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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10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22, 2016

 

제2부
1915-1927
제주 교회의 성장


제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1. 산남지방
2. 산북지방의 선교
3. 전도사업의 분할
4.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협력
5. 교회들의 발전


제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김창국 목사의 부임과 산북지방
2. 산남지방의 성장과 수난


제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1. 조천리 3·1만세운동
2. 독립회생회와 군자금 모금사건
3. 1919년 이후에 나타난 변화


제4장 제주 교회의 정착기


1. 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2. 산북지방의 선교


제5장 최흥종 목사와 서서평 선교사


1. 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2. 서서평 선교사의 제주 사역

 


제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


일제는 전통적인 구 도심권을 파괴시킴으로써 기존의 토호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신흥도시를 개발하는 정책을 폈다. 이 정책은 제주도에서도 적용되어 기존의 3군(제주, 대정, 정의) 제도를 무너뜨리고 산북과 산남으로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전국적으로 새로운 도로를 만들어 신작로라 불렀는데, 제주에서는 1912년에 개설하기 시작한 해안 일주도로가 여기에 해당된다.1) 그리고 해안의 작은 포구들을 도시로 개발하였다. 그리
하여 새롭게 신흥도시로 개발된 곳이 성산포, 서귀포, 모슬포, 한림포 등이었다. 성읍과 대정의 위상은 점점 약해졌다.
이 가운데서도 산지포, 즉 제주시는 그대로 개발시키고 성읍과 대정은 서서히 힘이 약화되어 갔으며, 신흥도시로 모슬포와 서귀포가 등장함으로써 제주도는 산지포(제주)와 서귀포와 모슬포와 한림포라는 새로운 구도로 발전하였다. 기독교도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가장 두드러진 발전은 모슬포에서 나타났다. 서귀포는 새로운 도시로서 발전이 더뎠다.


1917년 전라노회가 전북노회와 전남노회로 분립되었다. 이에 따라 제주 지역의 선교구역도 나뉘게 되었다. 산북지방은 전북노회에서 맡아 제주성내, 삼양리, 한림리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산남지방은 전남노회에서 맡아 모슬포와 중문리와 법환리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어찌되었거나 양 노회의 선교 구역에서 소외된 지역은 성읍, 조천, 서귀포 등의 동쪽과 동남쪽 지역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산남지방을 맡아서 수고하였던 윤식명 목사는 1918년에 항일투쟁에 나섰던 주민들로부터 공격받고 생명의 위협을 받기까지 하였으나 굳건하게 이겨냈고, 1921년에 전북노회로 이임하였다. 이어서 이경필 목사가 부임하여 모슬포교회는 부흥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모슬포교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는 중문리교회, 법환리교회, 성읍교회, 두모리교회, 부재리교회,2) 서귀포교회 등으로 산북지방의 동쪽을 향하여 선교의 폭을 넓혀 가기 시작하였다.

이 기간에 제주도 교회들은 3·1만세운동을 겪으면서 3명의 목회자 전원과 지도층 교인들이 수감되었다. 조봉호는 순국으로 제주 항일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이 기간에는 전국의 각 지역에서 제주도 선교를 위하여 헌금을 하고 사역자들을 파송하곤 하였다. 광주 봉선리 나환자 집단 치료소에 세워진 봉선리교회는 나환자들의 재정지원으로 원용혁 전도사를 파송하여 선교에 참여하게 하였다. 전남노회 여전도회 연합회는 이재순 여전도사를 파송하였으며, 서울의 변호사도 협력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선교에 참여하였다.


1. 산남지방


이기풍 목사가 사임함에 따라 전라노회는 1915년에 최대진 목사를 파송하여 산북지방 선교사로서 사역하게 하였고, 산남지방은 1914년부터 윤식명 목사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우선 산남지방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산남지방은 이기풍 목사와 전도인들의 노력으로 1912년에 모슬포교회를 세움으로써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하였다. 《사기》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제주도 모슬포교회가 설립되다. 일찍이 노회에서 파송한 전도목사 이기풍이 이재순, 강병담, 최대현 등과 협력 전도하여 강흥주, 정응호, 신창호, 김씨 나오 등을 얻고, 그후 전도목사 윤식명과 전도인 원용혁, 김경신 등의 전도로 이씨 화숙, 김씨 순전, 고씨 수선과 송경서, 최정숙, 고가향, 장예규, 고훈장의 부인 등이 신종하여 신창호 가에 회집하여 예배하다가 연보하여 초가 예배당을 건축하니라.3)

모슬포와 산남지방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 지역은 제주도에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40년에서 1848년까지 8년 3개월 동안 대정에 유배되었는데, 이 기간 제주의 유림들과 교유한 것이 유학의 뿌리를 더욱 깊게 내리도록 만들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 생활에서 풀려났지만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학 정신은 산남지방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반대하고 동리의 신물(神物)들을 훼손하는 천주교
도들에 대하여 1901년 ‘신축교안’ 혹은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고, 이로 인하여 산남지방의 천주교도들이 대수난을 겪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기풍 목사가 이 산남지방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으며, 윤식명 목사가 성공적으로 목회할 수 있었을까? 이기풍 목사에게는 남전도인으로 김홍련, 김형재, 김창문, 강병담과 여전도인 이선광이 있었으며, 전라도 출신의 이재순과 최대현이 있었다. 윤식명 목사에게는 광주 봉선동교회에서 파송한 남전도인 원용혁과 광주 여전도회에서 파송한 여전도사 김경신과 목포 양동교회의 김영진 영수가 있었다.

제주도 출신으로서 1908년 노회에 참석하였던 남전도인 김홍련과 제2회 노회에서 평양 여전도회가 파송한 이선광이 이기풍 목사를 도왔으며, 1909년 제3회 노회에서는 “평양대중학교 학도들이 연보하여 대학도 김형재 씨를 제주 전도인으로 파송하여 넉달 동안 열심히 전도하였으며”, 이어서 여전도인 이선광의 사역도 1년 연장되었다.4) 따라서 평양에서 온 전도인 김형재와 제주도 본토 전도인 김홍련은 주로 남자들에게, 그
리고 이선광은 이기풍 목사의 부인인 윤함애와 더불어 제주도 여성들의 전도에 전념하였을 것으로 본다.

김형재 전도인은 1909년 10월부터 4개월 정도 사역을 마치고 1910년 2~3월경에 떠났다. 1910년 제4회 노회에서는 김창문을 제주 전도인으로 선정하여 6개월 동안 선교하도록 하였는데, 그는 1911년 4~5월까지 제주도에 있었다. 그리고 1911년 제5회 노회에서 새로운 전도인으로 파송된 사람이 강병담이다. 따라서 강병담은 1911년 10월경부터 1912년 4~5월경까지 제주도에 머물면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다.
이 가운데서 제주도 여성 선교에 큰 획을 그은 여전도인 이선광은 평양 여전도회로부터 세 번째 파송을 받아서 제주도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평양 여전도회의 회의 모습을 마가렛 베스트(Margaret Best) 선교사는 이렇게 묘사한다.

여선교사가 소개되면 사람들은 기대에 찬 눈총으로 바라보았으며 선교사에게 “더 큰 소리로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였다. 제주도의 사진들을 돌리면서 청중들에게 그곳의 사역을 지원해 주도록 호소하였다. 그녀는 선교사에게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꾸밈없이 호감 가는 태도로 말하였으며, 청중들의 얼굴에 나타난 흥미로운 태도로 인하여 그녀의 표현력을 알 수 있었다. 평양 여전도회 연합회는 한달 10엔의 급여로 다시 그녀를 보내자고 하였다.5)


산남지방은 유학적 전통에 따라 학문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이들 학생 출신 전도인들이 모슬포 지역에서 어린아이들을 위한 아동학교를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며, 이모임이 모체가 되어서 교회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본다. 모슬포교회에서 교사 출신인 최정숙이 개종한 것으로 보아서도 이러한 유형의 선교는 그 효과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산남지방은 1914년부터는 윤식명 목사가 부임하여 집중적으로 전도하기 시작함으로써 한 발 더 앞서기 시작하였다. 신창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희망이 보인것이다. 그러나 윤식명 목사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아직 변변한 건물을 가진 것도 아니고, 초가를 개조하여 예배 처소와 함께 임시 숙소로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었고 우물을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윤식명 목사의 딱한 사정을 목격한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1915년에 사택과 우물을 팔 수 있는 자금을 지원하였는데, 이 일에 보이지 않게 크게 기여한 사람이 목포 양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던 김영진 영수였다. 그러다가 김영진 영수가 1915년에 순천으로 떠남에 따라 혼자 된 윤식명 목사는 전도인 파송을 기다렸는데, 뜻 밖에도 광주 봉선리 한센병 환자 집단 치료소 소재 봉선리교회에서 원용혁 전도인이 파송되었다.
산남지방의 교회 설립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 김기평이다. 김기평에 대한 기록은 이사례 권사의 순교보에서 찾을 수 있다.6) 1908년에 이기풍 목사가 전도하며 요한복음 쪽복음을 나누어주는 것을 김기평이 받게 되었다. 혼자로서는 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큰아들을 이기풍 목사에게 보내어 알아보도록 하였다. 제주읍에서 그는 천주교를 찾아갔으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아버지에게 전해 주었다. 이 아들은 한경지역의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김기평은 스스로 제주읍으로 이기풍 목사를 찾아가 구원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김기평 부부는 1913년 2월 11일에 세례를 받았으며, 조상의 신주와 제구를 불사름으로써 일가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이러한 배척과 따돌림에도 불구하고 김기평은 자기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기도처가 시작되었다. 1914년 9월 이후 윤식명목사가 모슬포교회에 부임하자 그 순회구역에 편입되었다. 그해 12월에 지명을 따라서 ‘지사포 기도처’로 불렸고, 1918년 봄 교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김기평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곧바로 인근 부락들을 다니면서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전도로 인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고산지방의 첫 신자들이 서관오, 위국진, 추씨산옥 등이었다. 이들은 고산리 2728번지에서 기도처를 마련하여 예배드렸다. 그러다가 70세의 고령에 이른 과부 추씨산옥(秋氏山玉)이 1916년에 초가삼간을 예배당으로 헌납하자 교회는 크게 힘을 얻었다. 이 부분을 《사기》는 이렇게 말한다.


1916년(병진)
제주도 고산리교회 추씨산옥은 70세 노인인데 금 300원으로 예배당을 매수하여
기부하였고 …………7)

고산교회는 이날 1916년 2월 15일을 교회의 설립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또한 1920년에 광주(光州)교회의 성도 박재화 씨가 제주 선교를 위하여 200원을 기부하여 전도인을 파송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파송된 전도인은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고산 지역에서 8명이 결신하게 되었다. 1921년 가을에 1명이 세례를 받고, 7명이 학습을 받아 교회의 뿌리가 내려졌다고 말할 수 있다.
1917년에 이르러 전라노회가 전남노회와 전북노회로 발전 분리되면서 제주도 선교는 산북지방은 전북노회에서, 산남지방은 전남노회에서 맡았으며, 1918년부터 산남지방의 동쪽 여섯 면지역은 황해노회가 맡았다.8) 이즈음에 이기풍 목사의 후임으로 제주도에서 자업 선교에 전념하던 최대진 목사가 1917년 5월에 전라북도 노회로 이전하였다. 대신에 김창국 목사가 부임하여 선교사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에는 대정 지방(산남 서쪽)의 윤식명 목사, 제주 지방(산북)의 김창국 목사, 그리고 정의 지방(산남 동쪽)의 임정찬 목사에 이르는 3명의 목사와 남전도인 최대현, 이재순, 여전도인 이선광 등이 사역하였으며, 1918년부터는 광주에서 파송된 남전도인 원용혁과 여전도인 김경신 등이 협력하여 전도하였다.

제주 행정도


▲ 조선시대


▲ 일제시대(1935년 이전)


▲ 일제시대(1935년 이후)


▲ 1960년


▲ 2006년(제주특별자치도)


1931 제주읍 승격
1955 제주시 승격
1956 서귀, 대정, 한립읍 승격, 한경면 신설
1980 애월, 구좌, 남원, 성산읍 승격
1981 서귀포시 승격(중문면 통합)
1985 조천읍 승격
1986 우도면 신설
2006 제주특별자치도 출범(2행정시 7읍 5면)

​1) 이 도로가 포장되고 확장되기까지 50년 이상 신작로라고 불리며, 제주의 간선도로의 역할을 하였다.
2) 협재교회를 뜻한다.
3)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권, p.171. 濟州島 摹瑟浦敎會가 設立되다. 先是에 老會에서 派送한 傳道牧師 李基豊이 李載淳, 康秉漢, 崔大賢 等과 協力傳道하여 姜興周, 鄭應浩, 申昌浩, 金氏拿嗚 等을 얻고 其後 傳道牧師 尹植明과 傳道人 元容爀, 金敬信 等의 傳道로 李氏華淑, 金氏 順全, 高氏守善과 宋敬瑞, 崔正淑, 高桂炯, 張禮圭, 高訓長의 夫人 等이 信傱하여 申昌浩 家에 會集하여 禮拜하다가 捐補하여 草家 禮拜堂을 建築하니라. 이 글에서 강병한은 강병담을 잘못 기재한 것이다.
4) 제3회 독로회록(1909) pp.12-13.
5) Margaret Best, Brief Notes of Evangelistic Progress in Pyeng Yang during 1910-1911, Korea Mission Field, January 1912, p.30.
6) 김기평의 손자 김광옥 목사가 전하는 이야기도 내용이 비슷하다.
7) 《사기》, 하권, p.180. 추씨산옥이 전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자, 양아들이었던 이천년 씨는 양모를 구타하고 가옥과 집을 파괴하는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8) 전남노회 제2회 회의록: 신좌, 구좌, 동중, 서중, 정의, 우면


2. 산북지방의 선교


1915년 8월 28일 제5회 전라노회(군산 구암교회)에서 “제주 전도목사 이기풍은 성음이 부족하게 되므로 1개년 육지에서 쉬게” 하였다.9) 따라서 산북지방과 이 지방을 대표하는 성내교회는 목회자가 없는 상태로 지내야 했다. 최대진 목사는 1914년 제주도 선교를 떠맡은 전도국장으로 사역하였기 때문에, 아직 노회의 허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업 전도목사’로 자청하여 1915년 9월경에 제주도에서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16년 8월 25일 제6회 노회에서 절차를 거쳐 이기풍 목사의 후임자로 파송되었다. 최대진 목사는 누구인가?


최대진은 1879년 10월 15일 정읍군 덕천면에서 태어났다.……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형 최중진 목사이다. 1899년 개종한 그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전도하여 믿게 하였다. 최대진은 1901년 봄에 세례를 받고 1904년부터 맥쿠첸(L.O. McCutchen)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하였다. 진안, 무주, 장수, 금산, 연산, 고산, 여산 등을 맡았으며, 1908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2년에 제5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김제군 팟정리교회, 구봉리교회를 1914년까지 돌보다가 1914년 10월부터 1915년 8월까지 전남 강진 백양교회와 병영교회를 돌보았다.10)


제주도 선교의 열정을 갖고 1915년 9월부터 ‘자업 전도목사’로 부임한 최대진 목사는 1916년 3월부터 5월까지 70여 일에 걸쳐서 산남지방의 윤식명 목사와 협력하여 제주도 전역에 2천여 권의 쪽복음과 1만여 장의 전도지를 배포하는 등 전도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40여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1년간 자업 전도를 끝냈으나 1916년 8월 제6회 전라노회로부터 또다시 ‘제주도 자업 전도목사’로 임명받았다. 선교비의 부족으로 전라노회가 여전도인의 숫자도 2명에서 1명으로 축소시켜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최대진 목사는 또다시 1년간 제주도 선교를 위하여 ‘자비량 선교’를 선언하였다. 이 부분을 《기독신보》는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최대진 씨는 제주에 1년 동안 계시면서……그곳 인민들의 형편이 불쌍한 것을 잠시도 잊지 못하겠는지라. 크게 자비한 생각으로 1년간 자급생활하자는 것은 식구가 내외뿐이라. 단촐하여 고생 생활하면서도 그 백성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11)


최대진 목사는 1916년 8월 이후 1917년 5월에 이르기까지 자비량 선교사로서 제주도 성내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전념하였다. 이 기간에 최대진 목사는 두 사람의 장로를 임직하였다. 1912년에 노회로부터 허락받고 피택되었던 김재원과, 1915년 노회에서 허락받은 홍순흥 두 사람이었다. 이러한 기쁨의 날을 기다리면서 1917년 3월 20일부터 여전도회 중심의 대사경회와 교회의 전체적인 부흥회를 동시에 실시하였다.

전남 제주군 서문안교회에서 지나간 삼월 이십일 부인 대사경회 겸 부흥회가 개최되었는데 선생은 이기풍 목사 부부와 군산 서부인(서서평, E. J. Shepping)과 광주 서장로(徐路得, M.L. Swinehart) 부인(L. H. Swinehart)과 순천 기 부인(奇安羅, Anna Lou Greer) 제씨요, 오전에는 부인 사경회로 모여 진리를 공부하고, 오후에는 집집마다 다니며 주의 복음을 열심 전파하였고, 밤마다 이기풍 목사의 인도로 부흥회를 열고 10일 동안 여러 가지로 강연할새, 남녀 400여 명씩 모여 진신령한 전도를 열심히 듣는 중에 연약한 형제자매는 굳건한 믿음과 오묘한 진리를 많이 배워
새 술에 취한 듯하며,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던 동포들이 성신의 감동을 입어 믿기로 작정한 자도 수십 명에 달하였고, 더욱 감사한 것은 본 교회 영수로 있던 홍순흥, 김재원 양 씨를 장로 장립 예식을 행하였는데, 교우 다 기쁨으로 영광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더라.12)


그렇다면 제주도의 전도 형편은 어떠하였는가? 최대진 목사가 부임하기 전 1915년 8월 28일 제5회 노회에 보고한 제주도 전도 형편은 “교회당이 3처요, 기도회 처소는 5처요, 교인은 250여 명이요, 금년 세례인은 25인이요, 학습인은 41인이옵니다”라고하였다.
최대진 목사는 제주도 선교에서 산북지방을 맡았지만, 성내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제주도 최초의 두 명의 장로, 김재원과 홍순흥을 장립시키고 제주도 최초의 조직교회를 세우는 공로를 세웠다. 그런데 최대진 목사 본인이 당회장을 맡은 것이 아니라 윤식명 목사를 당회장으로 청빙하였다. 이는 최대진 목사가 머지않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타 교회로 옮길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에 제주도 최초의 조직교회의 당회장이라는 명예를 양보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최대진 목사는 자업 전도와 자비량 전도로 제주도 교회의 발전에 기여하다가 1917년 5월에 전라북도 익산군 신덕리교회로 떠났다. 1917년 8월 24일 제7회 노회에서는 김창국 목사가 제주도 전도목사로 결정되었다.13)

​​9) 전라노회 제5회 회의록.
10) 한인수, 《호남 교회 형성 인물》,pp.77-82.
11) 《기독신보》, 1916년 9월 20일자.
12) 《기독신보》, 1917년 6월 6일.
13) 《사기》, 하권, pp.169-170.


3. 전도사업의 분할


1914년부터 전라노회가 총회로부터 제주도 전도사업을 전담하여 실시하여 오다가 이기풍 목사가 1915년 9월부터 병으로 휴식을 취하게 됨에 따라 산북지방에 선교사가 공석이 되었고, 산남지방의 윤식명 목사만 제주 선교에 전념하게 된 상황에서 1916년 9월에 황해노회가 제주도 선교에 참여할 의사를 밝혀 왔다.14)
이 문제를 숙고하는 중에, 1917년 8월 24일 제7회 전라노회가 회집하였는데 새로운 돌파구가 열렸다. “제주 전도형편 보고회에 목포 무명씨가 제주 전도사업을 위하여 200원을 연보한 사(事)를 이기풍이 설명하매 회중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드니라.”15)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제주 선교사로 김창국 목사를 선임하였다.16) 그리고 10여 일이 지난 1917년 9월 4일 전라노회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임시 노회를 개최하여 전라노회를
전남노회와 전북노회로 양분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산북지방은 전북노회에서 산남지방은 전남노회에서 전담하여 선교를 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황해노회는 한편으로는 전라노회와 협의를 통하여 산남지방에 대한 선교 참여를 논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1917년에 신학 졸업생 임정찬(林貞燦) 목사를 파송하였다. 황해노회는 이렇게 보고한다.


신학 졸업생 9인 중에 1인은 제주 전도목사로 보내고……신학 졸업생 임정찬 씨는 목사 장립하여 제주 전도목사로 파송하였사오며.”17)

임정찬 목사는 성읍리에 자리를 잡고서 선교를 시작하였으며, 황해노회는 전라노회와 지속적으로 협의를 진행하였다.

전남노회는 1917년 9월 17일에 전라노회의 분립에 따라 제1회 설립 노회로 회집함으로써 조직만 다루고 제주 선교의 지속에 대하여는 크게 논의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18년 7월 6일에 제2회로 회집하여 제주 선교에서 황해노회까지 참여시키기로 하고서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제주 전도 구역은 3분하여 제주 동편 신좌, 구좌, 동중, 서중, 정의, 우면 등 6면은 황해노회 전도구로, 목사 김창국의 지방은 전북노회의 부담구역으로, 윤식명 목사의 지방은 전남노회의 부담 구역으로 정하고, 전도비를 잘 수합하기 위하여 본 노회 지방을 3분하여 광주 지방에 250원, 목포 지방에 200원, 순천 지방에 200원 합 650원을 정하고, 광주 부인전도회 금 40원과 회계 잔금 4원 합 44원을 남북노회 전도국이 반분하기로 함을 보고하여 채용되니라.18)


이렇게 전도 구역을 분할하여 확정지었고, 법환리교회는 황해노회 전도 구역에 속하지만 윤식명 목사의 지방에서 보는 것이 지리상 편리하기에 윤식명, 최흥종 양 씨를 위원으로 택하여 황해노회에 교섭하게 하였다.19)
전남노회는 황해노회에게 6개 면을 선교 구역으로 양보하였으나, 전남노회에서 이미 보유하고 있던 건물 등 재산에 대해서도 새롭게 규정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1918년 9월 4일에 3개 노회가 총회에 앞서서 선천북교회당에 모여서 전라남북 노회연합협의회를 구성하고,20) 황해노회에 다음과 같이 청원하였다.


황해노회 청원
1. 본 전도목사는 귀 노회에 이명하여 회원으로 하되 ……
1. 목사의 주택(기지 건물)에 대하여 하시던지 본 전도부가 주관하게 하고, 예배당을 건축하는 시에는 귀 노회에서 주관할사
1. 장래 당회 조직하는 사는 귀 노회에서 주관하되 전도인과 조사 사용하는 것은 본 전도부가 주관하게 함을 청원함.21)


이 결정에 따라 황해노회의 임정찬 목사가 전남노회로 이명하였으며, 전라도에 있는 양 노회는 제주도 선교를 위하여 합동으로 연합집회를 계획하였다. 1918년 3월 9일에서 19일까지 10일 동안 성내교회에서 연합사경회를 실시하였다. 강사는 맥컬리(Henry D. McCallie: 맹현리) 선교사와 목포 양동교회 최병호 장로가 내도하고 김창국, 윤식명, 임정찬 목사도 강사로 참여하여 제주도 교회의 부흥과 새로 시작하는 임정찬 목사의 선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 집회에 대하여 《기독신보》는 크게 보도하였다.


1. 밤마다 강설회를 개최하여……신앙상 기름이 일층 발라졌으며 외인도 믿기로 작정한 이가 많아졌으며
2. 7일 동안 새벽기도회를 열어 임 목사의 인도로……하나님이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가정예배 보기, 담배 끊기, 1년에 한 사람씩 전도하기, 새벽기도 힘쓰기, 연보에 열심하기, 며칠을 전도하기 등

……

4. 중화민국 선교사 사택을 위하여 10원을 연보하고

……
6. 김두봉 씨는……믿음이 타락되고 주일을 폐하여 금번 사경회 교사 제씨의 간절한 권면이 골수를 찌르고 짜내는 듯한 마음에 통회하는 마음으로……그날은 자신의 모친의 환갑이라. 대연을 배설하고 선생과 제직들과 사경회원 일동을 모으고 잔치를 하였사오며……그 후 주일에 상점문을 굳게 닫고 휴업이라 뚜렷이 써붙이고 온 가족과 고용꾼을 다 거느리고 와서 기쁘게 예배 보았사오며…….22)


전남노회에서 황해노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산북지방 동부 6개 면을 할당하여 제주도 선교에 박차를 가하였다. 1918년 9월에는 황해노회 부인전도회가 여전도인 이경신을 파송하여 임정찬 목사의 사역을 돕도록 했다.23)

그러나 황해노회의 선교는 크게 진전을 보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22년에 이르러서는 중단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로써 전남노회는 해당 지역에 대하여 다시 선교의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한편 윤식명 목사의 사역을 말하면서 1921년 6월 제8회 전남노회에서는 “사숙 설립을 위하여 특별위원 3인 택하는 것과 본년 예산은 1천 원으로 정한 것과 강한준의기탁한 기도실 매수하는 일은 윤식명에게 위탁함을 보고하다”24)라고 하였다. 그러나 윤식명 목사는 1921년 10월 14일 전남노회 임시회에서 “윤식명을 전북노회에서 청원하는 것은 허하고 제주 전도사 윤식명의 대(代)에 이경필로 선정하다”25)라고 하였다.

​9) 전라노회 제5회 회의록.
10) 한인수, 《호남 교회 형성 인물》,pp.77-82.
11) 《기독신보》, 1916년 9월 20일자.
12) 《기독신보》, 1917년 6월 6일.
13) 《사기》, 하권, pp.169-170.
14) “동년 9월 5일 평양부 신학교 내에서 개최한 임시노회에서는 황해노회 전도국이 제주에 선교사 1인 파송하기를 원하는 사는 중요한 사인즉 본 노회 전도국에 위임하여 형편을 보아 유익하도록 교섭 처리케 하니라.” 《사기》, 하권, p.168. 황해노회는 민족분단과 교단분열의 어려움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3년에 함남노회와 하나가 되어 함해노회를 이루게 되었다. 《약속의 땅, 벧엘로 올라가자》, 《함해노회 100년사》, 2012,p.56.
15) 《사기》, 하권, p.169.
16) 《사기》, 하권, p.170.
17) 황해노회 제6회 노회록, p.52
18) 《사기》, 하권, p.295.
19) 《사기》, 하권, p.295.
20) 《사기》, 하권, p.296: “협의회 초대 회장에 배유지, 서기에 남궁혁을 선정하다.”
21) 《사기》, 하권, p.296.
​22) 《기독신보》, 1918년 4월 17일자.
23) 《함해노회 100년사》, 2012,p.50.​

제목
#10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9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2.이기풍목사의 활동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8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1.제주선교와 의료봉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7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3.성내교회의 교육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6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1.이기풍목사 입도와 첫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5 1부3장 제주의 신앙선각자들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4 1부2장 성령대부흥운동과 한국선교의 출발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3 1부1장 1907년 이전의 한국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 들어가는 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