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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6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1.이기풍목사 입도와 첫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14, 2016

제4장

제주 교회의 출발


제주도는 선교사들에게 켈파트(Quelpart)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55) 인구 10여 만이 사는 제주도는 전주, 남원, 나주, 제주로 이루어진 전라도의 행정 중심지 4개의 목(牧) 가운데 하나로 많은 정치인들의 유배지였으며, 동시에 많은 인재를 배출해 왔다. 또한 육지와 거리가 있는 관계로 언어, 풍습 등 한국 민속의 보고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전도는 그만큼 어렵고 힘든 과제였다.
1907년 9월에 목사 임직을 받은 7명 가운데서 복음 전도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지역에 가장 억세고 강한 이기풍 목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일곱 목사 가운데 길선주 목사는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송린서, 방기창,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목사는 전도목사로, 이기풍 목사는 ‘선교사’라는 명칭으로 제주도로 파송하였다. 7명 가운데 1명을 제외한 나머지 임직자는 모두 다 전도 혹은 선교에 전념하는 사역이 맡겨졌다. 이들 7명 가운데 길선주, 양전백 두 사람은 담임목사로 평양과 선천에서 뿌리를 든든히 내렸고 방기창, 한석진 등은 각각 중국과 일본 선교사로 떠났다. 따라서 1907년 성령대부흥운동의 결과로 형성된 한국교회를 향하여 ‘사도적 교회’라고 지칭한 것은 적절하다.

 


1. 이기풍 목사의 성장과 소명


이기풍 목사의 출생과 삶 그리고 목회에 대한 기록은 막내딸 이사례 권사의 기록《순교보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기록은 정확하지 못한 부분들도 꽤 있어서 많은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56)


가. 이기풍 목사의 출생


▲ 제주도의 첫 목사 이기풍의 가족 사진

 

이기풍 목사(1868-1942)의 출생일은 《순교보》에 1865년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지금까지 그렇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렇지만 이기풍 목사의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는 족보와 호적 등의 자료는 1868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사례 권사는 이렇게 말한다.


증조 할아버지는 홍경래 난 당시에 세도정치에 불만을 품고 바른 말을 하다가 역적으로 몰리어……구사일생으로 평양성을 빠져나와 황해도 구월산에 피난을 함으로써……조정에서 증조 할아버지에 대한 간섭이 없어지자……할아버지는 힘없이 가족들을 이끌고 다시 평양으로 되돌아와농민으로 행세하면서 동대문 밖에 자리를 잡게되었다.57)

이사례 권사는 증조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동시에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하 였던 이유도 밝히지 않았지만, 이기풍 목사가 친필로 쓴 가족의 족보는 이렇게 말하 고 있다.

 

할아버지는 무관 출신으로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한 이춘배(李春培)이며, 이춘배는 아들 셋(京鎭, 濟鎭, 在鎭)을 두었으며, 둘째 제진은 외아들 기풍(基豊)을 두었다.


이 기록을 통하여 이기풍 목사의 가문은 무관 집안으로서 할아버지는 정3품에 속하는 오위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난에 참여함으로써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하였다.

이사례는 아버지의 생년월일을 1865년 12월 23일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렇지만 이기풍 목사의 호적과 관계된 제반 자료들을 종합하면 1868년 11월 21일이라고 추정된다.

첫째, 호적은 명치 원년(1868년) 11월 21일이라고 밝히며, 아버지는 이제진, 어머니는 김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이기풍 목사는 회갑기념예배를 1928년 제주도 성내 교회에서 거행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에 1928년이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셋째, 《한국교회 희년 기념 설교집》에 이기풍 목사의 설교도 실려 있는데, 이 기풍 목사의 약사를 기록하면서 1868년 평양부 순영리 출생이라고 썼다.

이상의 자료들을 통하여 우리는 이기풍 목사는 아버지가 이제진이고, 어머니가 김씨이며, 1869년 11월 21일 평양부 순영리에서 태어났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55)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1630년에 동아시아 지역을 운항하는 배를 건조하고 그 배의 이름을 켈파트 드브 락(t’ Galjodt Quelpart)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이 배가 일본으로 가다가 1642년에 제주도를 발견하고서 제주 도를 배의 이름을 따서 Quelpart라고 하였다. 그 후 하멜이 1653년에 8월 18일 제주도에 도착하여 해도에나 오는 좌표와 일치하는 것을 알았으며, 나중에 하멜이 자신의 표류기에 제주도를 Quelpart라고 기록함으로써 17세기 중반 이후로 서양인들에게는 제주도가 Quelpart로 알려지게 되었다(제주도, 제주도지 제2권, 제주: 제 주도지편찬위원회, 2006, pp.427-428).

56) 이기풍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글을 참조하라. 차종순, “이기풍 목사의 생애와 사역”, 《신학이해》15 (1997)

57) 이사례, 《순교보》, 서울: 교문사, 1991, pp.27-28.

 


나. 개종 이전의 직업

 

이기풍의 개종 이전의 직업에 대해 흔히 ‘석전 패거리의 우두머리’ 혹은 깡패 등으로 표현되어, 일정한 직업 없이 한량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알려져 왔다. 이만열 교수는 이기풍의 개종 이전의 직업에 대해 마펫(Samuel A. Moffet)의 글을 인용하였다.


이기풍은 1891년 평양 거리에서 나에게 돌을 던지며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때에 영문의 아전(衙前)이었는데 원산으로 이사 가서 회개하고 1896년에 세례를 받았다.58)


마펫 목사는 이 부분을 보다 더 상세하게 정리하였다. 1936년에 마펫 선교사가 은퇴하여 한국을 떠난 다음에 미국에서 자신의 선교사 생활을 정리하여 ‘초기 시절’(Early Days)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다.


1891-1893년 사이에 저자, 게일, 홀 그리고 리 등은 평양에 선교부를 개설할 목적으로 평양과 의주를 연속적으로 방문하였다. 1893년 봄에 리와 나는 토지를 샀으며, 지금은 여자성경학교로 쓰이고 있다. 이것이 공직자들 사이에 대혼란을 야기시켰으며, 사람들을 충동시켜 우리를 쫓아내기 위한 명령을 분명히 내린 것으로 알 수 있다……그날 아침에 우리는 서문통으로 들어갈 때 경찰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 였으며……그렇지만 우리에게 돌팔매질을 한 경찰 가운데 한 사람 …… 이기풍은 후일에 한국의 최초의 목사 임직을 받고 또한 최초로 선교사가 되어 제주도로 갔으며, 그곳에서 돌팔매질을 당하고 죽이겠다는 위협을 당하였다.59)

 

이상의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이기풍 목사는 1891년 이전부터 평양성 영문의 포졸(police)이라는 하위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출생이 1868년이므로 당시의 관례에 따라 15~16세 즈음에 결혼하여 20세 즈음부터 포졸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마펫 목사는 1890년 1월 한국에 도착한 이래 평양을 선교지로 정하고서 1890년 8월에 그리고 1891년 봄에 방문하여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였으며, 1892년 가을에 는 선교부 후보지로 최종 결정을 내린 후 1893년에 평양성에서 땅을 매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을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1890년에 이르기까지 평양은 개신교 선교사가 단 두 번 방문하여 책을 전하였으나 개종자는 없었다.……1890년 8월 마펫이 가서 2주간 머물렀다. 그 다음해(1891년) 봄에 다시 찾았으며 5일간 있었다.……1892년 가을에 평양을 영구적인 선교부로 결정하고서, 그 다음해(1893년)에 마펫과 Mr. 리가 정착하기 위하여 찾아갔다. 2 월에 토지를 구매했으며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즈음 해서 사람들은 처음보다 훨씬 더 친근했으나 지방관과 외국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쫓아내기 위한 본격적인 물밑 작업을 진행하였다.60)


따라서 이기풍이 마펫 목사에게 돌을 던지면서 난동을 부린 연도는 1893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풍은 개종 이전에 당시로서는 하위직이라 할 수 있는 포졸직을 맡은데 대한 울분이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울분 혹은 불만이 가끔씩 과격한 행동으로 표출됨 으로써 ‘깡패’ 집단의 우두머리로 알려지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58) 이만열, “이기풍의 행적”, 《순교보》, p.267.

59) Samuel A. Moffet, Early Days, Part I, The Korea Mission Field, January 1936, p.4.

60) Rev. H. Loomis, “Mission Work in Pyeng Yang, Korea”, The Missionary, May 1897, pp.211-216.

 

다. 백범 김구와의 교유


이상 언급한 문제점들 이외에도 이기풍 목사의 삶에서 해결되어야 할 부분은 세례 일, 그리고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을 하였던 일 등이 있다.61) 이기풍은 1895년에 원산에 서 스월른(W.L. Swallen) 선교사의 노방전도를 통하여 기독교에 입문하여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96년에 세례를 받고, 곧바로 스월른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원산 지방의 여러 교회를 개척하는 등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898년에 미국 북장로교 한국선교회가 원산 지방을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에 넘겨주었다. 스월른 목사와 그의 한국인 협력자 이기풍 조사는 1899년부터 황해도 지방에서 선교하였다. 이기풍과 김구 선생의 만남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1942년 순교시까지 때때로 지원하였다고 한다.

 

61) 다음 글을 참조하라. 차종순 “이기풍 목사의 생애와 사역”, 《신학이해》, 15 (1997)

 


2. 제주도 입도와 제주의 첫 교회

 

이기풍 목사와 제주도 선교와 관계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일은 제주도 입도일과 제주도 첫 교회 설립에 관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다양하게 제시되었다.62) 

 

 

가. 제주도 입도 과정

 

지금까지 제주도 교계에서 일고 있는 제주도 첫 교회에 관한 논란은, 성안교회가 1984년에 교회 설립 75주년을 맞이하여 세운 ‘선교기념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기념비는 이사례 권사의 증언과 제주 성안교회 교우들의 증언을 토대로 건립된 듯이 보인다. 그 ‘선교기념비’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선교기념비

하나님께서 한반도 남쪽 아름다운 섬 제주도를 주셨다. 조상 대대로 바다와 하늘밖에 모르며 미신 속에 살아온 이 섬에 복음의 빛을 비추시려고 한 아기를 주셨으니 그가 1865년 12월 23일 평양성 대동문 밖에서 태어난 이기풍이다. 1884년 19세에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7년 9월 17일 졸업과 동시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은 7인 중 한 사람이다……1907년 겨울 그는 독노회의 명을 받고 추위를 무릅쓰고 가족과 함께 절해의 고도 제주도를 향하여 인천항을 출항하였으나……1908년 정월 그는 제주도 산지포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니……1908년 2월 1일 향교골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하니 이것이 이 땅의 첫 교회인 제주 성내교회가 탄생 하게 된 것이다.

주후 1984년 2월 1일 교회 창립 75주년을 맞으면서 제주 성안교회 교우 일동


이 글에는 이기풍 목사의 출생일과 수세일, 평양신학교 입학일, 제주도로 출발하며 도착하는 과정, 제주도에서 첫 예배를 드리기까지의 경과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이제 하나씩 문제를 풀어 보려고 한다.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입도일은 언제인가? 위의 기념비에서는 “1907년에 인천항을 출항하여 1908년 정월에 제주도 산지포에 도착하여”라고 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이기풍 목사는 1908년 1월 17일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7일간 서울에 있는 여러 교회에서 설교하다가 1908년 1월 24일 제물포행 기차에 올랐다. 이 부분을 《예수교회보》는 이렇게 전한다.


리 목사가 제주로 발정함

평양노회에서 택정한 제주 선교사 이기풍씨는 평양서 기차로 발정하여 제주도로 가는 길에 그의 부인과 조사 일인을 거느리고 본월 십칠 일에 남대문 밖 정거장에 도착 하매 연동, 승동, 새문안 각 교회 교우들이 정거장까지 나아가 환영하고 승동교회에서 유하다가 24일에 발정하였으니 수륙 원로에 태평히 도달하기를 축사하오며, 그곳 어두운 백성을 밝은 길로 인도하여 교회가 날로 흥왕하기를 간절히 간구하나이다.63)

 

위 신문의 보도를 통하여 우리는 이기풍 목사가 1908년 1월 17일까지 평양에 기거 하였으며, 1월 17일에 가족과 조사 한 사람을 대동하고 평양 기차역을 출발하여 서울 역에 도착하였으며, 승동, 연동, 새문안 교회 교우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후, 승동교회에서 7일간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이기풍 목사 일행은 1908년 1월 24일에 기차로 제물포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선편으로 목포에 갔다.64) 왜 목포로 갔을까? 제주까지 연결되는 선편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목포 선교부의 프레스턴(John F. Preston: 변요한) 선교사를 만나기 위한 것으로 보인 다. 그는 이기풍을 가르친 교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당시 목포 선교부의 선임 선교사 였다. 이즈음에 목포 선교부는 문을 닫았다가(1905년 11월부터 1907년 9월까지) 다시 문을 열고서 목포 양동교회를 중심으로 성령대부흥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레스턴 선교사는 이기풍 목사를 초청하여 목포 교회의 부흥을 꾀하였던 것이다.


지역 교회(목포 교회)는 제주로 가는 국내 선교사 이기풍 목사가 1월에 행한 한 주간의 복음적 집회를 통하여 크게 새롭게 되었다.65)


프레스턴 선교사는 1908년 2월 1일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일주일간의 집회”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기풍 목사는 1908년 1월 24일 선편으로 목포에 도착하여 1월 25일부터 31일까지 한 주간 집회를 인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회가 끝난 다음에 이기풍 목사는 1908년 2월 2일이 음력 설날이기 때문에 한 주간 동안 목포에서 새해를 맞이하면서 조용하게 지냈다. 그리고 이어서 1908년 2월 에 6일부터 광주에서 실시하는 훈련반에서 강의하였다.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한다.


지도자반(훈련반)

훈련반 (1) 선교학교와 훈련반을 위한 커리큘럼을 준비하기로 한다.

시기 (2) 군산 선교부는 1월 16일부터 2주간 지속하고, 광주 선교부는 2월 6일부터 2주간 지속하기로 한다.

교사 (3) 광주 훈련반은 그곳 선교부 인원들이 해리슨의 지원을 받아 지도한다. 그 를 대신할 경우에는 전주 선교부에서 보낸다.66)


이상의 내용을 볼 때, 광주 선교부의 훈련반은 음력 설날을 보내고 4일이 지난 1908 년 2월 6일부터 14일간 진행하였으며, 이기풍 목사는 필시 해리슨 선교사 대신으로 목 포 선교부의 추천과 광주 선교부의 요청으로 강사로 초청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기 풍 목사가 광주 훈련반에서 강의하였다는 내용이 1908년 9월에 회집한 연례대회에서 이렇게 보고되었다.


성경학교는 두 종류가 있다.……첫 번째는 2월에 남자반으로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370여 명이 참석하였으며 4개 반으로 나누었다. 이 성경공부반은 제주로 가는 국내 선교사 이기풍씨의 도움을 받았다. 이기풍씨는 우리에게 강력한 복음적 설교를 매일같이 주었다.67)

 

이기풍 목사가 광주 선교부의 훈련반에서 “매일같이 복음적 설교를 행하였다”라고 보고한 내용을 토대로 할 때, 그는 1908년 2월 6일부터 14일 동안, 즉 2월 20일까지 설교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기풍 목사가 서둘러 제주도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였다 할지라도 그 날짜는 1908년 2월 20일부터 25일 사이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 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로 향하는 선편은 1906년 11월부터 정기적으로 취항하던 제주-목포 정기 여객선 낏쑈마루(吉祥 1丸)이며, 이 배는 75톤급의 윤선으로 일등실이 6엔, 이등실이 3엔이며, 매월 3회 운항하였다.68) 그리고 이 배로 목포에서 제주도에 당도하는 운항시간은 하루 정도였으나, 운항 중 풍랑을 만나서 추자도에서 잠시 체류하였기 때문에, 이기풍 목사는 1908년 2월 말 혹은 3월 초에 제주도 산지포 항에 도착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 제주도에서 육지로 전보를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무선통신이 가설되어 있지 않았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에서 목포로 가는 인편에 제주도 도착 소식을 전 하게 되었으며, 목포의 가족은 44일 만에 인편으로 “무사 도착”이라는 소식을 전달받 을 수 있었다.69) 따라서 목포의 가족들이 이 소식을 접한 날짜는 1908년 4월 5일로부터 10일 사이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제주 성안교회의 ‘선교기념비’에서 “1907년 겨울 그는 독노회의 명을 받고 추위를 무릅쓰고 가족과 함께 절해의 고도 제주도를 향하여 인천항을 출항하였으 나……1908년 정월 그는 제주도 산지포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니……”라 고 기록한 내용은 대폭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62) 역사를 다루면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첫째, 역사는 한두 사람 혹은 교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역사는 모든 장벽을 넘어서서 논의되어야 한다. 셋째, 역사는 나의 견해와 다를지라도 보다 더 명확한 자료로 반론하기 전에는 인정해야 한다. 넷째, 역사는 명확한 자료들의 상호 비교(교차 비교)를 통하여 보다 더 명확해질 때까지 하나의 주장에 매달리지 않아야 한다.  

63) 《예수교회보》, 1908년 1월 29일자.

64) 호남선 철도는 1911년부터 개설되기 시작하여 1914년 1월 11일에 완전 개통되었 다. 참고, 니스벳/한인수, 《호남선교 초기역사》(1892-1919), p.137.?

65) John F. Preston, Letter to Mother and Father, February 1, 1908.

66) Minutes of Sixteenth Annual Meeting, September 3-7, 21-26, 1907, p.22.
67) Station Reports to the Seventeenth Annual Meeting, September 17-23, 1908. Kwangju Station Report, p.21.

68) 고창석, 강만생, 박찬식, 《제주사 연표 I》, p.340.

69) 1902년 5월 22일에 제주도에 제주우체사를 설치하기 위하여 주사 신태영을 발령하였으며, 1903년 8월 15 일에 제주목에 제주우체사를 개국하였다. 1903년 8월 24일에는 제주우체사에 정원 10명(일급 체부 1명, 2급 체부 2인, 3급 체부 7인)이 근무하기 시작하였으며, 동년 9월 1일에는 제주우편취급소로 개칭되었다(고창석, 강만생, 박찬식, 《제주사 연표 I》, 제주: 2005, pp.322-329). 제주도의 한글 전보 취급 업무는 1911년 7월 1일 부터 시작되었다(제주사 연표 I, p.358).

나. 제주의 첫 교회

 

제주 최초의 교회는 어느 교회인가? 이 논란의 시작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권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사기를 기술하기로 하고서 각 노회에 사기 집필위원을 선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전남노회는 1918년 7월 6일 제2회 노회에서 이렇게 결정하였다.


교회 사기 수집 위원 배유지, 변창연, 이기풍, 변약한을 선정하다.70)


이렇게 수집된 사료들을 중심으로 총회의 사기 집필위원들이 편찬하여 1928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를 발행하였다. 이 책은 사학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 편찬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허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후대의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일단 그 기록을 중시하고 문제가 된 점이 있을 때에는 오늘날에 확 보된 추가적인 사료들과 교차 비교함으로써 수정된 견해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사기》는 금성교회의 설립에 대하여 1908년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 금성리교회가 성립하다. 독로회 설립 당시에 파송한 전도목사 이기풍과 매서인 등의 전도를 인하여 조봉호, 이도종, 김씨진실, 조운길, 양석봉, 이씨오효, 이씨자효, 김씨도전, 김씨유승, 좌징수, 이의종이 귀도하야 조봉호 가에서 회집 기도하다가 이덕년 가를 예배처소로 작정하니라.71)


이어서 1909년에 조천교회가 성립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제주도 조천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노회에서 파송한 전도사 이기풍의 전도로 천씨아나가 먼저 믿고 신자가 증가함으로 천씨는 자택을 예배당으로 기부하여 교회를 설립하니라.72) 

그리고 1910년 편에서 성내교회의 설립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 성내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 이기풍이 당지에 내하여 산지포에서 전도할새 경성에서 기류할 시에 수세한 김재원을 봉착하여 협력전도한 결과 홍순흥, 김행권 등이 귀주함으로 기도회를 시작하였고 일덕리 중인문 내에 초옥을 매수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전도인 김홍련, 이선광 등이 전도에 노력하니라.73)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제주에서 1908년에 금성교회, 1909년에 조천교회, 1910년 성내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고려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사기》에서 1908년 ‘교육’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제주도 성내교회에서도 남녀 소학교를 설립하여 자녀를 교육하니라.74)


이로써 성내교회가 예배당으로서 터를 잡기 전에 먼저 아동교육을 시작하였다고 판단된다. 3월 말 혹은 4월 초순에 이기풍 목사의 부인 윤함애가 가족과 함께 도착하면서, 교육선교 사역이 출발하였을 것이다. 단지, 그 교육의 주체를 “이기풍과 윤함애” 등 사역자들의 이름을 열거하기를 주저하여, 대신 성내교회라고 소급하여 표현하였을 뿐이다. 제주도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제주도의 아동들을 모아 남녀반으로 나눈 후 남자반은 이기풍, 김재원, 홍순흥, 김행권, 김홍련 등이 맡아서 가르치고, 여자반은 윤함애가 맡아서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인용한 대로 1908년 교육 부분에서 위의 보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성내교회는 1917년에 장로를 임직하고 당회를 조직하면서 교회의 시초에 대하여 기록을 남겼다. 아래는 <졔주성내서문내교회 당회서문>의 첫 부분이다.


일천구백팔년 2월부터 졔쥬교회가 시쟉되야 졈졈 흥왕호논 중에 젼라로회에서 졔쥬 셔문내교회당회를 죠직호라논 승인을 가지고 일천구백십칠년 4월 1일에 젼라로회 시챨원 윤식명 남대리 리긔풍 3시가 졔주셔문내 례뵈당에 새 쟝로쟝립예식을 거행호고……75)


‘1908년에 제주교회가 시작되었다’는 표현은 제주지역 선교의 출발 시점을 1908년 으로 기록하는 이상의 뜻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 제주교회를 성내교회로 국한하여 읽는 것은 적절한 이해가 아니다.76) 성내교회는 분명히 구분하여 서문내교회로 적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이기풍 목사의 ‘교회 설립’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일이다. 독립적인 예배공간을 확보하고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고 회중이 모일 수 있을 때, 그는 교회가 성립했다고 표현한다.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새롭게 신자들이 생긴다 하더라도, 예배당 혹은 기도처소가 아직 마련되지 못했다면 이는 교회가 아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1908년 의 성내교회는 아직 교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김재원과 이호리공동체가 성내교회로 편입되고 교회활동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기풍은 그들의 자생적인 신앙공동체 성장을 자신의 사역의 성과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사기》는 교회사를 선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 제한점을 갖고 있다. 선교를 통해 교회가 확장되어 가는 역사와 더불어, 자발적으로 신앙에 입문하거나 교회의 주역으로 성장하는 사실을 아우르는 교회 사 서술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에서 종래의 모교회 중심의 선교자료나 교회사 서술은 적절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아래의 표에서 맨 왼쪽의 창립연대는 각 교회의 성립 연대를 추정 그리고 제시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는 연대들을 비교할 수 있도록 병행하여 정리하였다. 지교회에서 기억 혹은 기록하는 교회의 출발점은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계산될 수 있다. 사역자의 파송 혹은 부임, 첫 결신자 및 세례 혹은 임직, 교회 예배 공간의 확보 혹은 건축 등 매우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다.


《사기》의 입장은 마지막의 교회 건물 혹은 예배 공간 확보라는 기준이 최우선으로 적용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교회 개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희망적인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교회의 으뜸 기능은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로서, 신자로서의 삶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당 지역의 공공 예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이후 정기적인 예배가 꾸준히 지속되었는지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하여서 창립 연대를 정한 것이다. 참여 인원이나 연령 층에 상관없이 그 예배가 면면히 이어져서 오늘에 이른다면 교회의 출발로 보려는 입장이다. 물론, 현행 교회법에 따른 교회의 창립과 설립의 기준과는 다른 의미에서,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교회를 이해하는 것이 적합다고 본다.

70) 한국장로교회 《사기》, 하권, p.295.

71) 《사기》, 상권, pp.265-266: “濟州島 錦城里敎會가 成立하다. 獨老會 設立 當時에 派送한 傳道牧師 李 基豊과 賣書人 金在元 等의 傳道를 因하야 趙鳳浩 李道宗 金氏眞實 趙云吉 梁石峰 李氏昊孝 李氏慈孝 金氏 道田 金氏有承 左澄洙 李義宗이 歸道하야 趙鳳浩 家에 會集 祈禱하다가 李德年 家를 禮拜 處所로 作定하니 라.”

72) 《사기》, 상권, pp.268-269: “濟州島 朝天里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老會에셔 派送한 傳道師 李基豊의

傳道로 千氏亞拿가 몬저 밋고 信者가 增加함으로 千氏난 自宅을 禮拜堂으로 寄附하야 敎會를 設立하니라.” 73) 《사기》, 상권, pp.274: “濟州島 城內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老會에셔 派送한 牧師 李基豊이 當地에 來

하야 山地浦에셔 傳道할새 京城에 寄留할 時에 受洗한 金在元을 逢着하야 協力 傳道한 結果 洪淳興 金行權 等이歸主함으로 祈禱會를 始作하얏고 一德里 重仁門 內에 草屋을 買收하야 禮拜堂으로 使用하고 傳道人 金弘連李善光 等이 傳道에 努力하니라.”

74) 《사기》, 상권, pp.277-278: “濟州島 城內敎會에셔도 男女 小學校를 設立하야 子女를 敎育하니라.” 

75) 《제주성내교회 100년사》, 2008, p.107; 한국교회 첫 선교지, 살리는 공동체 100년, 제주성안교회 100년사,2010, p.110.

76) 제주성내교회, 제주성안교회는 100년사를 편찬하면서, 이 제주교회 부분을 성내교회라고 주장하였다. 이 기록을 남길 당시 당회장 윤식명 목사는 성내교회 사역을 시작하는 단계였으며, 당회 서기는 김재원 장로였다. 

제목
#10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9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2.이기풍목사의 활동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8 1부5장 제주선교의 확산 -1.제주선교와 의료봉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7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3.성내교회의 교육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6 1부4장 제주교회의 출발 -1.이기풍목사 입도와 첫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5 1부3장 제주의 신앙선각자들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4 1부2장 성령대부흥운동과 한국선교의 출발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3 1부1장 1907년 이전의 한국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 들어가는 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 인사말 및 편집자의글(김인주목사)등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