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2016.07
#5 1부3장 제주의 신앙선각자들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14, 2016

제3장

복음을 수용한 제주의 신앙 선각자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이 선교사역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기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는 교회가 설립되었다. 자주적으로복음을 수용한 신앙인들이 황해도 송천에 소래교회를 세웠는데, 창립연대를 살펴보면 새문안교회나 정동교회 보다 더 앞선 일이다. 하지만 한국의 복음사역의 주인공들로 자처하는 선교사들이 선교의 성과를 정리하면서 한국의 자생 교회에 대해 충분히 살피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교회의 역사가 진실인양 통하였다.

제주땅에 복음이 들어오고 수용된 역사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기풍 목사가 선교사로서 제주땅을 밟기 이전에 제주인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생겨났다. 훈련받은 사역자가 제주에 오기 이전에 이들은 새로운 신앙에 경도되었고,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며 예배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애를 썼다.

 


1. 김재원 장로46)



김재원은 1878년 10월 5일(음력), 제주성 밖의 마을 이호리에서 부친 김진철과 모친 김인애 사이에서 첫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이 넉넉해서 아주 귀하게 자란 김재원은 어린시절 거로마을에서 유학했다. 거로마을은 조선시대 유배지의 영향으로 학문이 융성했고 선비들이 많았던 마을이었다.

그런데 그는 질병에 심하게 시달리게 되었다. 늑막염에 걸려 배가 크게 부어올랐다.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차도가 없어서 죽을 날만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었다. 병에서 낫기를 바라던 그에게, 경성에 제중원이라는 약방이 있는데 거기 가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아버지와 함께 인천을 통해 경성의 제중원에 도착하여 선교사 에비슨(O.R. Avison)을 만났다. 고칠 수 있는 시기를 이미 놓쳤다며 그는 치료를 거부했다.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선교사는 “예수를 믿으면 수술을 시도해 보겠다”라고 제안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를 믿겠다고 김재원은 약속했다.

에비슨 선교사가 말년에 집필한 회고록에는 김재원에 관한 이야기가 더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

1903년경 서울 안의 옛 장소(제중원)에서 아직 병원을 운영 중이었을 때, 한 젊은이가 오른쪽 가슴에 있는 농흉(膿胸, empyema)을 치료해 달라며 찾아왔다. 그것은 더러운 냄새가 나며 이미 여러 늑골이 침식된 오래된 만성이었다. 당연히 장기간 치료를 해야 했다. 우측의 모든 늑골을 제거해 흉곽이 함몰되고 가슴 안쪽에 유착돼서야 회복되었는데 약 2년이 걸렸다. 치료를 받는 동안 그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제주로 돌아 간 그는 친구들에게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다. 자신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해 배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 퍼졌고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한 무리의 신도들이 생겼다. 내가 알기로 그때까지 제주도에서는 개신교의 어떤 전도 사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47)

김재원은 제중원에 있는 동안 세례를 받았고, 1903년 말경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는 쪽복음을 건네며 복음을 전하였다. 1904년 김재원이 27세 되는 해에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풍습을 따른다면 신주를 모시고 상식을 올려야 되는데, 김재원은 이를 거부하였다. 가문에 큰 풍파가 일어났고, 제사를 거부하는 김재원을 불효자로 단죄하게 되어 덕 석말이 매로 다스리고자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험악하게 되자 어머니가 결사적으로 아들을 보호하였다. “무당귀신은 내 아들을 못 살렸지만 예수님은 내 아들을 살려 주었지 않느냐? 나는 무엇이라 해 도 아들 살려주신 예수만 믿지 다른 귀신 안 믿는다”라고 강력하게 항변하였다. 위기 를 벗어난 모자는 밭에서나 들에서 열심히 전도하였다.48)

김재원은 전도하면서 자신의 옷을 들어 올려 수술자국을 보여 주었고, 죽다가 살아 난 자신의 일을 간증하면서 전도했다. 김재원의 치병과 회심을 통한 전도활동에서 이 호리공동체가 생겨났다. 자생적 신앙공동체의 활동은 에비슨의 회고록에서 보완된다. 에비슨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주도에 목회자를 파송해 예배를 드릴 수 있게해 줄 것과 동시에 전도도 해야겠다”라는 내용을 보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에비슨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때때로 그(김재원)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 그동안 장로회의 총회(독노회)는 (이기풍)목사와 (이선광)전도 부인을 제주도로 보내 김씨의 종교 활동을 추적하도록 했다. 교회가 세워졌고, 머지않아 여러 교회가 세워졌다.49)

 
제주도 최초 개신교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김재원에 의해 이호리에서 출발하였다. 이 공동체의 요청에 의해 한국 장로교회는 최초로 안수받은 7명 목사 가운데 한 사람, 이기풍 목사를 해외선교사 자격으로 제주도에 파송하였다.

 

46) 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2》, 1982, pp.240-244. 박정환, “제주도 개신교 자생적 신앙공동체의 생성과 성장에 관한 연구”, 1904-1930, 장로회신학대학교 미간행 박사학위 논문, 2013.

47) O.R. Avison, Memories of Life in Korea, p.234. 박형우 편역, 《근대 한국 42년 1893-1935(下)》, 서울: 청년의사, 2010, p.309. 오래된 일이어서, 에비슨의 기억이 정확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김재원이 상경하여 치료를 받은 일은 1901년에서 1902년 즈음이라고 보인다.

48) 어머니는 이름이 없었는데, 후일 세례를 받고 교회생활하면서부터 새로 지어진 이름이 김인애(金仁愛)였 다.

49) 《근대 한국 42년 1893~1935(下)》, p.310.

 

 
2. 조봉호

 



조봉호는 1884년 5월 12일 구우면 귀덕리에서 아버지 조만형과 어머니 김진실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활달하고 지혜로웠으며 동기들 간에 신의가 두터웠고 곧은 성품을 지녔다. 그는 가족들과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 으며, 부농의 자제로서 넉넉했던 집안 형편 덕에 일찍부터 한학을 익힐 수 있었다. 계속되는 민란으로 인한 제주의 아픔을 보면서, 그는 서울로 나가 유학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가족들과 상의한 후 1902년 상경한 그가 배우게 된 곳은 예수교중학교로 후일 경신 학교로 이름을 바꾸는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수학기간 동안 그는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로서만이 아닌 자신이 믿어야 할 신앙임을 받아들이고 곧 귀의하였다. 이러한 신앙심은 그가 부친의 사망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였을 때에도 이어졌다.

 

조봉호는 1904년 제주도로 내려와 남아 있는 모친과 동생 봉휴, 유승을 돌보았으며 1906년에는 조성벽과 혼인하였다.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경험했던 개신교에 대해 자신의 가족들을 포함한 제주 사람들과 나누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금성리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들 역시 이기풍 선교사가 도착한 이후, 신앙과 더불어 교육을 통한 민중계몽에 앞장서는 일꾼들이 된다.

 


3. 부상규 장로


한동리 출신인 부상규(夫尙奎, 1887-1931)는 목포와 부산 그리고 일본 후쿠오카에서 현대의술을 익히고 조수로 일하면서 1923년 의생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는 부산에서 1910년부터 10년간, 그리고 서귀포에서 1920년부터 병원의 일을 돕다가 1923년 세화에서 성제의원을 개업하였다.50)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부상규가 신자가 된 경로를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한동리에 살던 부상규가 목포 의사에게서 복음을 듣고 믿은 후, 부산에 가서 선교사 왕길지에게 학습을 받았고, 산지포 목사 이기풍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다.”51)

이 신앙의 여정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분명한 정보를 제공하는 순서를 따라, 연대를 역순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먼저,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그에게 세례 받았다는 부분은 매우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 기풍은 《사기》의 자료 수집의 책임을 맡고서 자신의 기록이나 기억을 분명하게 반영했다고 본다.

삼도리에 사역의 터전을 마련하고 성내교회가 출발하기 이전에, 이기풍은 산지포에서 전도하며 주민들을 접촉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상규는 서둘러 찾아가 이기풍을 만났고 세례를 받았다. 이 만남에서 선교사는 부상규의 신앙경력을 듣고 점검을 했을 것이다.

부상규를 학습인으로 세운 왕길지(王吉志)는 엥겔 선교사(George O. Engel, 1864-1939) 이다. 1911년까지 기록에는 이름이 왕길(王吉)로 되어 있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바젤 선교부에서 신학교육을 받았고, 미술을 공부하였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에딘 버러에서 수학한 후 인도에서 교육선교사로 사역하기도 하였다. 호주로 이민하여 교사로 일하다가,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1900년부터 1906년까지 부산에서 사역하였다. 부인이 사망하면서 실의에 빠져 일시 호주에서 지냈다. 일본 선교사인 브라운과 연결되면서 재혼하였고, 다시 선교지인 조선에 부임하였다.

왕길지는 1902년부터 평양신학교 강사로 신학교육에 참여하였다. 1906년부터는 매년 3개월씩 평양에 주재하였다. 1919년에는 평양으로 완전히 옮겨 신학교육에 전념 하였다. 교육자로서 그는 매우 엄격한 편이었다. 1913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제2대 총회장, 1917년에는 경남노회 창립노회장으로 섬기는 기회도 가졌다.52)

지금까지 드러난 자료를 종합해 볼 때, 부상규가 부산에서 왕길지를 만난 것은 1906년 혹은 1907년 정도로 추정된다. 그때 부상규의 나이는 스물 정도였다.

그가 목포에서 만났던, 그에게 처음 복음의 길을 알려준 의사는 누구인가? 《제주 선교 70년사》에는, “구좌면 한동리 출신인 부상규가 목포에 주재하고 있는 의료선 교사 포의사에게 복음을 받았고, 부산진 왕길지 목사에게 학습을 받았으며, 1818 년 가을 이기풍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이곳 초대 신자가 되었다”라고 정리하였다. 1818년은 1908년을 잘못 인쇄한 것으로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목포 의사를 布의사로 기재한 것은 특별한 뜻을 담고 있는가?
목포선교부에서 사역한 의료선교사는 오웬(Owen, Clement Carrington, 오기원, 1867-1909)과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 1873-1918)가 있었다. 이들은 1904년 12 월 25일에 임무를 교대하였다.53) 따라서, 목포의 의사를 포사이드로 이해한다면, 1905 년에 부상규가 포사이드를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포사이드는 미국인으로서 쿠바에서 다년간 의료활동을 하였고, 남장로회 의료선교사로 1904년에 내한하여 전주에서 사역하였다. 1907년부터 목포에서 일하다가 1912년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한글 이름을 보위렴(保衛廉)으로 정했지만 흔히 보의사 혹은 포의사로도 알려졌다.

그는 1905년 전주에서 밤중에 치료에 나섰다가 습격을 받고 귀가 잘리는 변을 당하기도 하였다. 무뢰배의 소행인지, 항일 의병운동이 오해로 공격한 것인지 그 일을 정확 하게 알 수는 없다. 1909년에는 광주에 있던 동료 선교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이동하던 중, 한센병 환자를 만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광주 나병원을 세웠으며, 이후의 나병 퇴치운동(구라사업)과 애양원 혹은 소록도의 나병원의 선구자가 되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통하였다는 기록은 그의 품성과 헌신을 잘 말해준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모여 있으면 소리 높여 설교하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소개하였다. 이러한 포사이드 를, 부상규가 목포에 있던 시절 만났다면, 친밀한 대화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복음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호하게 보이는 목포 의사를 포의사로 고쳐 놓은 것은, 《사기》와는 다른 더 좋은 정보를 통하여 확인하여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지나친 해석 혹은 그릇된 해독인가? 현재는 존재조차 확인할 수 없는 1925년에 정리된 《제주기독교사》를 참고한 서술인가?54) 현재로서 단언하기는 어렵다.

스무 살 전후의 젊은 부상규는 목포와 부산에서 복음을 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오자마자, 그를 찾아 서둘러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면, 선교사로 파송받아 장도에 오르는 이기풍이, 이미 왕길지를 통하여 부상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능동적으로 연락을 취했을 개연성도 있다.

여하튼, 제주에는 이미 신앙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있어서, 훈련받은 사역자를 기 다리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50) 《제주도의사회 60년사 1945-2005》, 제주도의사회 2006, p.137.

51) 《사기, 하권》, p.311.

52) 《부산 복음의 증인들》, 부산노회 2010, p.205ff.

53) 《기독교대백과사전》 제6권, p.317.

54) 《제주기독교사》(1925)는 존재가 간접적으로만 확인되는 제주교회사의 첫 작품이다. 《조선예수교장로 회 사기》를 준비하던 시기에 작성되었으므로 공통의 자료를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성의 경위나 편찬 자, 그내용은 물론 출간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978년에 출간된 《제주선교 70년사》에 그 내용의 일부가 인용되어 남아 있을 뿐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는 1916년에 편찬의 계획이 세워졌고, 오랜 시일이 걸려1928년에 《사기, 상권》이 간행되었다. 1912년 총회가 창립되기 이전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사기, 하권》은 총회가 출범한 이후 1923년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당시에는 출판되지 못하였고, 1968년에야 연세대출판부를 통해서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제목
#10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9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2.이기풍목사의 활동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8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1.제주선교와 의료봉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7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3.성내교회의 교육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6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1.이기풍목사 입도와 첫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5 1부3장 제주의 신앙선각자들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4 1부2장 성령대부흥운동과 한국선교의 출발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3 1부1장 1907년 이전의 한국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 들어가는 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