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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3 1부1장 1907년 이전의 한국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13, 2016

제1부

1900-1915

복음 전파와 수용

 


제1장 1907년 이전의 한국 선교

1. 첫인상

2. 관리들의 부패

3. 초기 개종자들

4. 성령대부흥운동(1907)과 제주도 선교의 시작  


제2장 성령대부흥운동과 한국 선교의 출발

1. 성령대부흥운동의 시작

2. 한국교회의 탄생

3. 한국교회의 선교 


제3장 복음을 수용한 제주의 신앙 선각자들

1. 김재원 장로

2. 조봉호

3. 부상규 장로

제4장 제주 교회의 출발

1. 이기풍 목사의 성장과 소명

2. 제주도 입도와 제주의 첫 교회

3. 성내교회의 교육선교 


제5장 제주 선교의 확산

1. 제주 선교와 의료 봉사

2. 이기풍 목사의 활동(1908~1915)

3. 이기풍 목사의 사임

 

 

제1장

1907년 이전의 한국 선교

 

1884년 9월부터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에게 한국은 어떻게 보였을까? 불과 20년 전에 병인박해를 일으켜 천주교도 3,000여 명의 목을 잘랐던 무시무시한 나라가 아닌 가? 비록 1882년 5월에 미국과 한국이 수교를 하고, 1883년에 미국 공사가 파송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시골이나 벽지에서는 안전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앨런(Horace N. Allen: 안련)6)은 처음 한국에 올 때에 부인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왔다.

한국에 도착하여 목숨은 안전하다고 하더라도, 한국인들의 생활현장이 너무나도 마음 에 들지 않아서 심정적인 안정을 갖기까지는 한동안 마음고생을 겪어야 했다.

 


1. 첫 인상 


정작 생활하여야 할 대도시들의 외관부터 초기 선교사들의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다. 한국의 관문인 부산과 제물포도 초기에 도착하는 선교사들에게는 매력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부산에 관하여 앨런은 “일본인 무역소만 겨우 흥미가 있을 뿐이다”7) 라고 묘사하였으며,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도 부산 항구에 정박한 배의 갑판에서 토담과 흙과 짚으로 엮은 지붕들을 보고서 “집이라곤 마치 큰 벌집같이 보였다”8)라고 기록하였고, 제물포에 대하여는 “황량하고 어두운 곳이다”9)라고 언급하였다.



▲1880년대 중반의 제물포 항

서울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앨런은 산꼭대기에서 서울을 내려다 보면서, 마치 겨울을 나기 위해서 볏짚을 쌓아 놓은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10)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의 부인 릴리아스(Lillias)는 비좁고 더러운 길에 관해서, 그리고 낮고 작은 초가집이나 기와집들에 관해서 기록했는데, 서울은 마치 버섯이 자라는 온상과 같다고 하였다.

 

6) 앨런은 오랫동안 알렌으로 표기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미 출간된 제명이나 내용을 인용하는 경우에만 알렌으로 쓴다.

7) Horace N. Allen, 김원모 역, 《알렌의 일기》, 서울: 단국대학교, 1884년 10월 1일

8) Appenzeller Diary, April 2, 1885. 그 밖의 여성들에게도 동일하게 보였다.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는“오늘 1890년 10월 10일, 머지않은 장래에 이 땅이 나의 살 집이 되리라는 희망에 약간 흥미를 느꼈지만, 그렇다고 아무리 좋게 말하려고 해도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부산은 거의 일본인들의 거 주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얀 옷을 입은 모습이 가히 그림 같은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남자들만 봅니다. 여자들은 해가 지기까지는 밖에 나가지 않습니다”라고 하 였다[Sherwood Hall, 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 (McLean, Va., MCL Associates,1978), p.27].

9) Appenzeller to Maclay, August 1885.

10) Allen to Ellinwood, October 1, 1884.​ 

이상과 같은 첫인상과 더불어 통행세를 받는 낮 동안에는 열고 밤이 되면 닫는 성문과 봉화불, 어둠이 깔리면 밖으로 나오는 여성들, 그리고 인경과 함께 순라군들이 돌면서 통행을 금지시키는 도시의 밤풍경은 생소하기도 하고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서대문의 악대가 경종을 울리자 남산의 봉화가 곧바로 세번 오르고, 종로의 큰 종 (보신각)이 부드러운 저녁기도를 알리고, 시의 사대문은 닫히고, 서울은 무덤 같은 적막에 빠졌다.11)​


그러나 한국인들의 삶의 현장은 생각과 너무 달랐다. 벙커(D.A. Bunker)의 부인이 된 애니 엘러스(Annie Ellers)는 이렇게 말한다.


집들은 나지막하고, 초가와 기와 지붕이며, 거리의 중앙에서나 양쪽에서 고약한 냄새가 진하게 나고, 거리는 좁고 여기저기 쓰레기로 가득하였다……어디에서나 신음과 울부짖는 소리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대답이 나왔다. ‘콜레라, 콜레라!’ 그렇다. 콜레라다! 사람들은 날마다 300명에서 400명씩 죽어간 다.12)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생소한 자연환경에 적응하여 갔지만 열악한 위생상태로 인해 만연한 각종 토착병으로 고생하였다. 특히 선교사들의 자녀들은 더욱더 취약하였다. 그리하여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1884-1910년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다수의 자녀들을 잃었으며, 성인들도 희생되는 경우가 있었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고국의 삶을 포기하 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선교사들의 아픔을 딛고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1) D. Bunker, “Some Reminiscences”.

12) A. Bunker, “Personal Recollections”, p.62.​
 


2. 관리들의 부패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위의 묘사에서 보듯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작 초기 선교사들의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것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생활환경은 물론이려니와 사람들의 태도와 마음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관리들의 부패는 가장 큰 골칫거리였 다. 


옛 제도에서 왕은 대신의 임명으로부터 외국인들의 편의를 위하여 도시를 개방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다 혼자서 처리하였다. 그 제도 아래에서 관료들은 오랫동안 묵묵히 견디어 온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거둬들였으며, 그것도 극단적인 억압의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렇게 거두어진 50~65%의 돈은 게걸스러운 관료들 의 개인 금고로 들어갔다. 그 어느 누구도, 높거나 낮거나를 막론하고 설명이 없었다.13)


그렇다면 이들 관리들의 부패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조정에 빌붙어 살아가는 4,000여 명의 관리들은 어떠한 정부라도 부패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이들은 지방 관으로부터 모든 유형의 관직을 사고 팔았다. 여기에 덧붙여 일본인 상인들의 터무니없 이 비싼 상품과 러시아 군인들의 횡포 등이 선교 상황을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매관매직과 과거제도의 부패 그리고 관리들의 폭압적인 착취로 인하여 한국인들은 산업을 일으킨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가난을 감내하면서 지내야 하였다. 1895년도 에 선교사들은 이렇게 보고한다.


한국의 가난의 원인을 …… 첫째, 국가 자산 부족과 재력 있는 한국인 상인의 부재이다. 둘째, 관료들의 착취와 산업에 부과되는 과도한 짐,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동계 층의 생산 에너지의 결핍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용할 생필품 이상을 생산하면 관료 들에게 착취당한다고 생각한다. 이 나라의 모든 관직은 돈으로 사야 한다는 것을 감안 하면, 그리고 양반 계층에서만 가장 낮은 관직이라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인 계층에서 돈을 모아서 그 관직을 사려는 의도를 가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 중국의 가장 부패한 관료들마저도 혀를 내두를 착취의 귀재는 도로상에, 항해 가능한 모든 물가에 8~9km 정도 떨어져 있는 세금징수원, 그러면서도 가장 이익이 남는 장사는 모두 관청에서 독차지하고 있으며, 소수의 비양심적인 사람들의 압박으로 인내심 많은 한국인들은 신음함으로써 상업이 고사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 다.14)


13) The Editor, “The New Korea”, The Missionary, October 1895, pp.470-472.

14) The Editor, “Poverty in Korea”, The Missionary, April 1895, p.162.


그렇다면 관료들은 백성들을 이렇게 착취함으로써 어떠한 삶을 누렸는가? 유진 벨(Eugene Bell) 목사는 자신이 겪은 한국 관리들의 부패상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전해들은 정보가 틀리지 않는다면, 한국의 관직을 맡은 관리들에게는 정해진 금액의 급여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상당히 많은 관리들에게서 이것이 사실이 라는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그런데도 관리들은 자신과 가족과 친척들까지 많은 하인 을 거느리고 살이 비대해져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이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견딜 수 없는 방법으로 백성들을 ‘쥐어짜지만’ 오로지 오랫동안 견디어 온 한국인만이  쥐어짜기를 견딜 수 있다.15)
‘쥐어짜기’(squeeze)를 통한 ‘비대함’(fat)은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 관리들의 생 활방식이었다.

그리하여 유진 벨 목사는 “관리들은 너무나도 부패해 있으며 아무 짝에 도 쓸모없다”16)라고 하였다. 관리들의 부패와 임금의 무능으로 인하여 한국은 희망이 없어 보였으며, 오로지 복음을 통한 전적인 개혁만이 한국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었다.


15) Eugene Bell, Letter to Father, March 20, 1896.

16) Eugene Bell, Letter to Father, January 8, 1898.​
 


3. 초기 개종자들 


미국과 한국이 1882년 5월에 인천 항구에서 조약을 맺고 상호 상업 교역을 합의한 이후, 1883년 5월에 58세의 루시우스 푸트(Lucius Foote)가 미국에서 서울에 도착하자 한국에서는 1883년 9월에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7명의 사절단을 미국으로 파송하였 다.17) 민영익은 미국 대통령 아서(Chester Allen Arthur)를 만났다.

그의 호의로 세계 일주 유람선에 올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의 즉위식에 참석한 다음, 유럽과 인도를 거쳐 1884년 5월에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이 해외의 여러 나라들처럼 개화되기 위 해서는 우체국을 설치하여 만국우편제도에 가입할 것과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할 것과 미국식 낙농업, 곡물과 채소재배법 그리고 미국식 군사제도를 도입할 것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18)

미국으로 갔던 대사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홍영식은 민영익과 절친한 사이로 세계 일주 여행에는 동참하지 않고 먼저 귀국하여 초대 우정국장에 취임하였으나,19) 한국의 개화에 대한 생각은 서로 달랐으므로 갑신정변에서 한 사람은 개화파(홍영식), 한 사람(민영익)은 수구파로 서로 칼을 겨누는 앙숙이 되고 말았다.

어찌되었거나 1884년 12월 4일에 발생한 갑신정변이 앨런에게는, 그리고 미국 북 장로교 한국 선교회, 그리고 차후로 도착하는 각국 선교회에게는 조선 왕궁의 깊숙한 내실에까지 통행할 수 있는 출입증을 받는 사건이 되었다. 앨런은 민영익을 살려 낸 대 가로 고종으로부터 참판 벼슬을 받고, 중전(명성황후)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


비단 누비 겉옷, 누비 비단 100야드, 백색 비단 100야드, 방바닥 깔개, 비단 창문 가리개, 그리고 ‘오래되고 높은 가격의 석조 쌀통’ 등이다.20) 앨런은 이어서 궁궐로부터 보내 온 또 다른 선물로 인해 놀랐는데 …… 다섯 명의 ‘무녀’ 혹은 기생이었는 데, 앨런은 곧바로 이들을 ‘의과 학교 여자 학생’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들은 ‘깨끗한 삶 을 살면서 간호사가 되었다.’21)


갑신정변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끄러운 상황에서 앨런은 역적들에 대한 참살의 현장을 둘러보았으며, 홍영식의 집을 인수받아 1885년 4월에 ‘광혜원’이라는 한국 최초의 국립의료원(Royal Hospital)의 문을 열고서 선교에 임하였다. 그렇지만 광 혜원은 전통적인 ‘혜민서’의 일종으로서 의료 행위는 가능하였지만 관리들의 상주로 인하여 선교활동은 극히 제약적이었으며, 원하는 대로 한국사회의 하층민들을 치료하여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이즈음에 앨런은 계속적으로 도착하는 동료 후임 선교사들과의 의견 충돌이 잦았다.


17) 이때 동행한 사람은 부관 홍영식, 서광범, 변수, 유길준, 윤치호 등이었다.​

18) 이선근, 《한국사》, 제5권, 서울: 을유문화사, 1961, pp.744-745.

19) 우정국의 첫 번째 업무는 앨런에게 온 크리스마스 선물을 접수하여 배달하는 것이었다.

20) 《알렌의 일기》, p.83. 1885년 5월 29일.

21) 《알렌의 일기》, p.94. 1885년 8월 5일. 이 기녀들은 황해도와 평안도 감사에게 명하여 광혜원에 개설된 여성전용병원에서 의녀로 일하게 하였다.


특히,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헤론(John Harriet Heron)과는 ‘개와 고양이’ 사이가 되었다. 결국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마침 워싱턴에 상 주하게 될 한국 공사관의 직원으로 발탁되어 1887년 11월 한국을 떠났다.22)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1890년에 이르러 7~8명으로 증가되었다.23) 이들은 6월 에 중국에서 선교하고 은퇴를 앞둔 네비우스(John Livingstone Nevius) 목사를 초청하여 한국 선교의 방향을 정하였다. 이어서 1892년 11월에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도착하였다. 1893년 1월에 ‘장로교 선교공의회’를 구성하여 지역 분할과 선교정책 10가지 를 결정함으로써 한국 선교의 방향이 확정되었다.

 

이 선교정책 10가지 가운데 첫 번째로 “선교의 대상은 노동자와 하층민과 부녀자와 아동으로 한다”라고 함으로써,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아 왔던 사회 의 하층민들이 기독교 복음을 먼저 받아들이는 수혜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정책의 첫 번째 대량 결실은 1895년 서울 관자골 백정들의 집단 거주지 (현 인사동)에서 두드러지 게 나타났다. 무어(Samuel F. Moore) 목사가24) 선교를 시작하여 교회(오늘날의 승동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사회의 하층민들만 개종시킨 것은 아니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가족을 잃고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의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그는 1896년 1월에 서울에 도착하여25) ‘독립협회’를 창설하였 고,26)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는27) 등 각종 신문화를 빠르게 소개하였다. 조 선 사회의 상류층도 기독교의 문화를 접하면서 기독교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갖기 시작하였다.

독립협회에 윤치호가 가세하고 이완용이 초대 회장으로 참여함으로써 독립협회는 한국사회의 신문화를 이끌어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이끌어감’에 반대하는 사람들 이 있었다. 특히 독립협회는 신문을 통하여 한국 사회의 각종 개선사항을 낱낱이 지적 하고 토론회의 주제로 삼음으로써 토론을 통한 여론의 확산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창 출하였다. 급기야는 1898년 4월에 보신각 앞에서 고종 이하 대신들과 한국 사회의 각 단체들이 함께 참여하는 ‘만민공동회’라는 대규모 집단 토론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 다. 이 당시 한국을 방문하였던 영국의 여행가 비숍(Isabella Bishop) 여사는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위력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서울에서 일어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1896년 4월에 서재필 박사가 《독립신문》 을 창간한 일이다.

…… 왕실과 관리들의 잘못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여론의 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 악습을 파헤쳐 밝은 광명으로 인도하고, 이성적 교육과 합리적 개혁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키며, 사악한 무리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 다.28)


한편 독립협회는 NGO 운동의 선구자로서 부패한 정부의 관리를 교체하고 참신하 고 유능한 인재를 발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과 박영효도 포함되었다. 이로 인하여 고종과 대신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말았 다. 독립협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던 이완용은 고종의 마음이 독립협회에서 멀어 진 것을 눈치 채고서 곧바로 독립협회는 왕권을 무너뜨리는 역적이라고 몰아세웠고, 독립협회의 해체와 회원들에 대한 검속이 시작되었다.

독립협회를 통하여 나라의 자주권을 확보하고 동시에 일본의 손에서 벗어나기를 꾀하였던 지성인들은 감옥에 수감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개종한 기독교인들은 이승 만, 신흥우, 그리고 후일에 이상재 등이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선각자들의 개종이 일어났다.

 

22) 앨런은 1890년에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미국 정부의 공무원이 되어 서울에 다시 왔다. 이때부 터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미국 공사관이 폐쇄될 때까지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각종 이권과 정치적인 사 건에 개입하면서 한국과 미국의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등의 제반 상황을 주무르는 사람이 되었다.

23) 이들은 간호사 엘러스(Annie Ellers, 1886년 6월 도착), 의사 빈턴(C. C. Vinton) 부부(1891년 4월 도착), 목사 기포드(Daniel Gifford, 1888년 도착)와 아내 헤이든(Mary E. Hayden, 1888년 9월 내한하였으며 1890년 기포 드 목사와 결혼함), 마펫(Samuel A. Moffet) 부부(1890년 1월 도착) 그리고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부부 이다.

24) 무어 목사는 1846년에 태어나 1892년 46세의 나이로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의 열정으로 살다가 1906년 12월 22일에 사망하였으며, 부인(Mrs. Rose Ely Moore)은 1년 뒤인 1907년 11월 18일에 한 국을 떠났다.

25) 1895년 갑오경장으로 갑신정변의 주역들에게 대사면령이 내려진 것을 알고서 서재필은 “즉각적으로 민족 을 위하여 큰일을 하여 볼 좋은 기회가 왔다고 깨달았으며”, 1896년 1월 귀국하고 뒤이어 아내가 한국에 도 착하였다.

26) 독립협회 결성 당시의 참여자는 총 38명으로서 안경수, 이완용, 김가진, 이윤용, 김종한, 권재형, 민상호,이 채연 등이었다.
27) 서재필은 김홍집과 유길준으로부터 외무대신을 제의받았으나 “나는 벼슬은 하지 않고 민중 교육을 위
하여 신문을 발간하여 정부가 하는 일을 서민이 알게 하고, 다른 나라들이 한국 때문에 무엇을 하고 있나를 일깨 워 주는 일이나 해보겠다고 하였다…”: 이정식, 《서재필 - 미국 망명 시절》, 서울: 정음사, 1984, p.206.

28) 오세응, 《서재필의 개혁운동과 오늘의 과제》, 서울: 고려원, 1993, p.83. 

 


4. 성령대부흥운동(1907)과 제주도 선교의 시작 

 

한국교회의 성령대부흥운동은 1903년부터 1910년까지 지속된, 주로 한강 이북지 방에서 전개된 운동이었다.

그렇지만 이 기간에 한국은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큰 변 화를 겪었다. 국가적으로는 일본과 러시아의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1904년부 터 일본 정부가 지명하는 자문관이 한국의 각 부처에 상주함으로써 실질적인 자주권 을 잃게 되었다. 1905년 11월에는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 하였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오히려 빌미삼아 일본은 1907년에 한국 과 ‘정미 7조약’을 맺고 고종을 퇴위시킨 후 순종을 등극시킴으로써 한국은 일본의 손 아귀에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1908년에 일본은 1904년부터 원하였던 서해안의 황무 지를 개간할 수 있는 ‘황무지 개간권’을 확보함으로써 곧바로 한국의 곳곳에 ‘동양척 식주식회사’가 들어서서 전 국토에 대한 토지조사를 벌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성령대부흥운동이 1903년 8월 원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05 년에는 평양, 서울, 경기지방으로, 그리고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절정을 이루었 다. 성령대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1910년에는 ‘백만명구령운동’으로 끝을 맺었다.

이렇게 한국의 국가적 운명이 종지부를 찍을 무렵에 한국 교계에서는 성령 대부흥 운동이 일기 시작함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주기 시작하였다. 제주도에 대한 선교가 시 작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따라서 제주도 선교는 성령대부흥운동의 결실이며, 동시에 새롭게 조직된 신생 한국교회가 낳은 새 생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목
#10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9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2.이기풍목사의 활동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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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부3장 제주의 신앙선각자들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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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들어가는 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