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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22, 2016


 

제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

 

이기풍, 최대진 목사의 뒤를 이어서 전북노회로부터 제주도 파송 선교사로 임명받은 사람이 김창국(金昶國) 목사이다. 김창국 목사는 1917년 9월에 부임하여 1922년 3월까지 제주도 성내교회 당회장을 역임하면서 산북지방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이 기간에 산북지방에 여러 교회가 세워짐으로써 선교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산남지방 역시 서쪽의 윤식명 목사에 이어서 동쪽의 임정찬 목사가 부임하여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사역함으로써 함께 부흥하였다. 그러다가 이들 3명의 목사들은 다 같이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제주도를 휩쓸고 간 군자금 모금운동에 적극 협력하였다. 모두가 수감되어 옥고를 치른 후 제주도를 떠나야 했다. 조봉호는 1920년 4월 말에 대구에서 옥사하였다. 이후 1922년에는 산북지방에 이창규 목사(1922-1924년)와 김정복 목사(1924-1927년)가 이어서 부임하고, 황해노회가 산남지방의 선교를 포기함으로써 모슬포교회에 부임한 이경필 목사가 산남지방 전체를 떠맡아 1927년까지 목회에 전념하였다.

1927년에 김정복 목사와 이경필 목사가 떠남으로써 산북과 산남지방은 목회자가 공석이 됨으로써 난감한 상황에 이르렀으나, 양 지방에는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 걸출한 2명의 목회자가 부임하였다. 산북지방은 이기풍 목사가 재부임하였고, 산남지방은 최흥종 목사가 부임하여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또한 동시에 1930년에 제주노회가 전남노회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그렇지만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가혹한 착취로 인하여 한국 사회는 최악의 극빈(extreme poverty) 국가로 전락하고 교회도 깊은 침체 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이 시기에 일제의 탄압, 신사참배의 강요, 극심한 가난 등이 온상이 되어 공산주의적 방법을 통하여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도 들어왔으며, 제주도에도 이러한 경향의 인사들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 선교를 위하여 후원했고, 특히 광주 봉선리교회(한센 환자들의 교회)에서 독립적으로 전도인을 파송하고 지속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하였으며, 여러 신앙인들이 자발적으로 선교비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제주도 선교는 희망을 바라보았으며 교회도 힘을 얻고 더욱더 활발하게 복음 전파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1. 김창국 목사의 부임과 산북지방


김창국 목사에게는 호남 선교 역사에서 ‘첫 번째’라는 수식어가 여러 번 붙는다. 레이놀즈(W.D. Reynolds: 이눌서) 테이트(L.B. Tate: 최의덕) 목사 등 전주 선교부 설립과 정착 단계에서 어머니의 개종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선교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그는 전주에서 최초로 세례 받은 소년이고, 전주 신흥학교 제1회 첫 번째 입학생이다.

김창국은 1884년 전주에서 한의사 김제원과 류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동안에 성령대부흥운동에 참여하여 거듭남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1915년에 평양신학교 제8회 졸업생으로 학업을 마친 후30) 전북 익산, 삼례 등에서 목회하다가 1917년 9월에 제주도 선교사로 임명받았다.31)
김창국 목사는 선교사로 부임하여 성내교회를 중심으로 산북지방의 여러 교회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는 1918년에 삼양리교회와 세화리교회가 조직되었다고 기록한다.

1918년 제주도 삼양리교회가 설립하다. 선시에 독노회에서 파송한 전도목사 이기풍이 전도하여 윤보원, 윤옥경, 문만여, 박춘선 등이 신종하여 박춘선 가에서 기도회를 회집하더니 전라노회에서 파송한 전도목사 최대진이 래도하여 전도한 결과 이선일, 오주병, 신평석, 문명옥 가족이 상계 신종하였는데, 오주병이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제공하여 회집하였으며, 그 후 윤식명, 김창국 등이 차제 시무하니라.32)


그리고 이어서 1919년에는 내도리교회가 설립되었다. 《사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1919년 제주도 내도리교회가 설립되다. 선시에 전북노회에서 파송한 목사 김창국의 전도로 안치덕, 박연일이 신종한 후 상호 전도하여 신자가 증가되매 예배당을 신건하였고, 조사 김재선과 전도인 이덕련과 목사 이창규가 계속 노력하였다.33)

뿐만 아니라 김창국 목사는 성내교회에서 당회장으로서도 중요한 일을 진행하였다. 그동안 교회의 종이 없었는데 교인 홍영진 씨가 50원을 헌금함으로써 미국에 주문하여 종을 구입하였으며,34) 이기풍 목사가 선교 초기에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중단된 사숙 영흥학교를 다시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35) 사숙은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나누어 교육하였는데, 남학생 사숙은 1924년까지 진행하고, 여학생 사숙은 교회의 재정 부족으로 1918년에 중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고자 김창국 목사는 1920년 말에 김익두 목사를 청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날의 부흥회 모습에 대하여 《기독신보》는 이렇게 말한다.


제주 성내교회 부흥회
12월 3일부터 13일까지 10일간 김익두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하였는데, 성내 교인 200명과 각 교회에서 들어온 형제자매들이 합하여 400여 명 가량이 회집하여 심령상으로 크신 은혜를 충만히 받았사오며, 육신으로도 각색 병 나은 자가 50~60명 되는 가운데, 특별한 것은 눈이 전부 어두워 보지 못한 지가 6년째 된 노인이 눈이 밝어 무삼 물건을 분별하여 예배당에도 찾아왔고, 두 팔이 굽어지고 또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이팔과 허리가 펴서 예배당에서 춤을 너울너울 추었사오며 경상도 영일군에서 구가 절벽된 벙어리가 학생들을 다리고 그곳까지 와서 은혜를 받는 중에 귀가 열리어 소리를 듣고 또 발음을 하여 하나님 아부지라고 하며 기쁨으로 돌아갔사오며, 또 예배당 건축하기 위하여 헌금하는데 혹은 금으로 혹은 월자로 혹은 반지로 혹은 장도로 혹은 기명으로 혹은 갓 양태로 혹은 안경으로 혹은 시계로 혹은 명주로 혹은 의복으로…….36)

김익두 목사를 통한 은사 체험은 제주도 성내교회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갖게 하였다.
1921년을 새롭게 출발하였지만 김창국 목사의 목회는 탄력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김창국 목사 스스로도 변화를 추구하던 즈음에 광주 양림교회의 청빙이 있어서 1922년 3월에 이임하게 되었다. 이는 성내교회 당회장으로서의 활동과 맞물려 1919년에 일어난 3·1만세운동과 이어서 발생한 군자금 모금운동과 관련된 체포-재판-형 선고에 이르는 과정에서, 목회자로서 그리고 선교사로서의 의욕을 상실한 데 큰 원인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30) 김창국 목사와 동기생으로 졸업하고 전북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은 사람은 이경필, 이자익이다.
31) 성내교회는 이기풍 목사가 치료를 끝내고 재부임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기풍 목사는 1916년 8월에 광주 양림교회의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32) 《사기》, 하권, p.311.
33) 《사기》, 하권, p.313.
34) 성안교회의 종 구입을 위해서 교인 홍영진 씨가 50원을 헌금하였으며, 미국으로 종을 주문하였다. 그리하여 종이 도착하자 종각을 세우는 과정에서 기존의 교회 건물도 약간 수리하였다.
35) 사숙의 교사는 조봉호, 좌형수, 김재선, 김세옥, 강규언, 김봉주, 이인전, 홍마태, 홍마리아, 윤진실, 윤신실, 김대봉, 김광삼, 김옥성, 신재홍, 정상조 등이다.

36) 《기독신보》, 1921년 1월 5일자.


2. 산남지방의 성장과 수난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산남지방은 윤식명 목사와 원용혁 전도사, 최대현 전도인 그리고 김기평 장로 등 여러 지도자들이 힘을 합하여 열심히 전도한 결과 교회가 부흥하였지만 지역적으로 주로 산남지방의 서쪽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산남지방의 쪽 지역에 대한 선교는 황해노회에서 맡도록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가. 재정 지원


두 지역에서 선교가 가능하였던 것은 육지에 있는 각 교회들의 재정적 지원 덕분이었다. 제주도 선교를 위한 재정적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첫 번째, 노회→ 총회로 이어지는 조직적인 목적성 헌금 수납을 통한 기금 마련이었다. 이 방법은 노회→ 총회가 소속 교회들에게 감사절 헌금, 크리스마스 헌금 등을 선교를 위한 목적성 헌금으로 구분하여 후원하기도 하였으며, 전라노회가 제주도 선교를 전담한 이래로 각 시찰별로 연간 선교비 총액을 할당하여 부담하도록 하였다.
두 번째, 노회→ 총회로 이어지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 교회들이 제주도의 형편을 감안하여 자발적으로 헌금하는 사례가 있었다. 선교사들이 노회→ 총회에 참석하여 선교보고를 하면서 어려운 형편을 설명하면 당석에서 헌금하는 사례도 있었다.

세 번째, 선교사 자신의 출신 지역이나 연고를 좇아서 후원하는 사례가 있었다. 예를 든다면 이기풍 목사의 출신 지역인 평양 여전도회 연합회, 숭실중학교와 대학, 그리고 여러 교회와 기관들이 보이지 않게 후원함으로써 선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네 번째, 선교사들이 1년에 한두 차례씩 제주도를 방문하면서 어려운 형편을 목격하고서 즉석에서 혹은 적절한 시기에 헌금하기도 하였다.
다섯 번째, 이상 네 가지 유형의 선교헌금과 더불어 매우 값진 헌금이 있었다. 그것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어려운 형편을 감안하지 않고 순수한 신앙적 열정과 헌신으로 제주도의 선교에 매우 값진 헌금을 보내는 경우였다.

먼저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리춘교 씨의 헌금을 보기로 하자. 그는 산골 조그마한 교회의 평범한 교인이었다. 그런 그의 헌신은 어떠하였는가?


리춘교 씨는 금년 31세인데 논 두 말락과 밭 한 말락을 장만하였더니……기독신보 3권 16호를 보고 비상한 감상이 일어나서……즉시 전답과 가재도구를 팔아 46원을 받아서 20원은 중국으로 보내고, 20원은 제주도로 보내고, 6원은 진흥회로 보내고……자기는 셋집에서 사오니…….37)

또한 성내교회의 강대유 집사도 이에 못지않은 헌금을 바쳤다. 1918년 12월 10일자 성내교회 제직회록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강대유 씨가 몇 해 전에 거류 등지에 있는 밭을 헌납한 고로 1919년부터는 교회에서 임의 처리하기로 가결하다. 강대유 씨가 교회에 바친 밭을 상당한 시가로 방매하기로 가결하다.38)


이렇게 볼 때, 고산교회에 자기 집을 바친 70세의 추씨산옥 씨, 성내교회의 종 구입 자금 50원을 헌금한 홍영진 씨, 자신의 밭을 헌납한 강대유 씨, 그리고 자신의 밭과 집을 팔아서 셋집에 내려앉은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선거교회의 리춘교 씨 등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제주도 선교를 위하여 귀하게 사용하신 그릇들이었다.

그렇지만 이에 못지않은 가슴 아픈 헌금도 있었다. 광주 봉선리에 있는 한센병 집단 치료소, 일명 광주나병원(후일에 애양원으로 개칭함)의 환자들이 아픈 몸으로 일군 논과 밭의 소출을 팔아서 그 돈으로 제주도에 전도인을 파송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선교헌금을 보냈던 사실은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귀한 일이다.

1909년부터 시작한 광주 봉선리 한센 환자 집단치료소의 환자들은, 비록 육체는 질병으로 고통을 겪을지라도 원내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진 다음에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고마움의 표현으로써 제주도 선교에 동참하게 되었다.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1918년(무오): 광주군 봉선리교회에서 원용혁(元容爀)을 제주에 파송하여 5년간 전도하게 하고 그 후에는 김재진을 파송하여 계속 전도하였다.39)
애양원교회(봉선리교회 혹은 유안동교회)는 1919년에 첫 장로임직식을 거행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 이때에 “제주에 전도인을 파송하고 봉급을 담당하여 재미있게 일하는 중이오며……”라는 언급을 볼 수 있다.

​37) 《기독신보》, 1918년 6월 12일자.
38) 성안교회 제직회록, 1918년 12월 10일: 《제주성안교회 100년사》, p.163에서 인용.
39) 《사기》, 하권, p.322.


나. 산남에서 일어난 핍박과 법환교회 건축


이미 앞에서 말하였듯이 전남노회는 광주지방, 목포지방. 그리고 순천지방에서 일정한 금액을 할당하여 제주 선교비를 충당하였다. 세 선교부에서 선교사와 교사들을 순번을 정하여 내도하여 1개월에 걸친 부흥사경회와 의료 봉사 등으로 후원하였다. 그러다가 전남노회가 제주도 산남지방의 동쪽지역에 있는 6개 지역을 황해노회에 할애하였다. 하지만 법환리에는 2년 전 대전도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기도처가 성장하고 있던 중이라 지리적으로 전남노회가 담당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여 전남노회 소속인 윤식명 목사와 원용혁 전도인이 담당하고 있었다.
1918년 음력 9월 윤식명 목사와 원용혁 전도인 일행이 모슬포에서 법환리로 전도하러 가던 도중 하원리 앞에 이르렀을 때 제주도 선교사상 일찍이 없었던 큰 박해를 당하게 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는 이 부분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1918년(무오) 9월 2일에 제주도 법환리교회에서 전도에 종사하는 목사 윤식명이 원용혁, 김진성, 김씨나홍, 천씨아나로 더불어 본리에 전도하러 나오는 도중에 다수한 태을교가 放鉋一聲에 石으로 매장하자는 소리를 지르며 각기 목봉으로 무수히 난타하니 김진성은 다행히 피신하여 중문리 천제연 수중에 들어가서 재석구명 하였고 김나홍, 천아나는 1,2차 목봉을 받고 피신하였으며, 윤식명 원용혁 양인은 중상하여 혼도하니 상처가 분열되어 선혈이 임탄(淋灘)하니 중문리 주재소 경관과 면직원 일동이 야중에 현장에 내도하여 서귀포 소천(小川)의원에 입원하여 1개월간 치료 후에 간신히 거동하게 되어 모슬포로 내하는 선중에서 목포 수비대에게 체포되어 압거(押去)중에 있는 태흘교도 68명을 봉착ㅎ게 되매 윤, 원 양인은 자기의 고통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절절히 해교도에게 대하여 전도하니 해교도중 전일 자기의 난폭한 행동을 각오하고 감동되어 낙루하는 자도 있었으며 이를 목격한 순사 박덕우는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에 치료가 불완전하므로 목포병원에 내하여 완치되었으나, 결국 윤식명은 우완40)이 병신 되고, 원용혁은 두골이 병신 되어 항시 不仁하게 되니 그는 제주교회 설립된 후 초유핍박이었다.41)


한동안 이 사건을 제주교회사에서는 ‘보천교의 난’이라고 기록하였다. 향토사학과 불교의 입장에서는, 1918년 10월 7일 법정사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항일운동으로 이해한다.42) 보천교와 지역 주민이 함께하여 중문주재소를 습격 방화하는 3·1운동 이전 최대 규모의 항일 투쟁으로, 일제의 경제 침탈에 대한 제주도민의 항일 투쟁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제주교회사적으로는 보천교도들에 의한 제주 초유의 핍박이었다.
1914년부터 태을교43) 혹은 보천교라고 불리던 현세 구복종교 교도들이 제주도에 들어왔다. 당시 제주도에서 불교의 교세는 미미한 상태였다.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형상은 제주의 신당 129개소와 사찰 2곳을 불사르는 등 민간신앙과 불교를 억압하였다. 조선 후기에 불교는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1908년에야 관음사가 다시 세워질 정도였다. 반면에 증산교의 일파로서 토속종교를 바탕으로 유불선을 결합한 보천교는 1918년 당시 이미 상당한 교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1918년 9월에 영일 출신인 승려 김연일이 제주도에 들어와 좌면(중문) 법정사에서 ‘머지않아 불무황제(佛務皇帝)가 출현하여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니 우선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들을 도외로 쫓아내야 한다’며 배일사상을 고취시켰다. 일본인과 개화인에게 몹시 배타적이었던 이들은 중문에 있는 법정사에 집결하여 일제 당국의 보천교 탄압에 항거하고자 하였다. 10월 5일-6일에 보천교도와 지방 주민 400여 명이 서귀포지소를 공격하고자 준비하였다. 10월 7일 아침에 이들은 법정사를 출발 하였으나, 기대한 것처럼 많은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이 대열은 방향을 바꾸어 중문으로 향하였다.

이때 마침 윤식명 목사 일행이 전도하기 위해 법환리로 가다가 하원리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들과 마주쳤던 것이다. 윤식명 목사는 수많은 군중이 종이 깃발을 휘날리며 운집해 있는 것을 보고 전도하기 좋은 기회를 맞았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들과의 거리가 불과 거리가 100여 보 남짓 되었을 때 갑자기 사람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돌진하였다. 그들은 윤식명 목사 일행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김진성 전도인은 도망하여 천제연 물속에 들어가 숨어서 살아났고, 김나홍과 천아나는 나이 든 부인들이라 피신하도록 방치해 주어 피해를 크게 입지 않았다. 하지만 윤식명과 원용혁은 무수히 난타당하여 사경을 헤매는 참상을 입었다.44) 태을교(보천교)도들은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라 해서 배척하였던 것이다.45) 또한 전도대 일행에는 일본인 고이즈미 기요미(小泉淸身)가 동행하였기에 분노는 더욱 크게 폭발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윤식명 목사는 왼팔과 갈비뼈가 부러졌으며 왼팔이 회복되지 않아 외팔이가 되었다. 원용혁 전도사는 머리가 벗겨지도록 맞음으로 치료중 탈모된 부분이 많아 대머리가 되고 말았다.46)

원용혁 전도사의 어려운 소식을 들은 봉선리교회는 더욱더 기도하였으며, 1919년에는 제주도 선교를 위하여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사기》를 통하여 다음과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광주 유안동교회에서 제주 여전도인 1인을 담당하겠다는 청원과, 유안동교회에서 제주선교사 윤식명의 사택 수리비 40원을 연보하는 것은 기쁘게 받고, 제주 남전도인 개선은 윤식명에게 위탁할 것과, 제주선교를 위하여 권서 1인 파송하기로 맹현리에게 위탁하여 성서공회에 교섭할 것과, 제주 법환리에 전도인 원용혁에게 월 15원을 정하고…….47)

이와 같은 어려움으로 시작한 법환리 지역의 선교는 지역 출신으로 하와이 교포로 있던 강한준 씨가 지속적으로 송금하여 교회의 부흥을 꾀하였으며, 1920년에는 약속한 교회 건축비 325원을 송금해 옴으로써 1922년에 법환리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였다.48)

40) 《제주선교70년사》 에는 좌완으로 나와 있다.
41) 《사기》, 하권, p.323.
42)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들을 보라, 제주도연구 22(2002). 제주도연구 25(2004). 박찬식, “1918년 중문지역의 항일운동, 제주도 99(1996,1) pp.83-93, 한금순, 근대제주불교사 연구, 제주대 박사논문 2010, 한금순, 한국 근대 제주불교사, 제주 2014,
43) 태을교는 원래 普天敎에서 파생된 신흥종교였다. 1911년 동학교도였던 차경석(車京石)이 강일순을 만나서 증산교에 입교하였다. 강일순이 죽자 교권이 부인 고씨에 넘어갔으나 교단을 이끌 능력이 없어 그녀의 사촌동생인 차경석이 교권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차경석은 1920년에 교권조직을 60방주로 확장하고 557,700여명에 달하는 간부를 임명하였다. 1921년에 경상남도 함양군 황석산에서 천제를 지낸 후 보천교라고 개명하였다. 이어서 1925년에는 최남선이 세운 《시대일보》를 인수하고 친일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러자 그를반대하는 세력들이 탈퇴하여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였는데, 이렇게 설립된 교단이 太乙敎, 東華敎, 水山敎,三聖敎, 戊乙敎, 人天敎, 元君敎 등이었다.
44) 《호남교회춘추》 (2005, 11) p.107.
45) 《제주항일인사실기》, p.417.
46) 한인수, 《호남교회형성인물》, 경건 2000,p.180.
47) 《사기》, 하권, p.297.​

​48) 《사기》, 하권, pp.29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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