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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9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2.이기풍목사의 활동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14, 2016

 

  

2. 이기풍 목사의 활동(1908-1915) 


제주도의 초기 선교 사역은 이기풍 목사의 적극적인 활동의 결과였다. 이기풍 목사 의 연중 일정은 다음과 같다.

매년 1~2월에는 호남지방 각 선교부에서 개최하는 남자반 성경학교에 참석하여 성경공부 및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때로는 3월에 목포와 광주의 선교학교에서 실시하는 졸업식에 참석하여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4월 혹은 5월에는 전라노회/전남 노회 혹은 각 지역의 노회에 참석하여 제주도 선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줄 것을 부탁 하기도 하였다. 이 집회에 참석한 다음에 제주도로 돌아갈 때는 미국 남장로회 소속 호남지방의 5개 선교부에 소속된 목사와 의료 선교사들과 동행하여 한두 주간 혹은 한 달 동안 부흥집회와 의료 선교를 진행하였다. 이어서 9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 혹은 총회에 참석한 다음에 목포 선교부에서 개최하는 각종 집회에 참석하여 설교한 다음에 제주도로 돌아가곤 하였다. 이때에도 또한 호남지방 5개 선교부 소속 목사와 의료 선교사들과 함께 동행하여 제주도로 돌아가서 부흥집회와 의료 선교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서 선교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이유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후원이었다. 둘째, 한국 노회에서 총회로 이어지는 교계와의 긴밀한 유대관계이다. 셋째, 자신의 출신지역인 평양 지방 교회와 학생들의 협력이었다. 넷째, 특히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적극적인 협력이었 다. 다섯째,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자발적인 후원이었다. 


가. 선교사들과의 폭넓은 교제

이기풍 목사는 미국 남, 북장로교와 더불어 타 교단의 사람들에게도 이미 유명인사였다. 특히 미국 장로교 한국선교회 소속 선교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평양에서 신학 공부할 때 가르쳤던 스승들이었다. 따라서 이기풍 목사는 선교사들과의 폭넓은 교제를 통하여 이들의 후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미국 북장로회 평양 선교부 소속 마펫(Samuel A. Moffet: 마포삼열) 선교사의 개인적인 후원과 지도는 물론이려니와,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1908년부터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를 지원해 오다가 1914년부터 전남노회가 제주도 선교를 전담하게 되자 더욱더 적극적으로 이기풍 목사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원 가운데서도 의료 선교사와 아동 및 부녀자 선교를 위한 독신 여성 선교사의 파송은 제주도민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바꾸어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 여 선교사들이 1년에 두 차례 이상 봄과 가을에 제주도를 찾아가서 이기풍 목사의 활동을 지원하게 되었다. 가톨릭 선교사들과 그들의 횡포를 맛보았던 제주도민들은 더욱더 새로운 태도로 이기풍 목사를 대하게 되었다.

여기에 곁들여서 제주도에 귀양 와 있었던 철종의 부마 박영효와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하여 제주도에 초등학교 과정을 세워 제주도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이기풍 목사의 폭넓은 대인관계의 결과였다.

이기풍 목사가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유력 인사들과의 사귐은 제주도민들로부터 ‘무시할 수 없는 인물’로 인정받아서 ‘신축교안’ 이후로 배척받아 오던 기독교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나. 노회와 총회 참석

이기풍 목사는 봄철에 전남노회에 참석하고 가을에는 총회에 참석하여 제주도의 특별상황과 선교의 가능성을 역설하였고, 전국의 모든 총대들 앞에서 제주도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1908년 9월 서울 연동예배당에서 회집한 제2회 노회에 참석하여 제주도의 선교 상황을 보고하였다.


제주 전도하는 일은 잘 되옵는데 원입인 9사람이오며 매주일 모이는 사람은 20여 명이오며……선교사 이기풍 씨가 제주 전도 형편을 대강 설명하매 회중이 박장감사하니라.……길선주씨가 제주 전도인 김홍련씨의 설명 듣기를 청원하매 회중이 가로 결정하다. 제주 전도인 김홍련씨와 전도국장 길선주씨가 설명하여 전도사를 확장하자고 청원하니라.98)

 

이기풍 목사와 전도인 김홍련 씨의 설명을 들은 후 노회는 선교사 스월른(W. L.Swallen: 소안련)과 방기창 목사의 동의로 제주도의 여성 선교를 위하여 특별한 헌금을 할 것과 여성 전도인 한 사람을 파송할 것을 결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주 선교를 위한 헌금을 노회에서 취합하여 속히 전도국에 납부해 줄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99) 이렇게 하여 제주도에서 이기풍 목사와 더불어 여성들의 선교에 전념하게 된 여전도인은 이선광씨이며, 이선광씨의 전도 비용은 평양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감당하기로 하 였다.

1909년 9월 3일에서 8일까지 평양에서 회집한 제3회 노회에서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의 선교 상황을 보고한 것을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기풍 목사: 제주도 선교사와 그의 조사는 그의 사역에 대한 보고를 했다. 언어와 관습이 다르다. 자신이 어떻게 학대받았으며,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자기 뒤에서 돌을 던졌는가를 보고하면서, 이는 자신이 15년 전에 평양에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마펫에게 돌을 던진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으며 몇 군 데에서는 주일마다 예배를 드린다.100) 


이기풍 목사의 이상과 같은 보고를 듣고서 노회는 몇 가지 결정에 이르게 된다. 


전도국장 길선주 씨가 보고함이 여좌하니

1. 이기풍 목사와 김홍련 전도사는 열심히 전도하였사오며

2. 평양성교회 자매들이 연보하여 이씨 선광을 제주 여전도인으로 파송하여 저간에 부인네 중에 열심히 주를 믿는 자매들이 생겼사오며

3. 평양 대중학교 학도들이 연보하여 대학도 김형재씨를 제주 전도인으로 파송하여 넉 달간 열심 전도하였사오며

4. 제주 전도된 형편이온즉 열심히 믿는 형제들이 생겼사오며 또 주를 위하여 핍박 받는 형제도 있사오며

5. 성서공회에 교섭하여 제주에 매서인 한 사람을 두되 제주에서 믿는 형제 중에서 택하기를 경륜이오며

… …

12. 제주 여전도인 이씨 선광을 일년 동안 또 보내기를 작정하였사오며

……

선교사 이기풍씨가 제주에 전도되는 형편을 일일이 설명하시며 평양 대중학도로 파송된 김형재씨의 열심과 부인전도회로 파송된 리씨 선광의 수고하심을 일장 감사하매 회중이 방기창 리치수량씨의 기도함으로 찬송감사하다.…… 소안론씨가 제주 전도인의 설명 듣기를 동의하여 가로 결정하다. 제주 전도인 김홍련씨가 제주 300여 동리에 20만 명 되는 동포중으로 내왕하며 전도하던 형편과 그 풍속의 이동됨을 설명하매 회중이 박장답사하다. 김필수씨가 제주 형제들에게 노회에서 감격한 편지하기를 동의하여 가로 결정하다.101)

 

이기풍 목사의 노회 활동은 지속되었으며, 1910년 제4회 노회에서도 ‘제주도 전도인 1명을 더 택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파송된 전도인이 김창문씨였다. 뿐 만 아니라 목포 선교부의 마틴(Miss Julia Martin: 마율리) 여선교사가 여전도인 두 사람의 선교비를 부담함으로써 1910년부터 1911년까지 선교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여성과 아동 담당 선교에서는 이기풍 목사의 부인 윤함애, 이선광 조사, 그리고 마틴 양이 보낸 두 사람을 합하여 총 네 사람이 전도 활동을 전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1911년 제5회 노회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제주 전도 형편

1. 선교사 이기풍씨는 열심 전도이오며

2. 전도인 김창문씨를 육 개월간 보내어 전도하였사오며

3. 목포에 계신 미국 마 부인의 연보로 여전도인 두 사람을 보내어 전도하는 중이오며

4. 평양 대중학교 학도의 연보로 대학도 강병담 씨를 보내어 전도하는 중이오며

5. 평양 여전도회에서 이씨 선광을 또 보내어 전도케 하오며

6. 예배당은 3곳이요, 또 예배처소가 2곳이며, 교인은 160여 인이오며 연보 낸 돈은 81원 57전 6리이오며

7. 믿는 형제의 열심기도로 이적이 많사오며.102) 


예배당 3곳은 성내교회, 금성교회, 조천교회를 말하며, 예배처소 2곳은 모슬포와 성읍리를 가리킨다. 1911년에서 1913년에 이르는 선교의 진전되는 모습을 아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제주도 선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의 전도국 소관으로 선교사업을 추진 하다가 1912년 9월 전라노회는 평양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여 제주도 선교사업을 전담하기로 결의하였다.103) 이는 실로 전라노회로서는 대단한 결단이었다. 코이트(R. T. Coit: 고라복) 목사는 전라노회의 이 결정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 선교부의 교회들은 제주 선교에 관심을 보였다. 이 일은 6년 전에 노회(지금은 총회가 되었다)에 의하여 시작하였으며 우리 전라노회에 임무가 넘어왔다. 광주 성경 학교에서 이 목사의 가장 진지하고 열정적인 호소에 따라 오는 해에 300엔 이상을 약속하였다. 노회는 지혜롭게도 일 년 전에 예산을 편성하여 항상 앞서가는 행정을 하였다. 이곳의 사역은 한때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지만 이제는 놀라운 축복을 거두고 있다. 이 목사는 돌에 맞고 홀대를 받고 박해당하고 쫓겨났지만, 이제는 자기희생적인 헌금으로 교회당까지 세우게 되었다. 한때는 무섭고 게으르고 무식 했던 사람들이 학식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사람 들은 이렇게 눈을 밖으로 돌릴 뿐만 아니라 자기 지역 내로도 돌려서 축호전도하며, 전도쪽지를 들고 단순한 복음을 선포한다. 광주, 1912년 2월 8일.104) 

 

이 보고에 따르면 이기풍 목사는 1912년 2월 광주에서 실시하는 겨울성경학교에 강사로 참석하여 제주도 선교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역설하였으며, 1912년 노회 이후로 한 해 선교비로 300엔 이상을 약속받았다. 이에 전라노회는 1912년 봄 정기노회에서 제주도 선교비로 이 금액 정도를 편성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선교비를 집행하다가 부족할 때에는 총회에 지원을 헌의하기로 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1913년 1월 8일부터 18일까지 광주 양림동 숭일중학교에서 개최하는 도사경회에 김상종 조사와 함께 참석 하여 창세기, 사도행전, 요한복음을 강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예수교회 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이 목사와 김 조사가 제주도 정황을 설명한 후에 만당 형제자매가 열심히 연보하여 300여 원이 된지라.……어느 여학생은 지환을 빼어 놓고 혹 시표도 끌러 놓으며 보성 무만동 형님 김일현 씨는 작년 사경회에도 오셨다가 제주를 위하여 25원으로 전도인 몇 달 월급을 당하였는데, 이날 밤에 제주 백성이 전도를 듣고 모이기는 잘하는데 집이 없어 걱정이란 말과, 전도인이 다 기한이 되어 돌아가게 되고 전도할 사람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금 50원으로 예배당 일좌를 어느 촌에 사게 하고 36원으 로 전도인 반년 동안 세우게 하였사오니.105) 

 

이 보도에 의하면 이기풍 목사의 강의와 설교를 통하여 참석자들이 감화를 받았다. 한 여학생은 자신의 반지를 헌물로 내놓았고, 무만동교회의 김일현 장로는 감동적인 헌신을 보여 주었다.106)

 

98) 제2회 독노회록 (1908) pp.7-10.

99) 제2회 독노회록 (1908) p.11.

100) The Editor, “The Korean Presbytery”, The Missionary, Dec. 1909, p.605.

101) 제3회 독노회록 (1909) pp.12-17.

102) 제5회 노회록 (1911) pp.9-10.

103)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권, p.164.

104) Rev.R.T. Coit, “Notes from Kwangju”, The Missionary, June 1913, pp.646-647.

105) 《예수교회보》, 1913년 2월 11일자.

106) 김일현 장로는 보성군 무만동교회의 설립자로서 한센병에 감염되었다가 완치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았던 신앙인이다. 기록에 의하면, 김일현 장로는 1912, 1913년에 이어서 제주도선교에 적잖은 후원금을 쾌척하였 다. 당시 《예수교회보》 일년 구독료가 1원이었다.


다. 이기풍 목사의 휴식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도착하여 선교 사역을 시작할 때가 그의 나이 40세였다. 그 동안 앞뒤를 가리지 않고 제주도 전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잦은 출륙을 통한 활동 까지 겸하느라 이기풍 목사는 건강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 그리하여 1913년 5월부터 5~6개월간 휴가를 받아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예수교회보》 는 이렇게 전한다.

전라남도 제주군 선교목사 이기풍씨가 제주 각 지방 교회를 여러 곳에 설립하고 수고 많이 하시다가 금년에 오륙 개월 쉬어 가시려고 그 부인과 자녀 3명을 데리고 상경하여 5월 3일에 연동교회로 들어와 그 밤 3일기도회인 고로 예배당에 가셔서

……연동교회가 남녀 중학생과 여러 형제의 의복과 물품을 보내신 것으로 제주에서 큰 사랑과 큰 유익을 받았으니……새로 믿기로 나와 지금껏 열심히 주를 섬기는 자가 60여 인이 되어 전에 90인이 모이든 회당은 지금은 150여 인이 예배 보고.107) 


이기풍 목사는 1913년 5월부터 연말에 이르기까지 휴식하였다. 그러나 이기풍 목사 의 휴식은 휴식이 아니었다. 이기풍 목사는 황해도와 평안도 여러 지역의 교회에 다니면서 제주도의 형편을 보고함으로써 선교비 후원을 얻어냈다. 《예수교회보》는 이렇게 기록한다.


저간에 제주 이 목사가 평양에 돌아와서 쉬는 동안에 각 교회를 시찰하며……황주 교회에서 50원과 중화교회에서 24원을 제주 전도비로 연보하였는데……평양 여 중학교에서 제주를 위하여……40여 원이라 하며 평양 교회 여전도회에서 연전에 오랫동안 제주서 열심 전도하고 나오신 이선광 씨를 다시 제주에 보내기로 작정된 일 이더라.108) 


이기풍 목사가 휴식 기간에 얻은 소득은 여전도사 이선광씨가 다시 제주에 상주하면서 전도할 수 있는 지원을 얻어낸 것이다. 이기풍 목사가 평양에서 휴식하는 동안에 8월 15일에 회집한 제3회 전라노회는 제주 선교를 위하여 또 다른 결정을 내렸다. 


1913년(계축) 8월 15일 제3회 노회

제주 전도사업은 금년을 위시하여 총회가 본 노회에 위임하게 하되 전도비가 부족한 경우에는 총회에서 도와주기를 헌의하고, 제주 전도를 위하여 각 교회가 춘추로 1회씩 연보하여 전도국 회계에게 보내기로 결정하고 또 노회당석에서 연보한 금액이 160여 원이더라.109) 


전라노회의 결정은 1913년 9월 제2회 총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기풍 목사는 평양에서 총회에 참석하여, 그 자리에서 제주도 선교 상황을 보고하였으며, 제주도에서 예배드리는 교회는 성안교회, 모슬포교회, 조천교회라고 하였다.

 


라. 전라노회와 선교사 1명 추가 파송

이기풍 목사의 사역은 전라대리회의 사역으로 진행되었다. 1911년 전라노회가 창립되면서, 그는 노회의 사역에도 적극 협력하였다. 1912년과 1914년에는 부노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전라노회가 제주도 선교 사역을 전담하기로 한 것은 이미 1912년 8월 전라북도 궁말교회에서 회집한 제2회 노회에서 결정되었다. 전라노회 전도국장 유 서백 목사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110) 

 

전도국 위원이 제주 전도할 일에 대한 보고가 여좌하니

1. 1914년 5월부터 본 노회가 제주 전도할 일을 담당함.

2. 경비는 연년이 미리 모집함.

3. 본 노회가 전도비로 부족한 것은 총회에 청원하여 도움을 받음.

4. 본 노회에 속한 교회에서 600원을 명년 노회 안으로 모집함.111)

 

1913년 8월 제3회 전라노회록에서는 더 진전된 계획을 유서백의 보고를 통해서 볼 수 있다. 


1. 금년 총회로부터 제주를 본 노회에서 맡기로 하되 지금 들어온 돈은 560원 가량이 오니 만일 전도비가 부족할 경우에는 총회에서 도와달라고 헌의하기로 할 일.

2. 제주를 위하여 도와줄 마음으로 열심 연보하게 하되 사사로이 직접으로 하지 말고 본 전도국으로 보내어 예산 가운데에서 쓰게 할 일.

3. 각 교회에서 춘투로 한 번씩 전도 일을 위하여 연보를 하여 본 전도국 회계 전주마 로덕(L.O. McCutchen) 목사에게로 보낼 일.

4. 회계가 이 돈을 다 수합하여 10분지 1은 총회전도국으로 보내고 10분지 9는 제주 전도비로 쓸 일.

5. 춘추로만 할 뿐 아니라 각처 목사는 위원으로 더불어 형편을 보아서 기회 있는대 로 연보할 일.112) 


이 계획에 따라 1913년 9월 총회에서 전라노회는 제주도 전도 사역을 전담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제주 일을 돌아보는 것은, 전라도노회에 맡겨서 전도국 일년회의 경영과 예산을 하여 주는 대로 하게 하였습니다.”113) 일년 동안 선교비는 총회와 전라노회가 각각 절반씩 부담하도록 하였다. 사기에도 총회의 의안을 정리하면서 1913년 전도 부분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2. 본지방 전도위원의 보고에 의하여 각노회 구역내 미전도지방에 전도하는 사업은 각노회 전도회에 위임하니라.……

4. 제주 전도사업은 전라노회에 위임하니라.114) 


제주도 선교를 전담할 전라노회와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1914년 여름을 이용하여 전주의 테이트(L. B. Tate: 최의덕) 부부와 목포의 니스벳 부부가 함께 제주도에서 7 일 일정으로 전도집회를 개최하도록 하였다.115) 최의덕 선교사의 부인(Mattie Ingold Tate)은 이 방문사역과 현지의 인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제주 여성들이 육지와는 달리 자유를 누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교회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자리를 구분하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8곳의 예배 모임처와 90명의 세례교인이 있다. 니스벳 부인과 나(테이트 부인)는 49명의 여성반을 가르쳤다. 니스벳 목사와 테이트 목사는 25명의 선발된 남자반(제직)을 가르쳤다. 매일 저녁 부흥회가 개최되었다. 부흥집회에는 250~400명쯤이 질서있게 열심히 들었다. 날씨가 너무나 무더워, 집회는 교회의 뜰에다 차일을 치고 그 안에서 진행되었다. 신자들이 열심히 불신자 친구들을 찾아 데려왔다. 그들 중에서 결신자가 생겼다. 교회는 아주 좋은 공동체라는 인상을 우리에게 남겼다. 제주 사람들은 이교적 습관을 버리고 기독교인이 되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결심을 내리면 낙심하여 이탈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116) 


선교사 일행과 이기풍 목사는 특별집회를 성공적으로 가진 다음에, 1914년 8월 제4 회 전라노회에 참석하여 제주 교회의 형편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이기풍 목사가 보고하는 제주 교회의 형편에서 특별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부분이 있다. 즉 제주의 초기 교인들이 주민들로부터 “인심을 얻어……믿는 형제자매의 성질이 굳건하여……”117) 등의 표현이다. “인심을 얻어”라는 표현은, 제주도 초기 교인들의 도덕성이 제주도 일반인들의 표준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뜻이다. 이는 초기 한국교회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던 초기 기독교인의 우월한 도덕성이 선교와 전도의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던 점과 통한다. 또한 “형제자매의 성질이 굳건하여”라는 표현은, 제주도의 토속적이며 미신적인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대한 토착민들의 반발, 가족들로부터의 배척 등 기독교인이 되는 데 따른 각종 불이익을 잘 견디어 냈다는 의미이다. 


1914년 8월 15일 제4회 노회가 광주군 양림동 숭일학교에서 개최하니……제주 전도사업은 노회가 담당 경영하되 전도목사 1인을 加派하여 1인은 제주에서, 1인은 대정에 위치를 정하게 하고, 경비는 1천여 원으로 예산하고, 노회 경내 교회 감사 연보 중 3분의 2와 성탄주일 연보금으로 충당하게 하니라. 

동시에 1914년 8월 전라노회는 총회로부터 제주 선교를 단독으로 위임받은 상태임으로 첫해부터 예상하였던 933원을 모금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무사히 이 액수를 채울 수 있어 안심이었으나 지속적이며 안정적인 재정 확보가 필요했다. 전라노회는 1914년 9월에 회집한 총회에 헌의하여 “제주 선교의 완전 위임과 감사절 연보의 3분의 2를 제주 선교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118)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이기풍 목사 혼자서 제주도 전역의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과중한 일이었다. 해마다 육지에서 열리는 노회 및 총회, 그리고 각종 사경회에 수시로 다녀오는 여행, 찾아오는 손님들에 대한 접대, 전 지역에 걸친 교회들의 순회, 설교 및 유치원 운영, 야학과 달성경학교 운영 등 다양한 중노동은 결국 이기풍 목사를 과로로 지쳐 쓰러지기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세워지고 교인들이 증가하여 일은 갈수록 쌓여 갔다. 1912년의 제주도 선교 사역을 통계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912년까지만 해도 선교의 초창기였으므로 선교의 열매가 크게 나타나지 않았고, 예배당이 있는 교회도 성내, 대정읍, 조천 3곳에 불과하였다. 1913년에 이르러 교회의 숫자와 기도처(6곳)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다만 “피택장로 1인과 영수 3인, 집사 2인”이라는 점은 제주 교회가 점점 조직 교회로서 자리 잡혀 가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의 형편인데, 학생 숫자는 1913년에도 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재정 군졸한 중 근근 유지하오며”라고 보고한 내용으로 보아서 제주도의 학교 사업은 첫 출발에서부터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사람 선교사와 두세 명의 협력자들이 제주도 전역을 선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 과중한 사역이 결국 선교사 이기풍의 건강 악화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이기풍 목사의 1914년 활동을 정리해 보자.

이기풍 목사는 1914년 3월에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의 졸업식에 참여하여 설교한 다음에, 목포를 비롯한 여러 교회에 제주도의 선교 현황을 알림으로써 제주도 선교를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목포 정명학교 교장이었던 니스벳 목사의 부인은 1914년 3월에 진행된 졸업식과 이기풍 목사의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3월은 졸업장을 주기에 거북스러운 달이지만, 일본의 모든 학교가 이 시기에 졸업식을 거행하기 때문에 우리 선교학교도 정부의 시책에 따라야 한다. 니스벳 앞에 있는 신사는 제주도의 이 목사이며, 이 목사는 여학교 졸업식에서 연설하고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제주도 사역을 이야기한다.119)

1914년 7월에는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하고, 8월에는 전라노회에 참석하고, 9월에는 총회에 참석하는 등 너무나도 벅찬 업무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기풍 목사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인하여 한 사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된 선교 사역, 이기풍 목사의 건강 약화 그리고 총회로부터 제주 선교 사역을 전담하게 된 전남노회와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부담감 등이 제주도에 선교사 한 사람을 더 파송하도록 결정하게 된 주요인이었다.

107) 《예수교회보》, 1913년 5월 13일자.

108) 《예수교회보》, 1913년 7월 8일자.

109) 《사기》, 하권, p.165.

110) 유서백(John Samuel Nisbet, 1869-1949)은 1907년부터 전주에서, 1911-1940년에 목포에서 사역하였다. 순천선교부를 세우는 일에도 노력하였고, 전남지역의 농촌선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제주선교가 총회로부터 전라노회로 이양되는 일을 주도하였다.

111) 제2회 전라노회록(1912) pp.26-27.

112) 제3회 전라노회록(1913) p.22.

113) 제2회 총회록(1923) p.25.

114) 《사기》, 하권, p.15. 해외선교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중국인 선교와 한인교포의 선교를 구분하였고, 함경 도가 시베리아와 북만주를, 평안도가 만주 서부를 담당하였다.

115) 예정은 일주일이었으나, 일기 관계로 보름 동안 체류하였다.

116) Mattie Ingold Tate, “The Cheiju Work”, The Korea Mission Field, 1915, p.58.

117) 제4회 전라노회록, 1914, p.12.

118) 제4회 전라노회록(1914), p.14. 총 수입액은 834원 40전으로서 예산액 933원에 99원 60전이 부족하였다. 노회는 당석에서 제주 선교를 위한 특별헌금을 실시하여 90원 54전을 모금하였다. 녹스(Robert Knox: 노 라복) 선교사는 선교 구역에서 약속하였던 13원을 추후에 납부하여, 1914년 전라노회는 총회로부터 제주 선교를 단독으로 실시하기로 위임받은 데 따른 재정부담에서 자유로워졌다.

 

 

 

마. 윤식명 목사

 

윤식명 목사는 1871년 11월 11일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양 부모를 잃는 슬픔을 딛고 자라났다. 소년기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1896년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유진 벨 목사의 주목을 받아 전주에 와서 테이트 선교사의 매서인으로, 조사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맡은 지역은 금구, 태인, 정읍, 고부, 임실, 그리고 부안 등이었다.120)

윤식명 목사는 테이트 선교사의 추천으로 1904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6월 15일에 졸업하였으며, 김필수, 최중진과 더불어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에서 추천하는 최초의 3인 목회자로 동년 9월에 임직받았다.

당시 목포 양동교회는 당회장이던 프레스턴 선교사가 광주로 떠남으로써 해리슨 목사가 1909년 7월에 회집한 제18회 선교사 연례대회에서 목포 선교부로 전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7~8월까지는 휴가기간이므로 해리슨 목사는 9월에 전라대리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은 윤식명 목사와 거의 동시에 목포 선교부에 부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윤식명 목사는 1909년 9월 부임 이후 해리슨 선교사와 동사목사로서 목포 양동교회에서 사역하다가 1911년 2월에 위임목사로 청빙받았다. 이 부분을 선교사 맥컬리(Henry D. McCallie: 맹현리)는 이렇게 말한다.


해리슨은 교회와 여학교 건물 건축을 시작한 다음에 3월에 평양신학교에서 6주간 가르치기 위하여 떠났다. 2월 마지막 주일에 Y. S. Yoon(윤식명)을 담임목사로, 장로 1명, 집사 2명을 세움으로써 우리 선교회에서 최초로 자립하는 교회가 되었으며, 한국 전역에서 네 번째의 자립 교회가 되었다.121)


1911년 2월 이후로 목포 양동교회 담임목사직을 맡은 윤식명 목사는 예배당 건축 공사에 착수하였다. 목포 양동교회는 1906~1909년 사이의 성령운동의 결과로 교인의 숫자가 500여 명에 달하고, 교회를 증축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122) 맥컬리와 목사도 1906년 부흥회 이후 목포 교회가 차고 넘쳐서 1908년에 이르러서 예배당을 새롭게 지을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고한다.123)

이러한 교회 건축의 필요성은 점점 더 고조되었으며, 교인들은 예배 후 수천 장의 전도지를 들고 거리와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전도하였다.124) 그 결과 목포 양동교회는 1909년 7월 4일을 기하여 500명을 돌파하였으며, 이제는 1,000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당을 건축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구 교회는 목포 남학교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윤식명 목사의 목회는 어떠한 모습이었는가? 동사목사로 사역하였던 해리슨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윤 목사는 회중을 10명씩 15집단으로 조직하여 주일 오후에는 밖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했다. 어떤 곳에서는 산신각을 허물고 내려오는 일단의 사람들을 만 났다.125)


윤식명 목사의 전도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목포 양동교회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윤식명 목사 부임 후 1년 사이에 550명으로 회중이 커짐으로써 1911년에는 석조 예배당을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소요되는 비용을 해리슨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목포교회: 윤 목사와 해리슨이 동사목사인데 크게 성장했다. 아침 예배 시간에 참석하는 평균인원은 550명이다. 회중이 커서 남자는 교회당에서 여자는 근처 학교에서 모임을 가져야 할 정도이다.…… 숙고 끝에 돌로 교회를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가난한 교인들에게는 엄청난 일이다. 선교회는 현재의 교회 건물에 500 달러와 또 다른 땅을 주었다. 선교회는 400달러를 주면서 회중이 이보다 배를 더 모금하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현재 350달러를 작정했으며, 건축이 진행되는 대로 더 많은 금액이 모일 것으로 보인다. 여인들이 은반지, 은비녀를 가지고 온다. 어떤 사람은 필요하다면 자신의 집을 팔아서 헌금하겠다고 했다.126) 


이 부분을 전라노회록에서는 ‘석조 예배당 60칸’이라고 규모를 말해 준다. 건축을 위해서 목포 양동교회 교인들은 선교회로부터 땅을 무상으로 양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건축기금 500달러까지 약속받았다. 그리고 이 액수에 상응하는 금액을 모금하라는 요구 조건까지 수용하였다. 윤식명 목사와 교인들은 은비녀와 은반지를 내놓고, 어떤 교우는 자신의 집을 헌금하기로 작정함으로써 건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결국 1910년 말에는 예배당 건물의 벽면을 완성하였으며, 건축을 위하여 헌금한 돈의 액수가 선교사들에게 약속하였던 500달러를 넘어서 750달러에 이르렀다.127)

 

윤식명 목사는 첫 담임목사로서 사역하였던 목포 양동교회에서 전도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선교사들로부터 큰 인정을 받아 1914년 제주도 선교사로 추천받았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윤식명 목사가 제주도에 도착할 즈음 제주도 기독교의 교세는 어떠하였는가? 이기 풍 목사는 1908년부터 1911년 사이의 상황을 “예배당이 있는 곳이 3곳이며 예배처소가 2곳이며, 교인은 160명이다”라고 노회에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클라크(Rev. Charles Allen Clark: 곽안련) 선교사는 1914년에 “그 섬에 목회자가 6명이고 12개 이상의 교회가 있다”128)라고 보고하였다.

평양의 클라크 목사가 정리한 대로 1914년까지 세워진 12개 이상의 교회와 목회자 6명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 밖에도 내도교회, 법환교회, 고산교회, 두모리교회, 세화교회 등의 교회들이 1920년에 이르기까지 설립되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목사와 남녀 전도인을 포함한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1918년에 광주 봉선리교회에서 파송한 원용혁 전도사와 광주 여전도회에서 파송한 김경신 여전도사, 그리고 자부담으로 전도에 전념하였던 강진 출신의 최대현 전도인이 있었으며, 윤식명 목사와 함께 협력하였던 목포 양동교회 출신의 김영진 영수 등이 있었다.


바. 이기풍 목사의 활동


이기풍 목사의 사역을 당시 설립된 교회들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기풍이 제주에 오기 전에 모이던 이호리 공동체(1904)가 성내교회로(1910) 새롭게 출발하였고, 금성리 공동체(1907)도 교회의 면모를 갖추었다(1908). 또한 조천교회(1909), 성읍교회(1910), 모슬포교회(1910), 중문교회(1915) 등이 서게 되었다. 그의 전도로 말미암아 결신한 신앙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기풍 목사가 떠난 이후에 세워진 교회들도 있으니 한림교회(1915), 고산교회(1916), 용수교회(1918)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129)

 

119) Mrs. J. S. Nisbet, “What is in a Name?”, The Missionary Survey, July 1914, pp.532-535.

120) 한인수, 《호남 교회 형성 인물》, 서울: 도서출판 경건, 2000, pp.170-177.

121) H. D. McCallie, “A Report from Mokpo, Korea”, The Missionary, June 1911, pp.208-309.

122) 1908년과 1909년에 프레스턴 목사는 목포 교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예배당을 증축해야 할 단계에 이르 렀다고 보고한다.
123) H. D. McCallie, “A Letter from Mokpo”, The Missionary, July 1908, pp.351-352: “한국은 추수를 앞두고 익어 있는 상태인데도 고국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목포에 있는 교회는 쥐어짜야 하 며, 우리가 교회를 확장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떠날 것이다.……이 교회도 너무 가득 차서 새로운 교회를 지어야 할 형편이었다. 하나의 큰 문제는 교회당을 빠르게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124) W. H. Forsythe, “Things are Moving in Korea”, The Missionary, Sept. 1909, pp.462-463.

125) W. B. Harrison, “Our First Korean Pastor”, The Missionary, Feb. 1910, pp.76-77.

126) W. B. Harrison, “Annual Report of Rev. W. B. Harrison”, The Missionary, Nov. 1910, pp.557- 558.

127) The Editor, “Korea Mission”, The Missionary, May 1911, pp.240-241.

128) Rev. Charles Allen Clark, “Korean Foreign Missions”, The Missionary Survey, November 1914, p.878

 129) 《제주 선교 70년사》, p.163.

3. 이기풍 목사의 사임


▲ 1921년 제10회 총회장에 취임한 후 찍은 것

이기풍 목사는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의 파송을 받아 제주도 선교사로 1908년 2월 말 혹은 3월 초순에 도착하여 사역하기 시작한 이래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아직 신축교난의 피해가 가시지 않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팽배한 제주도에서 선교활동을 지속하기란 참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풍 목사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여 적지 않은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성내교회 내에 남녀 소학교를 세워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윤함애 사모와 여전도사들의 활동으로 제주도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건강과 위생을 개선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선교사와 목사들, 의사들을 지속적으로 초청하여 제주도민들을 영적으로 해방시키고 또한 육체적인 질병과 미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였다.이상과 같은 성과를 거두기까지 이기풍 목사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으며, 그결과 소리가 나오지 않는 성음부족증이라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부분을 니스벳목사는 이렇게 전한다.

안식년

이기풍 목사는 7년간의 열정적인 사역으로 지난 겨울에 신체적으로 병을 얻어서 의료 치료를 받도록 안식년을 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인 교회가 그의 추가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정규적인 사역을 넘겨주려는 마음이 없음으로 인해서 3명의 한국인과 3명의 외국인으로 구성된 선교위원회는 5개월 혹은 필요에 따라 그 이상 안식년을 취하도록 하고, 한국인 교회가 그의 부재기간의 사역을 지원하기로 하였으며, 선교사들이 그의 강압적인 안식년 기간의 추가 비용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기풍의 급여와 여행비는 선교사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하여 충당하였으며 또한 이기풍은 필요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이기풍)가 마펫에게 돌질하였던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그는 마펫에게 비난과 돌을 들었던 그 시기의 열정과 마찬가지의 열정으로 이제는 기독교 사역자로서의 손을 들었다. 목포, 한국.130)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선교 사역에서 일단 손을 떼고 광주군 효천면 지한리(현 광주시 남구 방림동)에 있는 김윤수 장로의 집 옆에 집을 마련하여 치료와 휴식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131)

130) Rev. J. S. Nisbet, “Progressive Presbyterianism”, The Missionary Survey, November 1915,pp.838-840.
131) 이기풍 목사는 휴식과 치료를 통하여 어느 정도 회복되자 1916년부터 광주 양림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18년에 다시 발병하자 양림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6개월 정도 치료에만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치료가 된 후에는 광주 기독병원 원목으로서 사역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부터는 순천읍교회로 전임하였으며, 1921년에 총회장에 피선되고, 1923년에는 성역 20주년 기념회를 가졌다.​

제목
#10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9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2.이기풍목사의 활동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8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1.제주선교와 의료봉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7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3.성내교회의 교육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6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1.이기풍목사 입도와 첫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5 1부3장 제주의 신앙선각자들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4 1부2장 성령대부흥운동과 한국선교의 출발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3 1부1장 1907년 이전의 한국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 들어가는 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