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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7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3.성내교회의 교육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14, 2016


 

3. 성내교회의 교육선교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 목사가 학교를 시작하는 것으로 제주도 선교의 시발을 삼 은 이유 혹은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는 역사적으로 크게 두 부분에서 이에 대해 접근 할 수 있다. 첫째는, 당시 조선조 말엽에 신교육 바람이 일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신교육 강조의 진원지 가운데 한 사람인 박영효가 제주도에 귀양살이하면서 이기풍과 만 남을 가졌기 때문이다. 셋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의 정책이 교회에서 신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 부분을 차례대로 살펴보려고 한다.


가. 교육 입국 표명

 

견미사절단으로 미국을 다녀온 민영익을 비롯한 일행은 1884년 6월에 고종에게 우체국과 학교 그리고 각종 서구식 제도를 건의하였다. 그 가운데서 우체국은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개국하자마자 폐지되었다. 이어서 1886년 9월부터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교 대학원(Union Theological Seminary, New York)을 졸업한 세 사람 헐버트(Homer B. Hulbert), 벙커(Dalziel A. Bunker), 길모어(Georege W. Gilmore)를 교사로 초빙하여 ‘육영공원’을 개원하였다. 양반의 자제들을 서양식 교육을 받게하고 관리로 등용하려한 것이 다.

 

그렇지만 이 학교는 재정난에 부딪혀 1894년부터 미국 북감리교 한국선교회에서 세운 배재학교에 이 교육의 일부를 위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95년 10월에 갑오 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관리 등용의 문호를 반상제도와 관계없이 능력자에게 개방하자, 이제는 누구든지 서구식 교육만 받으면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분위기는 곧바로 한국의 서민계층에게 서구식 학교를 선호하게 하였다. 한국 내에서 선교하던 각국 선교회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교회 내에서 서구식 교육을 하는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나. 박영효 대감의 영향

이러한 서구식 교육 입국의 기치를 부르짖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박영효였다. 박영효는 1861년에 태어나 1872년에 철종의 외동딸 영혜 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나 영혜 옹주가 죽자 금릉위(錦陵尉)가 되었다. 그는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접했으며,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으로 가는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다녀오면서 일본을 통한 개화를 꿈꾸게 되었다.

그러다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에서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참여함으로써 역적이 되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와 1894년까지 약 10년 동안 뼈아픈 망명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에 박영효는 1888년 미국선교회가 운영하는 메이지 학원의 영어과를 졸업하고, 요코하마 미국교회에 참석하면서 동서양의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 기간에 박영효는 일본의 개화파 인사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개화사상에 빠졌으며, 그들의 도움으로 1893년 말 도쿄에 교포 유학생들을 위한 친린 의숙(親隣義塾)을 세워 운영하기도 하였다.

박영효는 1894년 8월 23일 친일인사의 영입에 따라 서울로 돌아왔으며, 12월에는 김홍집 제2차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발탁되어 다시 정치 일선에 섰다. 그러다가 1895년 10월 을미왜변에 연루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것이 그의 제2차 망명이다. 이렇게 하여 박영효는 또다시 일본에서 10여 년을 보내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박영효는 1907년 6월 초에 비공식으로 부산에 들어와 있다가 6월 13일에 고종의 특사를 받게 된다. 성대한 환영을 받으면서 서울로 복귀하여 7월에는 궁내부대신직을 받았다. 그러나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밀려나게 되자,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과 강행하려는 세력이 맞설 때 박영효는 양위 반대파에 섰다. 그 결과 양위 찬성파를 암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제주도에서 1년간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실제적으로는 1907년 9월부터 1910년 2월까지 제주도에 체류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과수원을 조성하는 등 제주도 개발 사업에 전념하였다.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1907년 9월 3일 박영효 재작일 인천항에서 윤선을 타고 목포를 거쳐 제주 향발.

1907년 9월 6일 박영효, 부인, 딸과 사위, 하인 등을 데리고 유배지 제주 도착, 제주 유지들 마중.

1908년 1월 5일 제주 안치 박영효씨의 석방할 뜻을 내각에서 제의.

1908년 1월 23일 박영효씨가 늑토의 폐단을 막기 위해 도민들이 귤나무를 작벌하지 못하도록 함.

1908년 6월 19일 제주 안치 박영효씨 해배되었다 함.

1908년 7월 14일 박영효 제주 인사와 협의하여 설립한 의신학교가 개학 반년 만에 학생 수가 백여 명.

1908년 8월 9일 박영효씨 해방 후에도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봄에 개간한 과수 원을 돌보기 위해 연말까지 머물 예정.77)


이렇게 박영효는 석방 후에도 제주도에 머물렀지만 1909년 7월에 이르러 신병이 위독한 상황에 처하게 됨으로써 활동을 중단하였다. 이러한 박영효의 사정을 알게 된 조정에서 1909년 9월 26일에 ‘1만 환’을 지급하자, 박영효는 그 돈으로 10월 24일에 정경방학교 운영에 ‘연 1만 2천 환’을 지급하기로 하였으며, 보광학교에는 1910년부 터 ‘월급의 10분의 1일을 보조하기로’ 하였다.

박영효는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1907년 9월부터 1910년 2월에 이르기까지 이기풍 목사와 만나게 되었다. 이기풍 목사에게 그의 교육 입국론을 펼침으로써, 이기풍 목사의 선교는 우선적으로 제주도 주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교육으로 시작하게 만들었다.

박영효는 제1차 일본 망명 시절인 1888년 고종 황제 앞으로 〈건백서〉를 보냈다. 이 상소문의 제6조에 해당하는 “六曰敎民才德文藝以治本”에서 박영효는 교육, 문화, 종교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였다. 먼저 박영효는 전통적인 유교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유교는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구학문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만일 四書三經과 諸子百家의 書를 읽고 외워서 문장깨나 지으면 비록 어리석고 썩어빠진 유생이라도 大學士라고 일컬어지고 士大夫에 올라 백성과 나라를 그르치고 있는데 이것이 아시아 여러 나라가 쇠퇴하는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 오늘의 급무는 학교를 크게 일으키고 博學 達理한 선비를 맞이함으로써 나라의 인민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위로는 세자 전하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입학시켜 공부하게 함으로써 천지의 無窮한 理를 밝힐 것 같으면 …….78)


박영효는 위에서 인용한 대로 전통적인 유학 교육에서 벗어나 서구의 새로운 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한국에는 이미 1886년 9월부터 육영공원이 세워져 있었으며, 미국에서 초빙한 선생들이 신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박영효는 종교에 대해서도 “……무릇 종교란 것은 인민의 자유 신봉에 맡겨야 하는 것이고 정부가 간섭해 서는 안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교육에 대하여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하였다.


一. 소 중학교를 설립하여 6세 이상의 남녀로 하여금 모두 입교하여 수학하도록 할 것.

一. 장년교를 설립하여 한문 혹은 언문으로 정치, 재정, 내외법률, 역사, 지리 및 산술, 이화학대의 등의 서를 역하여 소장의 관인을 가르치고

一. 먼저 인민을 가르침에 국사 및 국어 국문으로 할 것.

一. 외국인을 고용하여 인민을 가르침에 법률, 재정, 정치, 의술, 궁리 및 제 재예 로써 할 것.

一. 활자를 주조하여 종이를 만들고, 인쇄소를 많이 설립하여 서적을 많이 간행할 것.

一. 동서양 제국의 어학을 크게 일으켜 교신을 편하게 할 것.79)


그 밖에도 박영효는 박물관 설치, 대중 연설과 계몽 활동, 신문사 설립, 종교의 자유 허용 등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박영효가 제주도에 머물던 기간 중 1908년 7월 14일에 “박영효가 제주도 인사와 협의하여 설립한 의신학교가 개학 반년 만에 학생수가 백여 명”이라고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기록에서 보듯이,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도착과 더불어 학교를 통한 선교의 의지를 굳게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77) 《제주사 연표 I》, pp.344-354.

78) 강재언 저, 정창렬 역, 《한국의 개화사상》, 서울: 비봉출판사, 1981, p.285에서 재인용.

79) 《한국의 개화사상》, pp.287-288에서 재인용.

다. 노회 학무국의 교육 장려

또한 동시에 남녀 소학교의 설립은 1893년 1월 장로교선교공의회(Council of Miss- 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에서 선교의 정책 가운데 하나로 결정한 일이다. 이때 결정한 선교 정책은 다음과 같다.


一. 선교의 목표를 상류층보다는 노동 계층에 두는 것이 낫다.

一. 부녀자와 청소년 전도를 특수 목표로 한다.

一. 군 소재지에 초등학교를 세워서 그 가운데서 남학생을 교사로 양성하여….

一. 빠른 시일 내에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다.

 

이 원칙을 준수하면서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07년 노회에서 초등 과정과 중등 과정의 ‘교과 과정’을 결정하기로 하였으며, 1908년 노회 때부터 학무부와 학무위원을 둠으로써 정규화될 수 있었다. 학무부는 서울 주재 언더우드(H.G. Underwood) 목사를 국장으로 하고, 각 지방 대리회에 지방위원을 두어 중앙의 통제를 받음으로써 커리큘 럼, 교과서 등 일체의 사무를 관장케 하였다.80) 이러한 학무국에서 정한 커리큘럼은 소학교 (초등학교) 과정과 중등 과정이 있었는데, 소학교 과정의 커리큘럼은 다음 표와 같 았다.


지금까지 위에서 설명한 3가지 원인에 의하여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선교의 첫 출 발을 교육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기풍 목사는 조선 사회의 시대적 요청, 교 육을 통한 입국을 강조하는 박영효와의 만남, 그리고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의 교육 정책 등이 함께 어우러짐으로써 제주도 선교에서 가장 먼저 학교를 세우는 사업부터 착수하였으며, 이는 곧바로 결실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이기풍 목사는 한편으로는 제주시에서 김재원, 홍순흥, 조봉호 등과 함께 교육선교에 힘썼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도인으로 자청한 김홍련씨와 함께 두루 다니면서 전도함으로써 금성리, 조천리 등에서도 예배를 드리는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기풍 목사는 1908년 9월 6일-11일까지 회집한 제2회 노회에 김홍련씨와 함 께 참석하여 이렇게 보고하였다.

 

전도국 위원 김찬성 씨가 보고함이 여좌하니

……

(2) 통신원을 두어 제주 전도 형편을 편지대로 신문에 게재함.

(3) 선교사의 월급은 매삭 20원, 전도인의 월급은 매삭 15원으로 지출한 일.

……

(8) 제주 전도하는 일은 잘 되옵는데, 원입인 아홉 사람이오며 매주일 모이는 사람은 이십여 명이오며.81)

 

80) 독노회록 제2회, 1908년, p.17. 노회록은 이렇게 기재한다.

(1) 학무국 권한: ① 과정 ② 규칙 ③ 청원식 ④ 보고식 ⑤ 교과서 검열 ⑥ 교섭 ⑦ 재정

81) 제2회 독노회록 (1908) pp.6-7.

 


라. 제주도의 사교육기관

그렇다면 제주도에는 공교육 혹은 사교육기관이 없었는가? 조선 왕조는 1895년에 공립학교령을 발령하여 전국의 주요 도시에 학교를 세우게 하였는데, 제주도는 비교적 늦게 학교가 세워졌다.

제주도의 공립학교는 1906년 8월(광무 10년)에 제주 목사로 부임한 윤원구(尹 元求)가 제주목 객사로 사용하던 영주관(瀛洲館)을 개축하여 ‘제주공립보통학교’라 하였다. 하지만 교원이 확보되지 못하여서 개교를 미루다가 1907년 2월에 지홍유(池弘遊)가 부교원으로 발령을 받았으며, 4월 19일자로 윤원구 목사가 학교장을 겸하는 발령을 받음으로써 개교할 수 있었다.

이 시기는 일본이 이미 한국의 각 분야에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1908년 1월에 일본인 교구 룡태랑(橋口龍太郞)을 훈도 겸 교감으로 발령하고, 1909년 6월에는 소송겸길(小松兼吉)이 훈도로 발령을 받음으로써 공립학교의 교육은 전적으로 일본인 교사에 의하여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09년 3월에는 정의군에도 ‘정의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고, 대정군에서는 1908년 10월에 ‘사립한일학교’로 출발하였다가 1911년에 정의공립보통학교에 흡수되었다. 한편 사립학교는 1909년 10월에 천주교의 신부 구마슬이 ‘ 신성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 힘쓴 것이 처

음이었다.82)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제주 목사 윤원구는 박영효의 도움으로 정부의 학교 설립 지원금 8천원 으로 귤림서원의 자리에 중등 교육 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의신학교’(義信學校)를 세워 1907년 연말 혹은 1908년 1월에 개교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 5월에 2년제 공립간이농업학교로 개편 되었는데, 이것이 후일 제주농업고등학교가 된다.83)

이상의 상황을 감안할 때 제주도의 공립교육의 진행은, 특히 일본인 교사 위주로 발령받은 것 등을 볼 때 이 당시 제주도에 귀양 와 있었던 박영효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에 맞춰서 개신교 계열에서도 제주도의 선교를 위해서 학교교육으로 접근하는 방식 을 택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기풍 목사와 제주도 출신으로서 출도(出島)하여 육지에서 선진 문물을 보고 배운 초기 지도자들의 노력과 헌신을 결코 빠뜨릴 수 없다. 이들은 바로 김재원과 조봉호이다.

이 기간의 교회와 학교 설립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주도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친 단체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와 조선 왕조의 근대화 이행이었다. 이 가운데서 로마 가톨릭은 1901년 ‘이재수의 난’ 혹은 ‘신축교안’으로 활동이 위축되었지만, 개신교는 선교 초기부터 학교와 교육으로 제주도민들의 마음을 얻기 시작함으로써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로마 가톨릭과 구별된 입장에서 선교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82) 김봉옥, 《제주통사》, 제주: 제주문화, 1987, p.202.

83) 《제주통사》, p.202. 그렇지만 “제주사연표”에서는 〈대한매일신보〉의 보도를 이용하여 의신학교의 개교는1907년 말 혹은 1908년 초로 말하고 있다. 이 학교의 설립에는 박영효의 중앙정부와의 연결이 크게 작용하였다.

제목
#10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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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부2장 성령대부흥운동과 한국선교의 출발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3 1부1장 1907년 이전의 한국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 들어가는 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