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2016.07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22, 2016

다. 산남 서쪽 지역과 윤식명 목사, 원용혁 전도사


산남지방은 크게 전남노회가 선교를 맡아 부흥시킨 모슬포를 중심으로 한 서쪽 지역과, 황해노회가 선교를 맡아 부흥시킨 성읍교회를 중심으로 한 동쪽 지역으로 선교가 진행되었다. 이 두 지역은 제주시를 중심으로 한 전북노회 지역보다는 성장이 느렸을 뿐만 아니라 황해노회의 선교 후퇴로 더욱더 큰 어려움이 있기도 하였다.
윤식명 목사는 원용혁 전도사와는 뗄 수 없는 형제의 정을 나눈 사이가 되었다. 무오년에 법정사 무장저항대의 폭행 이후 더욱더 열심히 전도하였다. 윤식명 목사에게는 신유와 축귀의 은사가 더하여졌다. 여기에 광주 봉선동 나환자 집단치료소 원내 교회인 봉선리교회의 후원을 힘입어 원용혁 전도사도 쉬지 않았으며, 또 광주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파송한 여전도인 김경신 전도사도 함께 힘을 합쳐서 산남지방 서쪽 지역에서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기도처 혹은 예배 모임처로 있던 미조직 교회들이 교회로 발전하여 1921년에 용수리교회, 1922년에 협재리교회, 두모리교회, 성읍리교회, 법환리교회 등으로 발전하였다. 《사기》는 용수리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1921년(신유) 제주도 용수리교회가 설립되다. 선시에 전남노회에서 파송한 목사 윤식명의 전도로 이명춘, 이봉춘의 양 가족과 김기평, 홍성칠 등이 신종하여 이봉춘은 예배당 기지 60평을 기부하고, 교인은 60여 일을 연보하여 예배당을 신건하였고, 그 후에는 목사 이경필, 영수 이명춘이 전도하여 인도하였다.49)

용수리교회의 발전은 병마의 창궐과 깊은 관계가 있다. 용수리 지역에 괴질이 번져서 어린아이 하나가 독종으로 신음하고 있었는데, 윤식명 목사 일행이 기도함으로써 병이 낫게 되었다.
제주도에는 1920년 7월에 콜레라가 번창하여 구좌면 동김녕리에서 8월까지 사망자가 100여 명에 달하고, 8월 11일에 제주도 전역에서 환자수가 946명, 8월 15일에는 2,000명이라고 보고하였다. 다행히 성내에는 환자가 없으므로 외지와 교통을 50일 동안 차단하여 궁민 200여 가구가 발생하였으며, 9월 21일에는 환자 발생 수가 10,000여 명이고, 사망자가 5,000명에 달한다고 보도하였다.50) 윤식명 목사의 신유는 이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윤식명 목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동리 주민들이 개종함으로써 30여 명이 함께 예배 드리게 된 사실을 총회 앞으로 보고하면서 “제주는 제사와 술 먹는 일로 전도하기 난(難)한 곳이 많고 마귀가 나가는 것을 보고 믿는 자도 있사오며”51)라고 하였다.

​1922년에는 세워진 4개의 교회에 대하여 《사기》 1922년 부분에서 협재리교회의 설립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제주도 부재리교회가 설립되다. 선시에 모슬포 신자 최정숙이 이도종을 전도인으로 파송하였고, 전남노회에서 파송한 목사 이경필이 광주 봉선리교회에서 파송한 전도인 원용혁과 광주 부인전도회에서 파송한 김씨경신과 협동 전도하여 교회가 성립되었다.52)


그리고 이어서 두모리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 두모리교회가 설립되다. 선시에 전남노회에서 파송한 목사 윤식명이 전도인 원용혁, 김진배, 김진성 등으로 전도하여 양중향 부인과 양인규, 양의규, 고태행등이 믿고 동년에 초가 2동의 5간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기후 목사 이경필과 영수 고태행이 전도하여 교회를 인도하였다.53)


두모리교회는 윤식명 목사, 원용혁 전도사 일행이 일으킨 예배처소였다가 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윤식명 목사와 원용혁 전도사가 힘쓰던 산남지방의 서쪽 지역은 모슬포교회를 모체로 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목회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감화였다. 법정사 항일투쟁 일행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들에게 폭행을 가한 범법자들에게 선처를 부탁하는 인도주의적인 태도가 지역민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둘째는, 이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신유와 축귀 등의 은사가 제주도민들에게 적합한 개종 동기를 부여하였다. 셋째는, 광주 지역의 재정적 후원이었다. 봉선리교회, 여전도회 연합회 등에서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 넷째는, 인적 후원이었다. 윤식명 목사의 부임 초기에 협력하였던 김영진 영수(장로)와 김진성 전도인과 김경진 여전도인 등이 지속적으로 합력 선교하였다.
윤식명 목사가 1914년에 모슬포교회를 중심으로 산남지방의 동쪽 지역에서 선교하기 시작한 이래로 현지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최정숙(崔正淑) 장로를 양성한 업적을 빠뜨릴 수 없다.

​모슬포교회는 설립된 지 팔구 년에 신자 수 칠팔십 명에 달하였다. 최정숙은 모친 시하에 상업으로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중에 근검저축하였던 상업 자본 중에서 수백원을 교회에 바치어 명월, 옹포, 협재리, 금릉리 등 큰 동네에 전도인을 두어서 전도한 결과 지금 모이는 자 10여 명에 달하였으니 최 씨는 과연 우리 종교계의 모범적 인물이라 하겠더라.54)


윤식명 목사는 제주도 선교에서 팔 하나를 잃는 고통을 겪었으나, 제주도 산남지방의 선교를 튼튼히 다지는 공로를 세우고 전북노회로 이임하였다. 또한 후임 사역자 이경필 목사가 부임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다.

​49) 《사기》, 하권, p.37. 당시에는 지사포와 용당이 모두 용수라는 지명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설립되는 용수교회는 용당리 주전동에 세워진 교회로서, 1937년에 지사포교회와 용수교회는 하나로 합병하게 된다. <사기>의 기록에서 이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면서도 혼동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어서, 양 교회 교우들의 이름이 섞여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50) 《제주사 연표 I》, pp.374-375.

51) 제6회 총회록, 1917, p.12.

52) 《사기》, 하권, p.318. 협재교회를 뜻한다. 挾才를 扶才로 적으면서 일어난 잘못이지만, 당시 기록에서는 부재리교회라는 표현이 흔히 나타난다.

53) 《사기》, 하권, p.319.

54) 《기독신보》, 1921년 9월 7일자.

라. 임정찬 목사와 산남 동쪽 지역


임정찬 목사가 맡게 된 산남지방 동쪽 6개 면은 제주도 전 면적의 절반에 해당되는 넓은 지역이지만, 이에 비하여 기독교인 신자수는 매우 적었다. 1917년에 이 지역을 순방하였던 임택권 목사는 “조천리에 신자 5~6인과 정의(旌義)에 신자 10여 인이 있을 뿐이며” 이들 신자들도 주로 나이 많은 노파들이 과반 이상이라고 하였다.55)

​이상의 보고에 의하면, 임정찬 목사가 부임할 당시의 동쪽 6개 면에서 예배 처소로 모이는 곳은 조천리와 성읍리 두 곳이었다. 여러 상황에서 조천리가 더욱더 기회가 큰 장소였지만 임정찬 목사는 성읍리를 선교 거점으로 정하였다. 성읍리에서 기도회를 시작한 사람은 조천리에서 예수를 믿던 ‘천씨아나’였다. 천아나는 조천리에서 예수(서양 귀신)를 믿는다는 이유로 동네에서 쫓겨나 성읍리로 옮겨와서 열심히 전도하였다. 천아나는 성읍리에서 1910년 말경부터 정삼용(鄭三龍)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함께 예배를 드렸으며, 자신이 살던 초가 6칸을 예배당으로 바쳐서 교회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56)
이렇게 출발하였지만 교회는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됨을 면치 못하였으며, 임정찬 목사의 부임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정찬 목사는 성읍리에서 지속적으로 선교함으로써 1921년부터 성과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1922년에는 교회로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사기》는 성읍리교회의 설립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 성읍리교회가 설립하다. 선시에 목사 이기풍과 전도인 김홍련, 이득방의 전도로 정학석, 이학인, 강홍보, 강광은, 김보배, 강남서, 양범수, 유삼룡, 천씨아나 등이 신종하여 천씨아나는 초가 6간을 공헌하므로 기도회를 시작하였으며, 시년에 교우가 출연하여 15간 예배당을 증축하였으며, 황해노회에서 파송한 전도목사 임정찬이 전도사업에 다년간 노력하였다.57)


임정찬 목사가 성읍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하는 동안에 김일석이라는 중요한 한 인물을 개종시킴으로써 여타의 다른 사람까지 개종시킬 수 있었다. 그는 유교에 집착하던 사람이었으나 임정찬 목사를 만난 후부터는 과거의 습관을 철저하게 벗어버리고 올곧게 신앙생활을 지킴으로써, 동료 신앙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도 귀감이 되었다.


제주도 동중면 성읍리 북문 외에 사는 김일석 씨는 본디 유도(儒道)에 침념하여 완습을 벗어나기 난(難)한 중에서 깨닫고 나와서 주를 믿기로 작정한 지 불과 두 주일만에 모친상을 당하매 친척 친구들이 모여들어 예전 법대로 장례지내고 3년상 하기를 권하여도 듣지 아니하매 핍박이 여간 아니었으나 씨와 씨의 부인은 끝까지 이기고 났으며 세속의 무실한 것을 들어 힘써 모든 사람에게 전도까지 하였더라.58)


김일석과 그의 처 강석천은 1921년 7월 학습을 받았고, 1922년 3월에 세례를 받아 정교인이 되었으며, 김일석은 1925년 영수로 추대되어 성읍리교회와 동지방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강석천의 아우인 강계생은 신앙에 입문하면서 강형신으로 이름을 새롭게 하고 제주교회를 위해 평생 사역하게 된다.


▲ 1922년 조천교회와 임정찬 목사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천교회는 1909년에 세워진 이래로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임정찬 목사의 부임 시에 크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신정일이었다. 그는 1918년 6월에 집사로 임명되어 교회를 잘 받들다가 1922년에 치리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부도덕한 행위였다.
조천교회는 1919년 3·1만세운동의 진원지 가운데 하나로서 그 중심 세력에는 신앙인들이 있었다. 1919년에 교인 수가 60~70인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이 곧바로 조천리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특히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은 조천교회에서 “청년 3인이 주를 믿는데 장래 좋은 재목이 될 만한 희망이 있고”라고 하였는데,59) 이들은 김유배, 김연배, 전창희이다. 이들 가운데 김유배와 전창희는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여 치리를 받고 교회를 떠났으나, 김연배는 아픔이 많은 가운데서도 굳건히 신앙을 지켰다.
김연배는 3·1만세운동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19년 11월 말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12월 28일에 세례를 받았다.60) 당시 24세였던 김연배는 청년들을 교회로 인도하는등 열심을 보였으며, 1920년 5월에 이르러 아내가 “서양 귀신과 담을 쌓든지 아니면 나를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하자 신앙을 지키기로 하고서 합의이혼에 서명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김연배는 1922년에 조천교회의 집사로 임명받은 후 조천지역에서 독서회원과 야학을 이끄는 등 애국적 신앙으로 몸을 아끼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김연배는 1923년 11월 폐결핵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나이 28세였다.61)

​법환리 지역은 구역으로는 황해노회의 선교 구역에 속하였지만, 거리상 전남노회에서 관리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황해노회와 상의하여 전남노회 구역에서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 부분을 《사기》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제주도 법환리교회가 설립되다. 선시에 목사 이기풍이 전도하였으며, 그 후에 전남노회에서 파송한 목사 윤식명이 김진성, 원용혁, 김씨나홍, 천씨아나로 협력 전도하여 신자가 증가함으로 교회가 완성하였고, 특히 포와(布蛙)에 기우한 본도인 강한준이 전도인을 세워 전도하므로 교회가 더욱 발전되었으며, 본리 신씨해선 가에 집합 하더니, 시년에 강한준의 기부금 325원으로 82평의 기지와 2동 6간의 초가를 매수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고, 목사 이경필과 영수 강운석이 교회를 인도하였다.62)


한편 임정찬 목사는 1918년부터 산남지방 동쪽을 선교 구역으로 맡은 다음부터 열심히 전도하여 ‘세화리교회’를 설립하였다.

​1918년 제주도 세화리교회가 설립되다. 선시에 한동리居 夫尙奎가 목포 의사에게서 복음을 듣고 믿은 후 부산에 往하여 선교사 왕길지에게 학습을 전수하고 산지포 목사 이기풍에게서 수세를 받고 귀가하여 인근에 전도하여 신자를 얻어 교회가 시작되었고, 황해노회에서 파송한 전도목사 임정찬이 래도하여 전도할 때 부상규 家에서 회집 예배하니라.63)


세화리 지역은 부상규의 개종과 전도로 산남지방 동편에 교회를 세우게 되는 기초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상규는 목포의 프렌치 병원(French Hospital)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개종하였고, 이후 부산에서 호주 장로교 선교사 엥겔(George O. Engel:왕길지)에게서 학습을 받았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도착하자 그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으며, 아내와 자녀들을 복음으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전도하면서 결신자들이 생겨났고,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한 것이 1918년 무렵이었다.

​이렇게 좋은 신앙으로 시작한 부상규 씨가 가정불화로 주변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지못하자, 임정찬 목사는 1922년 8월에 집사직을 정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최문안을 집사로, 고창천을 권찰로 임명하여 교회의 기틀을 확립하자 최문안이 60원으로 초가를 매입하여 교회로 헌납함으로써, 1922년 9월에 이르러 한동리 기도처가 세화리교회로 발전하였다.
임정찬 목사가 1917년부터 1922년에 이르기까지 산남지방 동쪽지역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를 세워 나갔으나, 1921년에 이르러 황해노회는 재정난으로 선교 사업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임정찬 목사는 개인적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후원을 청원하였으며, 황해도 재령에 거주하는 여성 신도 이정애 씨가 제주도에 입도하여 자비량으로 임정찬 목사를 도와서 선교하였다. 이에 황해노회는 남자 전도인을 파송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결국 1922년 9월에 이르러 재정난으로 제주도 선교 사업을 중지하고 말았으며, 임정찬 목사도 제주도를 떠나게 되었다.
임정찬 목사는 “제주도 동반부 교회의 애원서”라는 이름으로 제주도 선교 사업의 지속을 바라는 탄원서를 발표하였다.


1917년 본도 동반구역에 내림하여 애휼한 심정과 열성으로 광활한 황폐지를 개간하고 복음을 전파한 바 5개 성상을 불과한 오늘에 벌써 교회가 조천리, 성읍리 2개소에 설립되고 또 금년에 세화리에도 신설되고, 그 외에 2~3개소의 기도회 처소가 있어 교인 총수가 130여 명에 달하였으나…….64)


산남지방의 선교가 1922년을 기하여 종료되고 교세가 기울어가자 전남노회가 이 지역을 다시 책임 맡게 되었으나 재정적으로 쉽지 않은 과제였다. 이 어려움을 해결해준 교회가 바로 광주 봉선리 한센 환우들이었다. 광주 봉선리교회는 제주 선교를 지원하기 위하여 1924년부터 ‘제주전도사업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1925년 1월 3일에 제주전도사업후원회 임원진을 개선하였다. 《기독신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제주전도사업후원회
전남 광주군 봉선리교회에서는 제주도 동포의 영혼들을 구원하려고 수년 전부터 단독히 전도인을 파송하고 그 사업을 더욱 확장키 위하여 후원회를 조직한 지 불과 1년에 열심 기도와 많은 물질의 도움으로 전도 사업에 큰 영향을 받게 하는 중 지난 3일 하오 7시에 임원을 개선한 바 피선 제씨는 다음과 같더라.
회장 : 오근욱, 박춘갑 서기 : 허 욱, 김주언 회계 : 이태주, 오영조6 5)


이상의 기록을 통해 볼 때, 1917년에서 1922년 사이에 산북지방과 산남지방의 교회는 크게 발전하였는데, 특히 산남지방에서 더욱 발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산북지방과 산남지방의 교회들이 세워져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제주도 출신의 전도인은 이도종(李道宗)이다.
이도종 목사는 제주도 금성교회의 초대 교인 이덕련 장로의 장남으로서 1892년에 태어나서 1915년에 이기풍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평양 숭실중학교와 평양신학교를 1926년에 졸업하고 1927년 목사 임직을 받았다.

55) 《기독신보》, 1917년 8월 1일자.
56) 참조, 《조천교회 90년사》(미간행).
57) 《사기》, 하권, pp.319-320.
58) 《기독신보》, 1921년 6월 1일자.
59) 제8회 총회록(1919) p.13.
60) 학습일은 1919년 2월 23일.
61) 그의 묘비에는 “基督敎人 金年培之墓 以信從命 必得永生 先旅其母 只遺一限”이라고 하였다.
62) 《사기》, 하권, p.320.
63) 《사기》, 하권, p.311.
64) 《기독신보》, 1922년 12월 6일자.
65) 《기독신보》, 1925년 1월 21일자. ​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