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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2 들어가는 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13, 2016


 

목차

 

발간사 _ 김상종 목사(제주노회장, 2008년)•02

편찬사 _ 류승남 목사(제주기독교100년사 편찬위원장)•04기 념사 _ 김정서 목사(제주기독교100주년 기념사업위원장)•06 축 사 _ 홍문수 장로(제주노회장, 2015년)•08

편집자의 글 _ 김인주 목사•10

 들어가는 말•14

1. 복음 수용 이전의 제주•14

2. 천주교와의 접촉•15

3. 개신교, 제주를 탐색하다•18

 제1부 복음 전파와 수용 1900-1915•21

제1장 1907년 이전의 한국 선교•22

제2장 성령대부흥운동과 한국 선교의 출발•31 제3장 복음을 수용한 제주의 신앙 선각자들•41 제4장 제주 교회의 출발•48

제5장 제주 선교의 확산•69

 

제2부 제주 교회의 성장 1915-1927•93

제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94 제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111

제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129 제4장 제주 교회의 정착기•143

제5장 최흥종 목사와 서서평 선교사•163

제3부 제주노회의 조직 1927-1945•177

제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180 제2장 제주노회 설립•189

제3장 제주노회의 발전•197 제 4장 시련과 좌절•221

 

제4부 해방과 환난, 교회 분열 1945-1960•233

제1장 해방과 제주 교회•236

제2장 4·3사건과 제주 교회•247 제 3장 한국전쟁과 제주 교회•268 제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291

 

제5부 제주 교회의 도약 1960-2015•303

제1장 성장과 교회 건축•306

제2장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협력•322 제3장 교회 지도인력의 양성•333

제4장 연합행사•345

제5장 총회와 제주노회, 장로교 연합예배•350 제6 장 제주기독교100주년 기념행사 및 기념사업•367 제 7장 이기풍선교기념관 건축•377

제8장 선교와 순교•385

 

제6부 지교회의 역사•395

    

들어가는 말

1. 복음 수용 이전의 제주 

제주도는1) 옛날부터 물난리가 자주 일어나고, 가뭄도 많고, 세찬 바람이 불어와서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활환경이 좋지 않은 삼재(三災)의 섬이라고 하였 다.2) 척박한 자연환경에 외지인이 적응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찬 가지로 외부 문화가 제주에 정착 혹은 수용되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융합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 복음 역시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육지와의 교통은 주로 목포와 완도를 통하여 이루어져 왔으며, 지리적으로 가까운 전라도에 오랫동안 부속되어 왔다.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는 전라도의 4개 목(牧) 가운데 하나로 통치를 받았다. 1896년 8월 정부의 지방 행정 개편 으로 전국의 8도를 13개 도로 확장시킬 때에도 전라남도의 일부였다. 해방 이후 1946 년 8월 1일, 미 군정청의 행정조직 개편으로 처음으로 제주도로 승격되었다.3)

1893년 1월,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제주도를 선교 구역으로 정하 였다. 하지만 선교사 인력과 재정의 부족, 그리고 교통의 불편으로 인하여 제주도에 대한 본격적인 선교에 착수하지는 못하였다. 15년이 지난 후 1908년 한국교회가 이기 풍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제주도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 제주도는 예로부터 탁라(乇羅: 풀로 짠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사는 곳), 혹은 탐라(耽羅: 깊고 먼 바다에 사는 사람 들) 그리고 제주(濟州: 바다를 건너가는 고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제주라는 이름은 고려 충렬왕 21년, 1295 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김봉옥, 《제주통사》, 제주: 제주문화, 1987, pp.21-30.2) 山高深谷水災, 石多薄土早災, 四面大海風災. 《제주통사》, p.21.3) 《제주통사》, p.241.

그러나 이보다 앞서 시도되었던 선교 혹은 복음 수용의 노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선교의 모든 노력이 좋은 결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교를 향한 노력과 헌신을 오로지 그 열매에 따라서 평가하는 것도 적절한 태도는 아니다. 그 역시, 성과를 만들 어내는 환경을 이루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내리는 비와 이슬이 모두 식물에 의 해 흡수되지 못하지만, 대기와 대지의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몫을 감당하고 있는 것 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과정이 없다면, 어떻게 싹을 틔우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겠는 가? 따라서 제주에서 복음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이루어졌던 많은 시도들을, 그 남겨진 흔적을 따라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천주교와의 접촉 

가. 정난주의 대정 유배

먼저, 천주교의 경우이다. 1899년 천주교 전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도 간헐 적으로 복음을 접하거나 혹은 교회의 활동이 제주와 연관된 일이 있음을 보게 된다. 백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면,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제주목 관노로 유배되어 온 여인 이 있었다. 기품 있는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킨 정난주 마리아, 바로 황사영 의 아내였다. 1773년 정약현의 딸로 태어났는데, 실학자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 가 그녀의 숙부들이었고 어머니는 이벽의 누이였다. 황사영과 혼인하여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았다. 남편인 황사영은 1775년에 태어나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 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은 매우 영특한 인재였으나 천주교를 믿음으로 현세적 명리에 는 등을 돌렸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전교에 전력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백서(帛書)를 썼다.

박해의 실상을 기술한 이 백서는 발송되기 직전에 발각되었다. 황사영은 대역 죄인 으로 체포되고,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제주에 유배된 마리아는 관비의 쓰라린 유 배 생활을 시작하였다. 다행히 담당하던 관리 김씨 집안에서 마리아의 성품을 높이 사서 어린 아들을 맡기게 되었다. 더구나 ‘한양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양모와 같이 봉양 하였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평생 신심을 지킨 마리아를 ‘백색(白色) 순교자’의 하나로 세고 있다.

나. 김대건 신부의 차귀도 표착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1822-1846)은 1845년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뒤 귀국하다 풍랑을 만나 제주에 표착하게 되었다. 출입국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 에 그는 서품받기 전에 일시 귀국하였다.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 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이 배를 타고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해로 갔다. 그리고 동년 8 월 17일 금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사품을 받았다. 8월 31일 조선 입국 을 위하여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 교우 및 선원 등 14명이 승선한 라 파엘 호는 상해항을 출항하였다. 그러나 3일 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으로 표류하게 되 었고, 9월 28일 제주에 표착하였다. 

그곳은 제주도 서쪽 끝에 있는 섬 차귀도였다. 이 섬이 보이는 가까운 마을인 용수 에 표착한 것을 기억하는 기념관이 세워졌다. 선박을 수리하고 곧 서해안으로 올라갔 기에, 제주에서 주민들을 접촉하거나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없다.

 

다. 김기량의 복음 수용

함덕 출신의 김기량은 제주인으로서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배를 타 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약재와 그릇을 싣고 모슬포로 항해 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3월 26일 중국 광동 해안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 었다. 그는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휴양 중이 던 조선인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어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면서 신학생을 통해 복음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곧 세례를 받았다. 제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 를 받은 것이다. 세례명은 펠릭스라 하였다.

1858년 1월, 의주를 거쳐 귀국한 그는 고향인 제주로 돌아가기에 앞서 육지에서 페 롱 신부와 함께 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만났다. 그를 만난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섭리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에게뿐만 아니라 제 주도의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 람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 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와 작별하면서 자기가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뒤 저한테 다시 오 겠다고 말하였습니다.4) 

김기량은 고향을 떠난 지 1년 2개월 만인 1858년 4월,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반기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1859 년 봄에는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성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났다. 그를 만난 베르뇌 주교는 “이 새 신자는 제주도 사람인데 총명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 안이 40명 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라고 하 였다.

그는 그 후로도 육지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 다. 그리고, 천주가사를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 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

제주를 복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거제도로 나갔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박하기름을 팔러 조선수군의 본부가 있던 통영으로 나갔다가 붙잡혔다. 옥에 갇힌 뒤 혹독한 매를 맞고도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 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966년 12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 는 51세였다. 천주교의 공식적인 선교는 1899년 5월 페네(Jean Charles Peynet) 신부와 김원영(金元永) 신부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오래 전에 복음의 여명 은 제주 땅을 비추기 시작하였다. 

4) 1858년 10월 4일자 서한.

 

3. 개신교, 제주를 탐색하다

가. 귀츨라프의 구상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애썼던 선교사들을 살필 때,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사 역자는 귀츨라프(1803-1851)이다.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던 첫 서양선박인 로드 애머스 트(Lord Amherst)는 1832년 7월 17일에 황해도 몽금포 해안에 당도하였다. 이 배에 귀 츨라프가 타고 있었다. 독일 태생으로 엄격한 경건주의 신앙으로 해외 선교를 꿈꾸며 중국에서 준비하다가 조선을 향하여 항해하는 상선에 승선하게 되었다.

로드 애머스트 호는 황해도 해안에서 남하하여 충남 보령 고대도에 도착하였다. 7 월 25일부터 8월 12일까지 정박한 동안, 귀츨라프는 고대도는 물론 인근 도서와 내륙 까지 선교를 시도하는 의욕을 보였다. 그리고 고대도를 떠나 8월 17일 제주도 해안에 이르게 된다. 이때 그는 제주도에 대해 언급하였다.

제주도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본, 조선, 만주 그리고 중국을 잇는 선교기지로 적 합하다고 귀츨라프는 판단하였다. “제주도는 인구가 많은 이 지역들 안에서 그리스도 의 교회의 첫 번째 설립과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를 위해서 최상의 충분한 기회를 제공 할 것”이라 기록하였다.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선교 전략을 체계적으로 구상한 것으 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언급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계획이 더 발전하였거나 구체적 으로 진행되었다는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5)

 


 

나. 제주인들에게 전해진 복음

제주인들이 개신교를 접촉했던 일들을 살펴보자. 첫째, 아펜젤러 선교사의 학당에서 공부한 제주도 학생이 있었다. 이름은 장지영이다. 1886년 12월 11일자 아펜젤러 일기에 《신앙》이라는 소책자를 주면서 복음전도 사역을 제주도에서 온 장지영에게 부 탁하는 내용이 남아 있다. 그는 제주도 출신으로서 어려움을 잘 참고 매우 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0년대 초 제물포에 세워진 영국성공회의 성누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복음을 전해들은 제주인들에게 성경과 전도책자가 전해졌다. 이들에 의해 제주도에 복음이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1890년부터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가 부산에서 자신의 거처에 사랑방 을 마련하고 전도자들과 손님들을 위하여 점심식사를 제공하였다. 1893년 9월 11일 자 일지에는 “남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제주도에서 온 장님”의 방문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94년 2월 2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주도에서 온 한 사람이 여기에서 여러 번 책을 구하고 약을 복용하였다. 그는 복

음에 대해 약간 관심을 보였다. 사람들 몇몇이 최근에 그곳에서 왔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그 섬에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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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베어드는 광범위하게 순회전도에 나섰다. 279일에 걸쳐 1,000마일이 넘는 긴 여행이었다. “베어드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면서 길가에서 전도했고 항구에서 선원 들에게 전도했다. 이런 방식으로 복음이 제주도까지 전해졌다”라는 기록을 다른 선교 사의 글에서 볼 수 있다.

 


다. 피터스의 단기선교

선교 목적으로 제주도를 방문한 사람은 성서공회에 소속된 전라도와 충청도를 담당 했던 권서인 피터스(A. A. Pieters)와 대영성서공회 책임자 켄뮤어(Alexander Kenmure)였다. 1899년 피터스는 켄뮤어와 함께 제주도를 다녀온 후 그의 선교여행을 글로 남겼다. 천 주교의 뮈텔 문서에 의하면, 페네 신부가 개신교 선교사들의 제주도 방문을 언급하였 다. 개신교 선교사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부들도 제주도 현지인들의 외부인 에 대한 인식 때문에 선교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개신교 목사들의 활동을 “엽전으 로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개신교 선교사 들이 제주도를 방문하였고 구체적으로 전도활동을 펼친 흔적을 증언하는 셈이다.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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