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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24, 2016

5. 피난 기독교인들과 제주 교회

피난 기독교인들은 제주도에 입도하여 세 가지 유형으로 신앙을 유지하였다. 첫째는 기존 제주도 교회에 합류하는 유형, 둘째는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유형, 셋째는 기존 교회에 협력하는 유형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피난 기독교인들의 열성적인 신앙은 곧바로 제주도 교회들에 영향을 주어 자체적으로 예배당을 신축하거나 증축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가. 피난 기독교인들이 예배당 건축에 협력한 교회
피난 기독교인들의 협력으로 크게 도움을 얻은 교회는 5~6교회에 이른다. 피난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출석함으로써 먼저는 예배 인원의 증가로 교회 분위기가 조성되고, 그 다음으로는 헌신적인 헌금으로 교회의 증축 혹은 개축에 도움을 주었으며, 마지막으로 지역민들에게도 교회의 위상을 높여 주는 역할을 하였다.


1) 표선교회
표선교회는 1948년에 설립되어 조그마한 예배 처소에서 회집할 뿐, 상주 목회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직 면에서도 아직 든든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1951년 1월에 200여 명의 피난 기독교인들이 한승직 목사와 함께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함으로써 교회의 일시적인 목회자가 되었다. 한승직 목사는 곧바로 피난 교우들의 헌금으로 대지 340평과 30평 규모의 기와집을 매입하여 예배처소로 개조함으로써 예배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였다.


2) 강정교회
강정교회는 법환교회에 참석하던 김문현 집사 외 10여 명의 성도들이 교통의 불편등으로 인하여 김문현 집사 집에서 1948년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함으로 설립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목회자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배에 어려움을 겪다가 1951년 1월에 피난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동년 5월에 예배당을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3) 협재교회
협재교회는 4·3사건이 일어난 1948년에 예배당이 소각되는 어려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조차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개인 주택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 말에 피난 성도들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노윤경 전도사, 김인옥 전도사, 장병숙 장로 등이 중심이 되어 성전 재건에 힘을 기울였으며, 1953년에 170평 대지에 30평 예배당을 신축할 수 있었다.


4) 조수교회
조수교회는 1950년에 기와 24평의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었으나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완공하지 못한 채 임시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모슬포에 피난 온 이복준 성도가 조수교회의 상황을 전해 듣고 25만 원을 헌금함으로써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5) 삼양교회
삼양교회는 1942년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 30평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함으로써 든든하게 성장해 갔으나 1948년 4·3사건으로 예배당이 전소됨으로써 상당히 어려운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1950년 후반부터 피난 성도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예배당 신축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1951년 석조기와 30평 예배당을 신축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임홍택 전도사가 크게 노력하였다.


나. 피난 기독교인들이 교회 부흥에 협력한 교회
피난 성도들이 교회에 참석함으로써 교세가 확장되고 동리에서 교회의 위상이 높아진교회들도 있다.

1) 귀덕교회
귀덕교회는 본래 한림교회의 기도처였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문을생 여집사가 있었다.

​문 집사는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피난민들이 몰려들자 그들에게 거처와 식량을 마련해 주고,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예배에 초청하여 함께 드리곤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많은 피난 성도들이 찾아왔다. 이 가운데 최용찬 피택장로(영등포공고 교장), 안세민 집사(목사로 사역함), 김광권 집사, 김익순(서울 영락교회 장로), 홍창의(서울 의대교수), 홍승규 등이 합류하여 8명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일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제주 나신동 교회 대부흥
작년 5월 9일 수요일 밤에 당시 제주에 피난 중인 최용찬 집사(피택장로)와 김광권 집사, 안세민 집사의 협력 하에 최용찬 집사의 인도로 처음 8명이 모여 수요 주일 밤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그곳 문을생 여집사의 숨은 기도와 최 집사의 열렬한 전도결과 지금 100여 명이 모여 분립하여…….41)


2) 성읍교회
성읍교회는 세워진 지 오래되었으나 지역적 특성으로 크게 부흥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 후반부터 서울 동숭교회의 김찬명 목사와 박승은 목사가 피난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예배 참석자가 15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교회는 지역민들에게 큰 위상을 나타냄으로써 교회를 거부하던 많은 주민들이 개종하기도 하였다.


6. 피난 기독교인들이 세운 교회(장로교회)


피난민들은 제1차로 1950년 7월 16일로부터 시작하여 1951년 1월에는 대거 제주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기존 신앙인들은 신앙의 열정이 솟아나고,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기존 교회에 참석하기보다는 나름대로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피난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가 12처이다.
이들 12처 교회는 지역적으로 본다면 제주시 지역에 4교회(도두, 한라, 영락, 화북), 조천 지역에 2교회(신촌, 함덕), 서귀포 지역에 4교회(효돈, 토평, 보목, 시온), 인근 도서에 2교회(추자도, 비양도) 등이다.


가. 제주 지역​


1) 도두교회
도두교회는 1951년 3월에 피난 성도 30여 명이 마을의 공회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제주시 피난민 교회의 이환수 목사가 노충섭 목사를 파송하고, 이어서 원조금의 십일조를 드려 기념예배당을 짓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1951년 말에 이르러 석조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다.


2) 한라교회
한라교회의 시작은 이렇다. 일제는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쟁 수행에 전념하느라 각 지방의 형무소 운영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하여 형무소의 자활대책으로 재소자들을 해당 지역의 건축공사에 참여시켜서 노임을 받게 하였다. 성내(서부)교회도 이러한 정책에 따라 목포 형무소의 재소자들을 받아들여, 1941년 현 동문시장 제주신협 터 위에 2층 석조 건물을 짓게 되었다. 건물이 완공되자 낮예배는 동부 지역 새 예배당에서, 그리고 주일저녁과 수요예배는 서부 지역 구 예배당에서 드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피난 성도들이 몰려들고 비가 올 때에는 한천이 범람하여 서부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어렵게 되어 동부 지역에 사는 교인들이 고경자 여전도사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그러다가 피난 성도들이 1951년 4월 부활주일에 차광석 목사의 인도로 설립예배를 드렸으며, 교회의 명칭을 한라교회라고 하였다.


3) 제주영락교회
제주시 피난민 촌에 거주하던 성도들 가운데는 이환수 목사의 피난민 교회에 출석하기 보다는 별도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도 있었다. 이들은 1951년 12월 31일에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고, 1952년 1월 6일부터 평양옥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김린모 장로가 설교했고 참석 인원은 34명이었다. 이들은 곧바로 우상필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교회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교인이 증가하며 성장하게 되자, 제주시 일도리 1098번지 대지 219평을 구입하고,1953년 7월에 성전 기공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54년 2월에 31.5평 규모의 예배당을 준공하였고, 이후 28.5평을 증축하여 1954년 2월에는 60평 규모의 예배당을 준공하게 되었다. 1955년 10월 18일에 헌당예배를 드렸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예배당 건물이었다. 1958년에는 동부교회의 신도 80여 명이 가세하였다. 장신계와 조신계의 대립으로 동부교회 성도들이 영락교회로 합류하였는데, 이후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제주영락교회 야외예배 기념(1952. 5. 11)


​▲ 제주영락교회에서 드린 부활절 연합예배(1954. 4. 18)

4) 화북교회
1951년 4월 10일경 화북지방에 들어온 피난민들 가운데 15명의 성도들이 4월 21일에 장 장로(성명 미상)의 인도로 화북국민학교 운동장 구석에 군용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대다수 신의주 출신이었다. 그러다가 1952년 5월에 3칸 규모의 초가집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나. 조천 지역


1) 신촌교회
신촌 지역에는 1926년경부터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교회로 자리 잡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951년 피난 성도들의 유입과 함께 김의도 목사가 중심이 되어 마을 공회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후 교인들이 점점 증가함에 따라 신촌리2184번지 가옥을 매수하여 교회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피난 성도들이 떠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교회는 발전하였으나, 한때 이단의 유입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2) 함덕교회
함덕지방은 1925년경부터 전도가 시작되었으나 지역민들의 박해로 교회로 자리 잡지는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 피난 성도들이 공회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지만 치안이 매우 불안하여 크게 부흥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951년 1월 이후 김윤근 목사가 중심이 되어 전재선 목사를 청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한 것이 교회 부흥의 발단이 되었다. 이때 많은 학생들이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이들 학생들은 피난 성도들이 떠난 뒤에도 교회를 지켰는데, 1954년 7월 고성순 가정이 하도에서 이주해 옴으로써 오늘날의 기반을 다졌다.


다. 서귀포 지역
서귀포 바닷가 모래사장에는 1951년 1월 7일 오후 1시경 부산을 떠난 미 해군 수송함이 먼저 목회자 가정을 하선시켰으며, 이어서 총 2,500여 명의 피난 기독교인들이 도착하였다. 이들은 30가정씩 여러 팀으로 나누어서 배정된 부락으로 갔다. 이들 피난민들은 보목, 효돈, 서귀포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피난 시절을 보냈다. 그때 4개의 교회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서귀포교회는 이들 피난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크게 부흥할 수 있었다.


1) 효돈교회
효돈 지역에서는 1951년 1월 9일에 피난 성도들이 첫 예배를 드렸다. 먼저 도착한 대다수 목회자 가족들은 신효 향사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일반 성도들은 하효 향사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한 달 정도 나누어서 예배를 드리다가 2월 25일 효돈국민학교 교실을 빌려 함께 예배를 드렸으며, 최화정 목사,42) 서금찬 목사, 김희선 목사 등 7명의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였고, 김광수 전도사는 성경구락부를 맡았다. 성경구락부가 영어를 가르쳐 주고 또한 학용품과 간식(과자)을 나눠 주자 동리 아동들이 모여들기 시작함으로써 유년주일학교가 부흥하기 시작하였다.43)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7월 29일에 성전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서귀면 하효리 148번지 153평을 구입하여 헌금과 모금을 합쳐서 24평의 예배당을 건축하고, 1953년 1월 27일에 제주노회(제24회)에 가입하였다.
그후 피난 성도들이 떠남에 따라 교회가 흔들릴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알고 개종한 후 1959년에 임직을 받은 김태용 장로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교회가 지속될 수 있었다.44) 이 부분을 《기독공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김 씨는 동네에서 유력한 이요, 그의 첫째 아들은 군인으로 일선에 나가서 용전분투하며 틈틈이 부모의 입신을 위해 간곡한 전도 편지와 아울러 기도를 드려 왔다. 얼마 후 아들의 전사 소식을 받게 된 김 씨 가정은 불신자로부터 조소와 박해를 받았으나, 아들의 간곡한 전도에 그는 크게 결심하고 집안에 있던 귀신을 모두 목사를 청하여 불살라 버린 후, 주초를 끊기 위해 14일간 두문불출한 후 지금엔 완전히 주초를 끊고 교회 봉사와 전도에,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한 것처럼 놀라운 변화를 일으켜 전 동리에 자극을 주고 있다. 김 씨 부부의 입신으로 전도의 빛이 높이 들리어 삽시간에 삼사십 명 주민이 함께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45)


담임목사인 김관규 목사는 《기독공보》에 “힘을 다하라”는 설교문을 게재하기도 하였으나46) 전쟁이 끝난 후 서울 마포교회로 이전하였다.


2) 보목교회
서귀포 지역에 피난 온 성도들 가운데 250여 명이 1951년 1월 28일 마을 동산에서 첫 예배를 드린 후 교회 설립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3월 7일에 박형순 목사를 청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한 후 성전건축헌금을 하였으며, 그 결과 대지 50평과 초가 1동을 매입할 수 있었다. 이들은 손수 목재를 준비하고 돌을 운반하여 8월에 입당예배를 드렸다. 1952년 6월에 종각을 완성하고, 1953년 4월에 제주노회에 가입하였다. 보목교회는 장석인 목사, 윤상현 목사, 나기환 목사 등이 사역하였으며, 1955년에 예배당을 석조로 개축하였다.

3) 토평교회
1951년 1월 14일 피난민들이 김영관 씨 사가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토평교회의 첫 출발이다. 위두찬 목사의 사회와 김진수 목사의 설교로 이날 예배에는 채필근 목사, 이재호 목사, 이태일 목사, 김재호 목사, 김성칠 목사, 황언운 목사, 임택진 전도사, 신현균 전도사, 김상호 전도사, 홍종각 장로, 장광은 권사 등 피난 성도들과 부태일, 김병화, 오사진 등 3인의 지역 교인들과 어린아이들이 참여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피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서귀포 시내로 이주함에 따라 1951년 7월부터 임택진 전도사가 오사진, 김철후, 오문찬, 강정출 권사의 집을 기도처로 삼아 순회 예배를 인도함으로써 교회를 유지하였다.


4) 시온교회
1953년 10월에 대다수의 피난민들이 귀환하였지만 일부 피난민들은 제주도에 그대로 잔류하였다. 1955년 7월 20일 백원정 장로를 단장으로 하는 가나안 새마을 정착단이 구성되어 약 150세대가 사단법인 제주난민 귀농정착 개척단을 세우고 제주도의 지원을 받아 법호촌에 정착하였다.
이들 가운데 기독교인 약 50여 명이 상효리 1284번지 구 육군훈련소 내 군인공회당 건물 1동을 인수받아 1956년 4월 30일에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시온교회의 출발이다. 시온교회는 1966년 5월 상효동 129번지 220평 대지에 22평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그 뒤로 크게 성장하였다.


라. 도서 지역
추자도와 비양도는 제주 인근 섬으로서 생활 형편이 좋지 않은 곳이었으나 피난 성도들이 그곳에서 생명을 구한 데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교회를 개척하였다.


1) 추광교회
추자도는 전라남도에 속하였다가 해방 후 제주도에 편입되었으며 5개 리에 인구 5,000명을 가진 섬으로, 그곳에는 이미 이기풍 목사 시절부터 세워진 신양교회가 있었다. 1950년 9월 피난민 대열에 낀 이광옥 집사가 생명을 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부담으로 김봉룡 목사를 파송하였다.
김봉룡 목사는 1951년 9월 3일부터 국민학교 건물을 빌려서 김만태, 서정일, 박순일, 김효식, 박성철, 이복재 등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으며, 10월 1일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52년에는 마을 유지들의 협력과 선교사, 그리고 교계의 협력으로 어업협동조합 건물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개조한 후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니 이 교회가 추광교회이다. 추광교회는 추자도 파견 경찰관 김병현 씨의 개종으로 크게 부흥하였다. 이 부분을 《기독공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추자도에서 추석예배
방탕한 경찰관이 개심코 신학에
……상추자도 교회는 순 원주민 250여 명이고 지난 추석 명절에는 전 교인이 해변에서 기념예배를 드렸다고 한다.……김 씨는 추자도의 경찰관으로 방탕한 생활을하였고 교회 설립에도 큰 방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고 술 담배를 끊고 교회에 나오자 온 동리는 그로 말미암아 복음의 위력을 보고 동장도 구장도 모두 교회에나왔다.47)


2) 비양도교회
비양도교회는 1950년 4월 제주도로 피난 온 하시현 전도사가 건너가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하였다. 50여 호에 300여 주민은 대다수 불교 혹은 불신자로서 기독교 신자는 4명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장병욱 씨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자신의 30여 평 주택을 예배처소로 제공함으로써 교회로 발전하였다.
하시현 전도사는 장병욱 씨의 장남으로부터, 그리고 제주 여러 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예배당을 마련하여 1954년에는 장년 34명, 유년주일학교 6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마. 타 교단 교회들(감리교회, 성결교회)
상해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였던 도인권 목사는 1951년 1월에 제주도로 피난온 후 곧바로 제주읍교회라는 감리교회를 세웠으며, 자신의 경력을 발판으로 제주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일제가 세웠던 신사 터를 불하받아 성전을 건축하고 제주중앙교회라고 명명하였다. 그 밖에도 감리교회는 1951년 조천리, 월정리, 월평리에 교회를 세웠으며, 1952년에는 도두교회와 광양교회를 세움으로써 제주도에 모두 6개 감리교회가 세워졌다.

​또한 성결교 교인으로서 1951년 1월에 제주도에 피난 온 성결교회 교인들은 처음에는 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건입동에 있는 노동의원 자리에 천막을 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1951년 9월부터 별도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교회로 발전한 것이 오늘날의 제주 제일교회가 되었다.
제일교회는 1957년 9월 건입동에 대지 57평, 건평 40평의 예배당을 개축하여 현재의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4·3사건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민 기독교인의 유입은 제주도 교회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순경 목사는 ‘피난 신도 위문기’라는 글을 통하여 이렇게 말한다.


5다 3무의 섬이라드니……지금은 피난민들이 전통을 깨뜨리고 예배당에 둔 성경과 찬송이 없어진다. 이곳의 생활은 비교적 평온하다.……한때는 피난 목사 200을 계산하였으니 이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섭리이시다.48)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제주도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는데 이는 통계적으로 알수 있다. 즉 장로교에서는 1940년대에 7개 교회, 1951년에 25개 교회가 세워지고, 감리교회가 6개 교회, 성결교회가 1개 교회를 세웠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주도는 전쟁으로 인하여 피난 온 한국인들과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이북에서 피난 온 기독교도들에게는 도피성이었으나, 동시에 제주도 교회와 교인들에게는 교회 부흥과 신앙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었다. 이로써 제주도 교회는 그동안 이기풍 목사로부터 비축된 신앙의 열정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경제적 성장과 함께 부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7. 주일학교연합회 창립
제주노회가 원래 소속되어 있었던 전남노회는 윌슨(R.M. Wilson) 의사와 스와인하트(M.L. Swinehart) 선교사 그리고 남궁혁 목사 등이 주일학교운동을 크게 전개하였고, 1922년 주일학교연합회에서도 크게 활동하였으며, 남궁혁은 1925년에 세계주일학교 총회에도 한국 대표로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제주노회가 1930년에 분립됨으로써 주일학교운동은 제주도에 전달되지 못하고 말았다.
제주노회는 1948년 제19회 노회에서 주일학교연합회를 노회 내에 조직하였으나 4·3사건으로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한국전쟁과 함께 피난 성도들이 대거 유입됨으로써 제주노회에서도 주일학교운동에 대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며, 1953년에 주일학교연합회 창립 계획의 뜻이 이루어졌다.
제주노회 주일학교연합회의 산파역은 고택구 목사가 맡았다. 1953년 1월 28일 한림교회에서 조직위원회 위원장 고택구 목사의 사회로 창립 총회를 개최하여 규약과조직을 통과시켰다. 이 부분을 《기독공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참여교회〉(46교회)
서부, 동부, 영락, 행원, 김녕, 세화, 성산, 신산, 성읍, 성산, 표선, 남원, 위미, 효돈, 토평, 보목, 서귀포, 서귀포난민, 서호, 법환, 강정, 중문, 예리, 사계, 화순, 대정, 인성, 하모, 무릉, 고산, 용수, 조수, 두모, 판포, 월평, 협재, 한림, 청수, 비양도, 금성, 애월, 하귀, 외도, 도두, 추자신양, 추자대영
〈임원 구성〉
회장: 고택구, 부회장: 고원찬, 서기: 이경수, 부서기: 한의룡,
회계: 김인숙, 부회계: 김춘국, 총무: 김봉서
〈부서장〉
종교부장: 한의룡, 음악부장: 박윤삼, 소년부장: 홍대욱, 지육부장: 이경수, 체육부장: 정영기, 봉사부장: 정찬이
고문: 노회장 강문호 목사, 교육부장: 김봉서 목사49)


이 회의에서 제주기독청년연합회에서 발간하다가 휴간 중인 《주일공과연구》를 일학《교주연구》로 이름을 바꾸어 출간함으로써 노회 내 교회들의 주일학교 기관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어서 제주 각 지역별로 주일학교 교사 강습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제주읍, 한림, 모슬포, 서귀포에서 강습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제주 주일학교연합회의 발족 이후 기관지 발행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제반 업무는 고택구 목사가 주관하고 여기에 김봉서 목사가 협력하였다. 이들은 추수감사절, 부활절, 성탄절 등 절기예배에 사용할 지침서를 마련하여 배포함으로써 제주도 각 교회의 주일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 제주노회 아동부 교사대회(1977. 7.11)


41) 《기독공보》, 1952년 10월 15일자.
42) 최화정 목사는 황해도 사리원교회 목사로 재직 중 북한의 어용 기독교도연맹에 가입을 거부하였다. 김광수 목사는 연맹 가입을 반대하였으나, 살아서 피난할 수 있었던 3명의 목회자는, 김광수 목사에 의하면, 김윤찬, 김희선, 그리고 최화정 목사였다. 최화정 목사는 전쟁 이후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잠시 사역하였다.
43) 이렇게 몰려든 아이들을 가르쳤던 노재남 전도사는 목사 임직을 받고 1953년까지 효돈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였다.
44) 김태용 장로는 김희선 목사(김광수 목사의 부친)가 세들어서 살던 집의 주인이었다. 따라서 김태용 장로의 개종은 효돈 지역에 피난 왔던 기독교인들의 첫 번째 열매라고 말할 수 있다. 김태용 장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두 번째 부인에게 재산을 양여하여 분가시켰다.
45) 《기독공보》, 1952년 11월 17일자.
46) 《기독공보》, 1952년 9월 1일, 9월 8일자.
47) 《기독공보》, 1952년 10월 20일자.
48) 《기독공보》, 1952년 1월 21일자.
49) 《기독공보》, 1953년 3월 16일자.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