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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8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1.제주선교와 의료봉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14, 2016


제5장

제주 선교의 확산


1. 제주 선교와 의료 봉사

제주도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친 단체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와 조선 왕조의 근대화 이행이었다. 이 가운데서 로마 가톨릭은 1901년 ‘이재수의 난’ 혹은 ‘신축교안’으 로 활동이 위축되었지만, 개신교는 선교 초기부터 학교와 교육으로 제주도민들의 마음을 얻기 시작함으로써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로마 가톨릭과 구별된 입장에서 선교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조선 왕조는 중앙정부를 비롯하여 지방 각 정부(목, 현)에 이르기까지 의생(醫生)을 두어서 백성들의 삶을 위로하여 왔다. 특히 ‘혜민서’(惠民署)는 거의 무료에 가깝게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었다. 이러한 조직에 따라서 제주도에서도 각 부서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전라남도의 중심이었던 나주의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羅州府의 경우 제도 개혁 이전에는 鄕吏 33명, 營吏 8명, 醫生 60명, 律生 15 명, 書員 55명, 軍官 50명 등 鄕吏와 軍校 등에 해당하는 관리의 숫자가 상당하였 다.84) 


이 조직표에 의하면 제주도에도 의료인이 상주하였다. 1672년(현종 13년)에 최초로 의료인을 파송하고, 1720년(숙종 46년)에는 약국을 설치하여 제주목과 정의, 대정에서도 약국을 운영하였다. 약국의 요원은 제주목에는 감관(監官) 2인, 의사 14인, 약사 20인이 있었으며 정의, 대정현 약국에는 의사 2인, 약사 8인이 있었다.85)

조선 왕조 시대에는 질병이 자주 발병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를 위한 조치를 취해야 만 했다. 제주도에는 1770년(영조 46년)에 역병이 돌았고, 1824년(순조 24년)에 콜레라가 만연 하여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1886년(고종 23년)에도 역병으로 많은 목숨을 잃었다.86) 그리고 1909년 초에 “제주 지방에 괴질로 삼천여 명이 사망하였다”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87)

일제는 조선을 강제로 속국으로 복속시킨 후 한국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펴기도 하였 다. 지금까지 조선 왕조에서 운영해 오던 각 지방의 ‘혜민서’를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원한 것이다. 제주도에도 1912년 10월 14일부터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자혜의원’이 개원하였으며, 일본인 의천형(蟻川亨)이 업무를 시작하였다.88) 그렇지만 이 의원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제주도에 의료 선교를 시도하였다. 목포, 전주, 군산, 광주의 의료 선교사들이 매년 한 차례 이상씩 제주도에 가서 15일에서 30일 동안, 심지어는 두 달 동안 제주도민들의 각종 질병을 치료한 것이다. 이는 초기 교회의 정착에 큰 힘이 되었다.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연례대회에서, 매년 1월 혹은 2월에 제주도에서 성경학교와 의료 봉사를 할 선교부를 순번제로 할당하였다.

이 가운데서 포사이트와 윌슨의 의료 선교 사역에 대해서 잠시 소개하려고 한다. 1910년 5 월에 광주 선교부의 목사 프레스턴(John F. Preston: 변요한)과 목포 선교부의 의사 포사이드 (William H. Forsythe: 보위렴)는 전남노회가 회집한 다음에 제주도로 돌아가는 이기풍 목사와 동행하여 제주에서 각각 영적 부흥과 더불어 의료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89) 1910년 8월 광주에서 개최된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연례대회에서 목포 선교부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프레스턴 목사와 한 주간의 제주도 여행을 하였다.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예배에 참석 하고 치료 받으러 나오는 모습은 어린양의 보혈의 깨끗게 하시는 능력과 더불어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는 간절한 필요를 가슴 아프게 증언해 준다. 우리는 의료선교 여행이 자주 있어야 한다고 본다. 목포 진료소 소속의 의학생들이 두달간 치료 여행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1천 건의 치료를 행하였다. …… 목포와 제주를 합하여17,000여 건의 치료를 베풀었다.90) 


목포 선교부는 포사이드 의사의 활동을 부드럽게 표현하였지만, 동료 선교사로서 옆에서 지 켜보았던 프레스턴 선교사는 포사이드의 열정과 활동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 였다.

포사이드는 …… 프레스턴과 함께 근래에 제주도를 방문하였으며, 날마다 진료를 실시하여 400명 이상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곳에 조수를 몇 명 남겨 둠으로써 사역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포사이드 의사는 자지도 먹지도 않고, 거의 모든 시간에 다만 설교하고 기도한다.91)

동료 목사 선교사들은 자기네들보다도 복음 선교에 더욱 열중하는 의사 포사이드에 대하여 크게 부담스러워하며, 질투심이 담긴 표현까지 보여 주고 있다. 1910년 5월부 터 1911년 5월까지의 목포 선교부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의료사업에서는 포사이드 의사가 한 해 동안 놀라운 일을 하였다. …… 그는 새로운 병원 건물을 희망한다. 의사는 진료소의 젊은이들을 훈련시켜서 돕게 한다. 그는 제주도를 방문하여 그곳에서도 의료 지소를 운영 중이다. 이렇게 병원에서 전도에 열을 올림으로써 병원인지 교회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이다.92)

포사이드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들의 질투를 의식하지 아니하고, 1910년 5월에 호남 대회를 마치고 제주도로 돌아가는 이기풍 목사와 함께 제주도에 와서 전도와 치료에 전념하였다. 동료 선교사 프레스턴이 동행하였다.

1910년 9월 19일에 평안북도 선천에서 회집하는 제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에 참석차 제주도의 이기풍 목사는 목포 선교부에 들렀다. 이기풍 목사는 목포 양동교회에 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손을 잡고 추진 중인 ‘백만명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개최된 부흥집회와 전도집회에서 설교하였다. 


목포의 백만 명 구령운동에 참석하여 부흥회를 인도한 사람은 제주도의 이기풍 선교사였다. 이기풍 목사는 1910년 9월 조선독노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목포 양동 교회에서 신앙사경회를 인도하였으며…… 93) 


이기풍 목사는 1910년 가을 정기노회를 마치고 제주도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목포에 들러서 설교한 다음에, 윤식명 목사와 여선교사 마틴(Miss Julia Martin: 마율리)양과 함께 세 사람이 제주도에 가서 동일한 ‘백만 명 구령운동’을 전개했다. 


한국 노회가 감리교와 연합하여 지난 가을에 서울에서 이 운동을 시작하였으 며……이곳 목포에서도 110명이 바쁜 가을의 일손을 멈추고 일주일 동안 전도 활동을 전개했다. 아침에 기도회와 협의회를 갖고, 각각 맡은 구역에서 축호전도하 고, 복음을 말하면서 신앙생활을 촉구했다. 저녁에는 예배를 드렸으며 많은 사람이 결신했다. 목포에서 일주일이 끝난 다음에, 또다시 자신들의 거처로 가서 동일하게 복음화에 참여했다. 제주도 선교사 이 목사가 목포에 와서 설교로 협력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목포 교회의 한국인 목사와 Miss Martin 양이 이 목사와 함께 제주도로 가서 동일한 활동을 전개하였다.94)

이렇게 제주도의 선교 사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자 여기에 위축감을 느낀 천주교 측에서는 이기풍 목사를 위협하거나 간접적으로 회유하기도 하면서 개신교 선교 활동을 중지시키려 하였다. 코이트(R.T. Coit: 고라복)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선교는 제주도에서 잘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 선교사는 그곳에 가톨릭의 고위직 사람으로부터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고위직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며, 거절하면 박해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95)

포사이드 선교사와 더불어 제주도 선교에서 의욕을 보이며 활발하게 제주도의 의료 선교에 참여하였던 사람은 윌슨(Robert M. Wilson: 우월순) 의료 선교사이다. 그는 1912 년 5월에 아내와 조수 4명을 대동하고 제주도에서 활동하였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 고한다.


우리는 3년 동안 제주도에 병원을 세워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 지난 5월에 방문하였으며, 우월순 의사는 아침에 2시간씩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밤에는 찬양(예 배)을 인도하였다.……치료받으러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우리 네 사람은 이들을 잠잠케 하였다.……두 번째 날에 나는 숨이 넘어가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하여 서둘러 따라갔는데, 그는 도로상에 의식도 없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상태였다.……거의 죽은 것과 같았지만 마지막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손바닥 크기만한 덜 익은 소고기 조각을 끄집어냈다. 인공호흡과 힘든 조치를 취하여 반시간 뒤부터 숨 쉬게 되었다. 사람들은 몰려들고 나의 조수(최흥종 장로)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 으며, 그 자체가 위대한 설교였다. 아침에는 50~70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오후에는 3~4건의 수술을 하였다.96) 


이기풍 목사는 1912년 봄에도 전남노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육지에 나왔다가 제주 도로 가는 길에, 윌슨과 그의 조수 서너 명과 더불어 제주도에서 부흥집회와 함께 의 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윌슨의 글에서도 보듯이 제주도 선교를 위해서는 병원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이기풍 목사는 지난 3년 동안 줄기차게 의사의 상주를 요구하였지만, 미국 남장로회 한국 선교회는 재정과 선교 인력의 부족으로 제주도에 선교병원을 세우지 못하였다. 이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한국인 의료 선교사 오긍선 박사도 1913년에 이렇게 지적 하였다.

제주 사역은 밝으며, 이 목사가 일한다. 지난 봄에 Dr. Wilson이 한 주간 동안 그곳에서 진료하였다. 그곳에 선교 의사가 상주하기를 바란다.97)

 
그러나 제주도의 선교병원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꿈은 1972년 카딩톤 (Herbert A. Codington: 고허번) 의료 선교사가 광주기독병원에서 선교 사역 20년을 끝내고 방글라데시로 가기 전에 다시 시도하였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84) 《國譯 錦城邑誌》 1897, 1989, p.42.

85) 《제주도지》, 제3권, 2006, p.483.

86) 《제주도지》, 제3권, 2006, p.483.

87) 고창석 강만생 박찬식, 《제주사 연표 I》, 제주: 제주사정립추진협의회, 2005, p.350.

88) 《제주사 연표 I》, p.360.

89) 프레스턴 목사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제주 섬에서 2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월요 일(5월 30일)에 광주로 돌아왔다고 썼다.

90) Mokpo Station Report, Station Reports to the Nineteenth Annual Meeting of the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 in Korea, 1910, p.51.

91) Notes from Quarterly Report, “From April to June at Mokpo”, The Missionary, Nov. 1910, p.558.

92) The Editor, “Korea Mission”, The Missionary, May 1911, pp.240-241.

93) W. H. Forsythe, “The Million Campaign at Mokpo”, The Missionary, Jan. 1911, pp.75-76.

94) Dr. W. H. Forsythe, “The Million Campaign at Mokpo”, The Missionary, Jan. 1911, pp.75-76.

95) R. T. Coit, “The Presbytery of Korea”, 1, 1911, pp.29-30

96) R. M. Wilson, Medical Report of Kwangju Station, The Korea Mission Field, Oct. 1912, pp.292-293.

97) Dr. K. S. Oh, “Progress of the Kingdom in Korea”, The Missionary, April 1913, pp.470-471.

제목
#10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9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2.이기풍목사의 활동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8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1.제주선교와 의료봉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7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3.성내교회의 교육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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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부3장 제주의 신앙선각자들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4 1부2장 성령대부흥운동과 한국선교의 출발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3 1부1장 1907년 이전의 한국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 들어가는 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