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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24, 2016

 

제4장

시련과 좌절


1.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제주도의 공산 세력들은 어떻게 하여 조직되고 세력을 확대하였는가? 이 주제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거론할 수 있는 명제들은 있다. 첫째는,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도 출향민들이 공산주의를 배워서 고향에 돌아와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둘째로, 육지와는 달리 비교적 부유한 지식인층이 대거 공산주의 활동의 주역이 되었다는 점이다. 지주와 소작인이라는 계급이 뚜렷이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경향이 어느 지역보다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국가의 독립이라는 염원이 공산주의에 뿌리를 둔 무장 독립을 정당화하면서 사회의 빈민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공산 세력들이 제주도에서도 일찍이 1922년부터 활동하고 있음을 제주사 연표는 밝히고 있다.43)


1922년 11월 김명식이 《신생활》 잡지 ‘러시아 혁명 5주년 특집호’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찬양하고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는 글을 게재, 유죄 선고를 받아 옥고를 치름.
우리나라 첫 번째 사회주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27년 4월 9일 조대수(趙大秀) 등이 주도하는 무정부주의 항일단체 ‘우리계(宇利契)’ 조직.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당원 송종현(신촌), 한상호(일도), 김택련(일도), 강창보(용담)와 고려공산청년회 김정로(이도), 박봉식(이도), 윤석원(이도) 등 체포함.

이 시기에 제주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던 선교사들도 제주도에 공산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들이 존재하게 된 이유에 대한 개인적인 분석을 하기 시작하였다. 스와인하트(Martin L. Swinehart: 서로득) 선교사는 1930년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인구는 20,000,000명이고 그 가운데 80%는 농부들이다.……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지주는 3,869,459명인데 그 가운데 일본인이 65,922명이고 1,465명은기타 외국인이다.……그러나 1,800,000명 이상의 한국인 지주는 1/4에이커(300여 평)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들도 농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인들은 평균 2에이커(2,500평)를 소유하고 있다. 7,000,000명은 임대하는 소작인이다. 이와 같은 경제적 상황으로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도시로, 일본으로, 중국으로 혹은 시베리아로 이주한다.……이렇게 하여 복음사역도 동일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안식일을 깨뜨리고 물질적인 필요를 추구하는 일이 많아졌으며, 볼셰비키주의, 무신론 선전단,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반 선교사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44)


서서평 선교사도 1932년에 제주도에 다녀와서 제주도 전역에 공산사상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음을 지적하는데, 그 원인은 일본 거주 제주도 출향민의 귀향, 무지, 가난, 미신 등으로 열거하였다.

이 섬에서의 공산주의는 젊은이들이 일본에서 볼셰비키주의를 깊이 마시고 돌아옴으로써 강력하게 자리하고서 교회를 주변으로 그 지도력을 키우려 한다. 가장 유명한 악명 높은 공산주의 지도자가 이 섬에 산다.……무엇 때문에 그렇게 걱정스러운가? 끔찍스러운 가난, 엄청난 무지, 정상적인 지도력의 결핍, 철저한 소외, 이 섬의 열광적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공격적인 반대,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여인들의 미신과 악령에 대한 두려움 등이다.45)


일제 말엽에 이르러 신사참배 강요, 그리고 만주 지역에서 작전 중이던 일본군이 전쟁에 패퇴하여 제주도를 군사기지화하자, 이에 맞서 연합군의 폭격이 감행되면서 제주도 교회는 더욱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내부적으로 스며들었던 공산사상과 동조자들이 해방 이후 고개를 들고 나타남으로써 친일 반일, 반공 용공이라는 사상 대립의 결과, 그 끔찍한 1948년 4·3사건이라는 비극을 자아내게 되었다. 이 시기에 기독교회도 순교자를 비롯한 피해를 입었으며, 아직까지도 그 피해가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신사참배 강요

일제는 1925년 남산에 일본 신사(神社) 본궁을 세운 이래로 1933년까지 한국 전역에 읍면 단위로 신사를 세워서 한국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하였다. 1937년까지 감리교, 가톨릭 등 한국에서 선교하던 교단들이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마지막으로 남았던 조선예수교장로교회도 1938년 봄 정기노회에서 차례대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기 시작하였다. 제주노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당시 제주도의 신사참배 상황을 《제주선교 70년사》는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 교회인들 이와 같은 신사참배의 강요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제주시를 비롯하여 서귀포, 한림, 모슬포, 성산포 기타 읍면 소재지마다 신사를 세워 놓고 관공리, 유지,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국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신사 광장에 모여 일본인 神主의 집례로 참배케 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 그리고 어린교회학교 아동들까지 신사참배의 강요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며 신앙적 양심에 큰 고통을 당하였다.46)


이상과 같은 분위기에서 제주노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된다. 1938년 4월 26~28일 성내교회에서 회집한 제9회 정기노회는 이렇게 진행한다. 3명의 목사와 9명의 장로가 총대가 되어 회의를 진행하여 이도종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는 명분은 ‘국민의례’이므로 국민으로서 누구나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의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하나님과 국가라는 두 명제 가운데서 결국 국가를 앞세우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 논리는 교회가 개발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일제)가 내세운 것이었으므로 국민으로서 어쩔 수 없이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한다.


종래 신사참배는 허배 우상으로 인식하고 굳게 항의하여 오던 바, 금번 시대에 처하여 당국으로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국민의 의무라고 누누이 훈시함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우리가 종교를 만들어서 스스로 고민을 당할 필요가 없이 국법에 순종하자는 문제가 결의된 후에, 경찰서 고등계 주임이 승석하여 신사참배는 국민의 의무요 종교의식이 아니라는 설명을 직접 듣고 회원 일동은 의문을 일소하다.47)


신사참배를 결의한 다음에 이어서 몇 가지 결의가 있었다.


교육령 실시와 조선인 지원병 축하식에 우리 제주노회로서도 남(차랑) 총독에게 축하의 전보를 치기로 결의하다. 신사참배키로 결의한 통지를 총회장에게 보내기로 하다.48)

당시 한국 내 여러 노회에서 보여 주었듯이, 제주노회도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회의를 정회하고 임석한 고등계 형사의 안내로 제주 시내에 있는 신사에 가서 참배한 후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와서 속회하였을 것으로 본다. 속회한 후 몇 가지 결의가 이어졌다. 총회장이 보낸 정신보국주간의 실시법에 관한 공문을 낭독하고, 박창욱 목사의 유고 불참 서한을 듣고 기도한 후 위로의 편지를 보내기로 하였다.
제주노회는 신사참배 가결로 인하여, 그동안 줄기차게 후원해 주었던 미국 남장로교 광주선교부 소속 탈마지 목사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탈마지 목사가 제주성경학원장 직을 사임함으로써 정순모 목사가 후임 학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탈마지 목사와의 단절은 그동안 제주노회가 재정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부분에서 손실이었으며, 부인조력회에서 크게 협력하였던 탈마지 목사의 부인(타애리사)의 협력도 동시에 끊긴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한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가결되었다. 해방 이후 혼란스럽던 시절 총회는 1946년 6월 12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남부총회(제32회)를 소집하고, “제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라고 의결하였다. 그 이후에도 제27회 총회의 결의를 취소하거나 회개하는 결의를 총회 차원에서 두 차례나 더 반복하였다. 이는 교단분열로 귀결되는 사안이었고, 동시에 회개의 진정성에 대한 의혹을 말끔히 씻지 못하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이에 대한 논의나 추궁이 계속되었다. 2008년 9월 24일에 모인 한국장로회 4개 교단 제93회 ‘제주총회’ 기간 중 열린 연합예배에서 신사참배의 과오를 회개하며 함께 기도하였다. 2009년 4월 21일 기장 제주노회에서는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2013년 10월 30일에 제주영락교회에서 모인 제139회 제주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을 회개하는 문서를 작성하도록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역사위원회는 회개 기도문을 작성하였고, 이를 제140회 정기노회에서 채택하였다.49) 

 

3. 일제 말기의 제주교회


1939년 5월 2일에서 5일까지 삼양교회에서 개회된 제10회 제주노회에서는 정순모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한 다음에 새로운 목회자를 받아들였다. 조의환 목사를 모슬포교회로, 이근택 전도사를 목사 임직 후 서귀포교회 담임목사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어서 제주노회 설립 1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본 노회 10주년 기념식을 거행키로 가결한 후, 회장이 찬송가 32장을 인도 합창하고 오주병 씨로 기도하고, 고영흥 씨가 성경 행 15장 6-7절을 봉독한 후 삼양교회 찬양대의 합창과 조의환 씨의 설교와 이근택 씨의 독창과 이도종 씨의 약사와 김도원, 김근세씨의 축사와 김형자, 고차숙, 홍순희 씨의 합창과 김응규 씨가 기도한 후 제주 처음 전도목사 5인에게 10주년 기념사진 1매씩 보내기로 가결하다.

이기풍 목사(여수군 우학리교회)

윤식명 목사(완주군 삼례리교회)

경필 목사(광주 금정교회)

김창국 목사(광주 양림정교회)

이창규 목사(군산부 구암교회)50)

 

그래도 1938년부터 1939년까지는 신사참배 후유증(?)이 적었다. 그 후부터는 감당 할 수 없는 영적인 어려움이 닥치기 시작하였다.

1940년에 이르러 양동혁 목사가 고산교회로, 허화준 목사가 협재교회로 부임하고, 장성철, 좌환겸, 홍순희(여) 등의 전도사 시취를 합격시킨 후 전도사로 시무케 하였다.

1940년 제10회 제주노회 제3차 임시노회는 “연맹회 결성식에 관한 건은 제주노회 지맹을 결성키로 가결하다”라고 결정하고 이사장에는 정순모 목사가 피선되고, 연맹회 사무실은 정순모 목사가 담임하는 한림교회 내에 두었다. 연맹회는 애국반을 조직하여 각종 정신 계몽 강연회를 실시하였다. 교인들을 연맹회 회원으로 등록시켰으며 연회비도 거출하였다.

1940년 후반에 이르러 제주노회 회원들은 모두 다 창씨개명에 따라 일본식 이름으로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1940년 11월 30일 제11회 제주노회 제1차 임시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황기 2600년 봉축식 경성 신도대회 소집에 관한 건
신도대회에 참석할 대표자 2인을 여좌히 택하여 파송키로 가결하다.조의환, 김기평51)


1941년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고산교회에서 회집한 제12회 제주노회는 목사 7명과 장로 9명 총 16명이 회의를 진행하였는데 모두 다 일본식 이름으로 표기하였다.

이 회의에서 ‘연맹회’ 이사진을 개편하여 이사장은 정순모 목사, 서기는 김기평 장로, 이사는 김응규 목사와 양동혁 목사로 선정하였다. 이어서 국가를 위한 기도를 드린 후 국방헌금을 모금하였는데 10.46원이었다. 이 금액으로는 국방헌금이 부족하였으므로 1940년 11월 13일 제12회 제주노회 제1차 임시회에서 “총회 국방헌금은 교인별 1원씩으로 정하고 12월 10일 내로 회계에게 납부하기로” 가결하였다. 이날 임시회는 또다시 한국 신사참배 역사에 있어서 교회에는 치욕적이었던 1940년 11월 17일 상모리 광장에서 실시한 ‘장로호’ 비행기 헌납식에 노회장을 파송하기로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41년(소화 16년) 8월 14일자로 ‘전시체제 실천 성명서’를 발표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42년에 이르러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을 결성하고 각 노회별로 지부를 결성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제주노회에서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제주지맹’을 결성하였다. 1942년 3월 10일 성내교회에 회집한 제12회 제주노회 제2차 임시회에서는 다음 회기에 상치부(常置部)를 두기로 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조의환, 양동혁 목사와 김기평 장로가 위원으로 선발되었으며, 1942년 4월 28일 성내교회에서 회집한 제13회 제주노회는 상치부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일을 하게 하였다.


제주노회 구내 각 교회 금종(金鍾)은 일치로 국방 헌납하되 그 수속과 방법은 상치부로 일절을 위임하여 각 교회에 통치하기로 가결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 노회에서는 황군 위문 ‘日의丸’ 의자 헌납을 건의하여 이도종 목사의 기도 후 당석에서 연보하여 20원 50전을 모금하였으며, 이 돈으로 의자 300개를 헌납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42년 10월 16일에서 20일까지 평양부 창동 예배당에서 회집한 총회에서 이렇게 보고한다.


특별 사항
④ 徵兵制實施祝賀 강연을 도(島) 경찰서 고등계의 후원하에 노회 내 20여 개소에서 개최하다.
⑤ 각 교회의 弔鐘을 헌납하고 愛國機 헌금, 眞鍮扇子 등을 헌납. 또 國防獻金, 慰問袋 등으로써 총후 국민의 誠을 盡한다.52)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각종 군수물자 부족에 직면한 일제는 국민들이 소유한 유기그릇 및 각종 유기물, 교회와 불교 사찰의 종(鍾)을 헌납하도록 함으로써 한국교회도 이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노회는 1942년에 교회의 종을 헌납하였으며, 1943년에는 일본군의 전투기 제작금으로 총 3,980원 90전을 모금하여 일본군 헌병대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성경과 찬송가에서 일본의 전쟁 수행에 위배되는 애국심 고취 부분을 삭제 혹은 폐지토록 하였으며, 설교와 찬송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하고, 교회에서도 일본어 학습반을 만들어 교육시켰다. 목사는 일본군 장교의 전투 복장으로 등단하여 설교하였으며, 전몰장병을 위한 묵념,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전시 비상사태 훈련, 각종 행사 동원 등 광란으로 몰아갔다.

또한 창씨개명과 공출에 그치지 않고 근로봉사대라는 이름으로 한국인 남녀를 무차별적으로 붙잡아 남자들은 광산 노동자, 공정대 근로자로 또 여성들은 성노예로 착취하는 등 인륜에 어긋나는 짓을 감행하였다. 그러다가 1943년 5월에는 각 교단을 해체한 후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통폐합시킨 후 교회 건물들을 팔아서 군수물자 공급에 유용하였다. 이어서 1943년 6월 10일에는 제주노회가 해산되고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제주교구’로 시작하였으며 초대 교구장에는 임기봉 목사가 부임하고, 정순모 목사는 1943년 7월 22일 송별식을 거행하고 전남 담양으로 떠났다.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제주도의 목회자들은 일본어 실력에 따라 교직을 지킬 수 있었으므로,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13명의 목회자는 모두 교직에서 쫓겨나고 일본어에 능통한 강문호 목사와 조남수 목사만 교직을 맡을 수 있었다. 이도종 목사는 고산에서 귀농생활을 함으로써 교역과는 무관하게 지냈으며, 임기봉 목사도 결국은 목회직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이렇게 제주도에 남겨진 강문호 목사와 조남수 목사 두 사람에게도 일제의 간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고등계 형사가 찾아와서 50세 미만은 모두 소개하게 되었으니 소개해야 한다고 신경을 벌였다. 주일날에는 예배 시간 정각을 지켜 나와서 강대상 정면 맨 뒷 자리에 앉아서 일본어로 기도와 설교를 하는가 여부와, 또 기도와 설교 내용을 일일이 기록하고 축도 후에 인사하고 가면서 또 언제 소개하겠느냐고 한마디 하고서 돌아갔다.53)


강문호 목사와 조남수 목사는 일제의 소개 명령에도 굴하지 않고 제주도의 교회들을 돌보기로 하였으며, 한림에서 동쪽은 강문호 목사가 서쪽은 조남수 목사가 맡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조남수 목사는 서귀포, 중문, 안덕, 모슬포, 고산, 한림, 금성, 애월까지 심방하면서 교회들을 돌보았다.54)

일제가 제주도에서도 전쟁 수행을 위하여 한국인들과 교회들을 탄압하는 사이에 일본군은 전쟁에서 패배하기 시작하였다. 1944년 10월 필리핀에서 미군에게 패배하여 철수하고, 1945년 3월 12일 ‘결7호 작전’을 실행하여 제주도를 일본군 최후 방어기지로 전환하기 위하여 4월 ‘제58군 사령부’를 설립함으로써 제주도에 일본군이 6~7만에 이르게 되자 제주도는 연합군의 공습 대상이 되었다. 이때부터 제주도 교회들은 일본군의 막사 혹은 사무실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제주시의 성내교회도 사실상 예배가 금지되고 일본군들이 군화를 신은 채 예배당 내를 활보하기도 하였다.

1945년 5월 6일, 제1진 소개선 황화호(晃和號: 구아마루)가 500여 명을 태우고 목포로 향하다가 추자도 부근에 이르렀을 때 미군기의 공격을 받아 침몰함으로써 노약자와 부녀자 257명이 익사하는 참극이 빚어지기도 하였다.55) 이 배에 승선하였던 서귀포교회 정동규 장로의 부인 문옥경 권사와 어린 남매 등 네 사람이 죽었으며, 또한 제주시 동부교회 고창병 집사 가족, 그리고 그 밖에 많은 신자들이 함께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지로 피신하는 사람들은 이어졌다.56)
예상하였던 미군 공군기의 폭격은 실로 무서웠다. 1945년 5월 13일, 비양도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일본군 수송선과 호위함 4척이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였으며, 산지항에 정박 중이던 일본 군함과 제주 주정공장, 군수창고 등이 미군 공군기의 폭격으로 침몰하고 불에 탔으며, 제주도 상공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일본군 비행기 4대가 격추되기도 하였다.
1945년 7월 6일 오전 10시경, 미군 공군기가 저공비행으로 한림항에 나타나 한림항 창고와 해안지대에 매설해 둔 지뢰에 폭격을 가함으로써 창고가 폭파되면서 불이 일어나고 지뢰가 연쇄적으로 폭발하였다. 폭발의 피해는 이러하였다.

한림교회당 42평과 사택 12평이 전파되었으며, 강문호 목사는 부상을 당하고, 그 여동생 강연아는 사망하였으며, 교인 중 어린이 5명, 부인 3명이 사망하였으며, 교인의 가옥도 여러 채가 큰 피해를 입었다. 가옥 파괴 약 400호, 사망자 30여 명, 부상자 약 200여 명, 교인 가옥 피해는 21호였다.57)

비극으로 치닫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새롭게 세워지며 복음의 교두보가 확보되는 역사도 있었다. 조수교회와 남원교회는 1932년부터 기도처로 시작하여 1934년에 교회로 인정받았다. 1937년에는 대정교회(인성교회)가 모슬포교회로부터 분립되었으며, 성산포교회가 설립되었다. 1938년에는 무릉(영락)교회가 모슬포교회로부터 분립하였다. 1941년에는 화순교회가 세워지고, 1943년에는 서호교회가 세워졌다.58) 

 





일제 말엽을 보내면서 제주도 교회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신사참배 강요, 문란한 생활 태도, 전쟁으로 인한 도덕적 피폐, 공출과 배급, 강제 징용과 노동 등으로 삶의 질은 갈수록 떨어졌다. 아니 삶의 질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으로 끌려간 강제 징용자뿐 아니라 제주도 내의 군기지 건설에 제주도민들이 강제로 징용되어 노동에 혹사당했다.

한라산을 비롯하여 농촌 어촌 할 것 없이 각 학교, 관공서, 교회당은 물론 큰 민가도 모두 군용기지로 강제 징용되었다. 교회당이나 사찰의 성종까지도 빼앗겼다. 그뿐이랴! 도민들은 수만 군인들의 뒷바라지에 거의 24시간을 빼앗겨야 했다. 비행장과 토치카 건설, 군용도로의 시설 보수, 특공대를 위한 항만시설에서 혹사를 당하였다. 모슬포 알뜨르와 제주 정뜨르에는 소위 함바라는 수용소를 수십 채씩 지어 놓고 한 곳에 백명 내지 이백 명씩 합숙하도록 하였다. 2~3개월 반으로 연중 교대하면서 전 도민이 소나 말처럼 혹사당하였다.59)

43) 《제주사연표 I》, pp.381, 400.
44) M. L. Swinehart, “Korea”, The Presbyterian Survey 5 (1930) pp.308-309.
45) Elizabeth J. Shepping, “Our Korean Home Mission”, The Presbyterian Survey 12 (1932) pp.745-746.
46) 《제주선교 70년사》, p.57.
47) 제9회 제주노회록.
48) 제10회 제주노회록.
49) 신사참배 회개 기도문
천 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일제강점기가 오래 지속되고, 폭압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시절, 제주노회는 이를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굴복하였습니다.
1938년 4월 26일에 회집한 제9회 제주노회는, 국법에 순종하여 국민의 의무를 다한다는
명분으로 저항의 뜻을 굽혔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두 세대가 지나도록, 이를 바로 잡지 못한 채 회피하였습니다. 늦게나마 이 아픔과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 자리에서 믿음과 양심에 어긋나는 결정을 해야 했던 믿음의 선조들을 우리들은 정죄할 수 없습니다. 당시의 교회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제주노회를 구성하는 저희들도 역시 연약한 존재입니다. 오히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시대의 흐름에 영합하며, 믿음의 순수함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기에, 그들을 비난하지도 못합니다. 옛날의 잘못을 거울삼아, 믿음의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게 하옵소서. 자유를 얻었다고 하나, 아직도 세계 열강의 움직임을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굳어진 민족 분단의 현실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며, 이산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양 차이와 차별의 구도 속에서 이 사회는 대립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이러한 환경에 얽매여 주님의 명령을 좇지 못할 때가 많습니
다. 이제 제주노회가 말씀에 따라 주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화해와 평화의 일꾼으로 서게 하옵소서.

오늘날, 경제적인 힘의 논리와 문화권력 등이 교회와 신앙인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훨씬 더 강하고 교묘하게 그리고 속속들이 믿음의 바른 선택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더욱 바른 믿음과 다듬어진 소망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르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4년 4월 29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

50) 제9회 제주노회록.

​51) 조의환은 內山義煥으로 개명하고, 김기평은 森本基平으로 개명하였다. 그 밖의 모든 회원들도 다같이 일본식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52) 총회록(1942), p.74.
53) 조남수 목사 《회고록》, p.123.
​54) 조남수 목사 《회고록》, p.126. 강문호 목사는 가족이 많은 관계로 두 사람이 지속적으로 목회하다가 죽으면 유족에 대해서는 총회가 돌보아 달라는 유서를 써서 육지로 소개하는 정동규(장로) 편에 부탁하였다.
55) 《제주사연표 I》, p.464.
56) 김재원 장로는 보성군 겸백면 남양리로, 장병숙 장로(장응모 장로 부친)는 순천으로, 고원숙 장로와 김청 권사 가족은 장항으로 피신하였다.

57) 《제주선교 70년사》, pp.59-60.
58) 박용규, 《제주 기독교회사》,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8, p.442.
59) 조남수, “4·3진상”, pp.4-5.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