년에는 19명, 그리고 1905년에는 3학급이 되면서 40명으로 학생 숫자가 증가 했다. 이에 따라 마펫은 1904년부터는 타 선교회에 교수 요원을 파송해 줄 것을 요청 하였으며, 평양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과 서울에 거주하던 북장로회의 언더우드, 남장 로회의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 캐나다 장로회의 푸트(W. R. Foote: 부두일) 등이 가세하여 집중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물론 평양 선교부 신학반은 한국 내에 있는 여러 장로교 선교회를 공동으로 대표하는 신학반은 아니었으나, 타 선교회에서 신학반 학생의 교육을 의뢰함으로써 점차 신학반 교육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어찌되었거나 1907년 6월 20일에 평양선교 부 신학반은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졸업생은 길선주(吉善宙), 방기창(邦基昌), 송인서(宋麟瑞), 한석진(韓錫晋), 이기풍(李 基豊), 양전백(梁甸伯), 서경조(徐景祚)이다. 

 


▲ 1907년 9월 17일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서 배출된 7인의 목 사.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기풍 목사이다.


이렇게 신학반 졸업생이 배출되는 때를 맞추어 4개 장로교 선교회는 평양 선교부 소속 신학반을 ‘대한장로회신학교’(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Korea)라는 공식 명칭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그리고 교장은 지금까지 책임을 지고서 평양 선교부 신학반을 운영해 온 마펫에게 맡겼다.

이렇게 졸업한 7명을 목사로 임직시키기 위해서는 장로교 헌법에 따라 노회가 필요 하였다. 따라서 한국에서 선교하는 4개 장로교 선교회는 본국 교단의 허가를 얻어서 4개 선교회가 하나의 노회를 설립하였다.

설립노회는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 회집하였다. 이날 오전 9시 개회시에 회집한 회원은 목사 33인(모두 다 선교사), 장로 36인(모두 다 한국인)이었다. 이들 선교사 가운데 북장로회 선교사가 24명, 남장로회 선교사가 6명,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 가2명, 호주 선교사가 1명으로 총 33명이었다. 이들이 선교하였던 구역으로 본다면 평안도가 10명, 서울이 9명, 함경도가 2명, 경상도가 6명, 전라도가 6명이었다.35)

노회 설립 당시의 교세와 선교 활동을 살펴보면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서울을 포함한 이북 지역과 경상도 지역에서 크게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남장로 회 선교사들이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제1회 노회에 참석하였던 장로 38명 가운데서 서울을 포함한 이북 지역에서 27명이 참석하였으며, 전라도에서 7명, 경 상도에서 4명이 참석하였다. 따라서 1907년까지 세워진 교회들 가운데서 조직교회가 이북 지역에 훨씬 더 많았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초기 이북 중심의 교세는 목사 임직을 받은 7명의 신학사들의 사역지를 살펴보더라도 알 수 있다. 신학 졸업생 7명에 대한 문답을 통하여 저녁 7시에 회집한 예배에서 이들에게 안수례를 통한 목사 임직식을 거행함으로써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한국인 장로교 목회자 7명이 탄생하였다.36) 이들에게 맡겨진 일은 다음과 같다.


1. 새로 장립한 목사 7인 중 1인을 선교사로 파송할 일

2. 이기풍 씨를 제주 선교사로 보내되 월급은 전도국에서 지출할 일

3. 방기창 씨는 용강, 제재, 주달교회의 전도목사로 정할 일

4. 한석진 씨는 평양, 장전, 미림, 이천교회의 전도목사로 정할 일

5. 송인서 씨는 증산, 한천, 외서장, 영유, 허리몰교회의 전도목사로 정할 일

6. 길선주 씨는 평양 장대재 지교회 목사로 정할 일

7. 양전백 씨는 선천, 정주, 박천 등지에 위대모 목사와 같이 전도목사로 정할 일

8. 서경조 씨는 장연, 옹진 등지에 사우업 목사와 같이 전도목사로 정할 일37)


이상 7명의 졸업생 가운데서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선교사로,38) 길선주 목사는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그리고 나머지 5명은 각각 해당 지역의 전도목사로 임직을 받 았다. 이러한 사실은 독노회의 최대 관심사가 전도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이들이 맡은 전도 구역도 평안도와 황해도에 치중되어 있다.


34) Harry A. Rhodes, ed., History of The Korean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Volume I: 1884-1934, Seoul,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Department of Education, 1984, pp.546-547.?

35)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독노회록(1907),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80, pp.4-5.

36) 미감리교 조선연회에서는 이미 1901년에 김창식, 김기범을 목사로 임직하였다.

37) 제1회 독노회록(1907), pp.18-19.?

 

 


3. 한국교회의 선교 


한국의 성령대부흥운동을 지켜보았던 영국 성공회 소속 성직자인 가스코인(William Gascoyne)은 1907년 10월 28일자 〈런던타임스〉(London Times)에 “…원래의 모임에 있었던 한국인들은 마치 웨슬리의 개종자들처럼 멀리 폭넓게 흩어져서 믿음을 선포하고, 웨슬리의 개종자들처럼 놀랍도록 성공하였으므로, 한국을 통하여 극동지방에 기독교의 빛이 전파되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은 수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미국 《필라델피 아 신문》의 엘리스(W. T. Ellis)는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부흥운동을 목격하고서 “나는 현재의 선교사 인력을 4배로 혹은 6배로 늘린다면 20년 안에 전 국가가 실제적 으로 기독교인이 되리라는 데 아무런 의심도 없다”라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1907년 노회의 설립과 동시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 극동지방에 기독교의 빛이 되는 나라”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 선교사업은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를 파송하고, 북간도(시베리아)에 최관흘 목사를, 일본에 한석진 목사를 파송함으로써 실천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반도의 교회 입장에서는, 일본과 북간도에 있는 한인들을 위한 사역과 더불어, 제주도의 주민들을 위한 복음 전파가 동일한 해외선 교의 측면에서 이해되었다.39) 한동안은 대부분의 보고서에 이 세 지역의 선교상황이 나란히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제주도 선교를 자세히 살피기에 앞서서, 북간도와 일본 선교에 대해서 참고로 언급하려고 한다.

 

38) 1917년 제7회 총회에서 외국인 선교목사를 선교사로, 내국인 선교목사는 선교사로 호칭하지 않고 전도목사로 호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로 파송할 당시에는 선교사라는 호칭을 사용하였 으므로 원문에 있는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39) 참고, 니스벳/한인수, 《미국남장로교 선교회의 호남선교 초기역사》 (1892-1919), p.139.

 


가. 북간도 선교

 

북간도 선교는 1908년에 싹이 텄다. 일제는 1908년부터 한국에 대한 토지 조사를 착수 하였으며, 아직까지 토지를 빼앗긴 일이 없었던 사람들일지라도 상당수 만주로 연해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토지를 빼앗긴 한국인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였는 데, 특히 북쪽 지방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독노회는 이들을 상대로 한 선교를 계획하였으며, 선교사로서 1909년 제3회 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은 최관흘 목사를 임명 하였다.


전도국장 길선주 씨가 보고함이 여좌하니

6. 지금 해삼위 형편이온즉 고국 강산을 이별하고 의지할 곳이 없이 외로운 나그네로 불쌍히 죽어가는 생명이 오십만 명이오니 이곳에 선교사 한 사람을 급히 택송하 여 오십만 명 생명을 구원케 하기를 청원이오며……

9. 해삼위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경위이오면 신학사 최관흘 씨로 택정하기를 청원 이오며40)


이렇게 하여 최관흘 목사는 블라디보스톡(海蔘威)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함경대리회 회원의 자격으로 일하게 되었다. 최관흘 목사가 1910년 9월 제4회 노회 석상에서 블라디보스톡과 슈청과 우수리스크(소왕령)와 허바루기와 하얼빈 등지에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나타남으로 회개하고, 예수의 복음을 믿는 형제도 많고 교회가 성립되 었다고 자신의 활동을 보고한 다음에 전도비의 부족을 호소하자 회중이 즉석에서 오백여 환을 연보하기도 하였다.41)

1910년부터는 블라디보스톡 선교를 위하여 조사 한병직 씨와 전도사 김영제 씨를 파송하여 함께 사역함으로써 블라디보스톡 선교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서 탄탄대로 를 걸었다. 제4회 노회에서 전도국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전도국 위원이 보고함이 여좌하니 ……

3. 제주와 로국 영지 선교사의 용비 예산에 (1) 제주에 720여 원 (2) 로국 영지 930여 원이오며,

4. 명년에 제주와 해삼위와 일본에 쓸 예산은 3천 원으로 노회에 부탁하는 일.

5. 서간도 선교사 청원에 대하여 선천교회에 맡겨서 주선케 한 일.……

7. 해삼위 조사 보낼 예산 200원을 250원으로 증가이오며 보낼 사람은 강도사 한 병직 씨로 택정한 일. 함경 대리위원과 전도국장이 신학사 김영제 씨를 북간도에 전도사로 청원하매 결정하다.42)


이렇게 블라디보스톡 선교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1911년, 1912년에 걸쳐 노회의 관심을 받으면서 열심히 진행되던 블라디보스톡 선교는, 1912년에 이르러 선교 현지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과 맞물려 어려움을 겪게 된다. 노회가 조사위원을 선 정하였으나 결국 최관흘 목사가 본 노회 소속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최관흘 목사가 생명의 위협을 느낀 상황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함으로써 해삼위 선교는 일단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12년 9월 제1회 총회 에서 “해삼위 전도는 사세 부득히하와 정지이옵고 최관흘 목사의 사무도 고만두었사 오며 해삼위 매서로 보낸 이재순 신윤협 양 씨는 그곳서 전도하옵다가 아라사 관리에게 핍박을 당하여 갇히기를 한달 동안이나 하고 이수(移囚)되길 세 번이나 하였는데 그 고상(苦狀)을 다 말할 수 없습네다”라고 보고하였다.43) 이러한 형편을 보고받은 최흥종 장로는 1913년 전라노회 석상에서 ‘러시아 선교를 지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40) 제3회 독노회록(1909), p.13.

41) 제4회 독노회록(1910), p.1.

42) 제4회 독노회록(1910), pp.14-15.

43) 제1회 총회록(1912), pp.18-19.

 


나. 일본 선교

 

한국의 서양식 학교는 1883년 민영익이 단장이 된 견미사절단이 미국과 유럽을 둘러 본 다음에 한국의 개화를 위해서 두 가지 사업을 고종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함으로 시작 하려 했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중단되었다가, 1886년 6월 미국인 교사 3명 이 입국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은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로서 헐버트(Homer B. Hulbert), 벙커(Dalziel A. Bunker) 그리고 길모어(George W. Gilmore)였다. 이들이 세운 학교 ‘동문학’(同文學)은 명칭을 ‘육영공원’(育英公園)이라 바꾸었으나, 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1895년부터는 배재학당에 이 사업을 위탁하였다. 이렇게 배출된 한국의 인재들은 1905년 이후 일본에서 진보된 교육의 기회를 찾으려고 유학하게 되었으며, 다수가 도쿄로 가서 향학열을 불태웠다. 따라서 조선예수 교장로회 노회는 1909년 9월 정기노회 이후에 한석진 목사를 파송하여 유학생 선교를 시작하였다. 1910년 9월, 제4회 노회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한석진씨가 일본 동경에 교회 성립과 신자의 형편과 전도사 청구서를 보고하매 회중이 전도국에 맡기기를 동의하여 가로 결정하다.44)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국가의 비운의 상황에서도 한국의 유학생들은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 도쿄 유학생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비록 한석진 목사의 요청에 따라 장로교회가 전도인을 파송하였으나, 장로교 유학생들만 별도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감리교 유학생들과 함께 예배드리게 되었다. 동시에 이들 학생들은 도쿄내 ‘조선청년회관’을 빌려서 예배 드림으로써 비기독교권의 민족주의 학생들과 교분을 두텁게 하여 조국에 대한 독립의 식을 강하게 하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1911년 제5회 노회에서 이렇게 보고되었다. 


일본 동경 전도 형편

1. 전도인은 박영일 씨를 작년에 4개월 금년에 3개월 보내었사오며,

2. 예배 처소는 조선 청년회관을 빌려 쓰오며 교인 158인이오며 연보는 매 주일에 평균 일원이오며,

3. 감리교인과 장로교인이 나누어 예배 보는 일이 생김으로 대구 부해리 목사의 인도로 아직 장로회 규모를 폐하고 합하여 예배 보게 한 일이 있사오며,

4. 동경교회에 감리교인과 장로교인의 공익을 위하여 길선주, 원두우, 부해리 삼씨를 전권위원으로 명하여 감리교회와 교섭게 할 일.45)


이렇게 시작된 도쿄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선교는 1911년 장로교, 감리교 연합선교 회에서 주공삼 목사를 파송하였고, 1912년에는 임종순 장로를 파송하였다. 그리고 1925 년에는 조선 장로교 감리교 연합 전도국에서 장로교회의 오기순 목사를 파송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1884년에 시작된 한국의 선교는, 특히 장로교회의 경우에는 20여 년이 지난 1907년에 이르기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면서 내부적인 힘을 비축 하였다. 그러다가 1907년 성령대부흥운동과 노회의 조직으로 세계 교회의 대열에 가 입하면서 곧바로 선교를 실천하였다.

 

44) 제4회 독노회록(1910), p.16.

45) 제5회 독노회록(1911), p.11.

 

제목
#10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9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2.이기풍목사의 활동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8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1.제주선교와 의료봉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7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3.성내교회의 교육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6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1.이기풍목사 입도와 첫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5 1부3장 제주의 신앙선각자들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4 1부2장 성령대부흥운동과 한국선교의 출발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3 1부1장 1907년 이전의 한국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 들어가는 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