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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24, 2016

 

제3장

제주노회의발전


1. 전도대회 개최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결성되고, 이어서 1927년에 신간회가 결성되는 등 좌우사상의 대결이 일기 시작하였다. 세계선교사협의회(IMC)는 1928년에 예루살렘에서 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피선교지의 상황을 살펴보았으며, 한국에 대하여 ‘극도로 가난한 나라’(extremely poor country)라고 하였다.

일제는 1931년에 만주에 마지막 청 황제를 이용하여 괴뢰 만주국을 설립한 뒤 한국을 병참기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일제는 1925년 서울 남산에 신사 본궁을 세운 다음에 전국의 주요 도회지에도 지방 신사를 세웠으며, 1933년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내의 상황이 이렇게 어려워질 무렵에 미국은 1929년부터 경제대공황을 맞이 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미국 교회의 지원도 그만큼 급감하였다. 미국 남장로교 해외 선교국도 한국에 대한 선교비를 30% 감축하여 각 선교부는 긴축하여 재정을 운영하여야 하였다. 이 시기의 어려움에 대하여 1931년 6월 10일에 회집한 제2회 제주노회는 이렇게 결정한다.

제주노회 제2회 촬요
1. 지역상 관계로 부득이 노회는 조직되었으나 심히 미약함으로 전라 미순회에 선교사 1인을 파송하여 제반 사업을 방조하여 달라고 청원하기로 함.
1. 노회 존폐 관계가 유(有)함으로 총회에 애원하여 년 백 원 금 기년(幾年)간 계속보조토록 하기로 함.17)

이 노회록에서 말하듯이 제주노회의 설립은 ‘지역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부득이 조직될 수밖에 없었으나, 재정적으로 너무나 미약하여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에서 선교사 1명을 제주도에 파송하여 제반 사업에 재정적으로 지원해 줄 것을 부탁하기로 하였다. 이에 더 나아가서 총회 앞으로는 노회의 존폐가 담긴 상황이므로 매년 백 원씩 수년간 보조해 줄 것을 청원하기로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어려워졌다면 당연히 교회의 형편도 어려워져야 할 터인데 제주도의 교회는 오히려 부흥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당시에 춘기 대부흥성회를 가지는 것이 한국교회에는 상례였지만, 제주도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1930년 3월 10일부터 제주도 면려청년회에서 조직한 ‘제주연합전도대’가 신창교회(두모교회)를 필두로 제주도 전역에서 전도대회를 개최하여 일반인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강사로는 김영식 목사, 김재선 목사 그리고 김구숙, 한림유, 김현철 등이 수고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여름에 또다시 있었다. 그동안 광주 지역에서 적잖은 은혜의 바람을 일으킨 서울의 주정국을 초청하여 6월에 제주도 전역에서 부흥집회를 개최하였다.

광주군 내 네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경성 계신 주정국(朱偵國) 선생이 6월 10일에 입도하여 고산, 신창, 모슬포, 협재, 한림, 성내 6처 교회에서 일삭간 간절한 설교와 권면이 매야에 모이는 청중과 매일 새벽기도에 모이는 청중에게 감동을 주어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도 많고 신입자는 불소하고 성신의 은사를 여러 방면으로 나눠 주었고 제주도를 일주할 예정이라더라.18)

주정국은 한 달간 주로 제주도의 서쪽지역에서 부흥회를 개최하여 많은 사람을 개종시키고 떠남으로써 제주도 교회가 부흥의 길로 들어섰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선교비의 삭감과 선교사들로부터 오는 지원의 감소가 제주도 교회들에게는 영적 각성의 기회가 되었다. 여기에 곁들여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영적인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이었기 때문에 동시에 영적인 각성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주도 교회는 영적인 무장으로 시대적인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하였으며, 그 결과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의 통계는 다음과 같다.


1931년부터 1939년 사이에 목사와 장로의 숫자는 변화가 없었으나 세례교인의 숫자는 47% 부흥하였으며, 교인의 총계는 95% 부흥하였다. 그렇다면 부흥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첫 번째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1930년대에 일기 시작한 제주도 도민들과 교인들의 영적 각성이었다.

두 번째는, 이렇게 제주도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자 미국 남장로교 5개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 합동으로 제주도에서 선교대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세 번째는, 소수의 목회자들이 영적으로 분발하여 제주도 복음화에 적극성을 보였다. 특히 정순모 목사와 이도종 목사의 활동을 말할 수 있다.

2.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의 지원
제주노회의 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는 형편에서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와 소속 선교사들의 인정에 호소할 뿐이었다.

이러한 판단 아래 제주노회는 선교사 1명을 파송하여 줄 것을 청원하였으나,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회도 재정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1933년부터 1938년까지 스위코드(D.A. Swicord: 서국태), 탈마지(J.V.N. Talmage: 타마자), 크레인(J.C. Crane: 구례인) 선교사를 제주노회 방조위원으로 임명하여 제주도 교회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한편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연례 계획에 따라 각 선교부별로 제주도에서 각종 집회를 지속하여 왔으며, 1931년 5월에는 목포의 마틴 선교사가 방문하여 성내교회를 중심으로 집회를 가졌다. 이 부분을 《기독신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전라남북도 미순회에서 해마다 선교부인 한 사람씩 택하여 제주에 보내어 대사경회를 도와주는 일이 있었는데, 목포 계신 마율리 부인께서 남녀 전도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4월 16일부터 23일까지……오전은 공부하고 오후에는 전도와 심방과 낙심한 교인을 찾아 권면하고 밤이면 전도 강연회로 모여 마 부인과 같이 온 21세되는 전도인 윤치호 씨의 열렬한 강연에 청중이 큰 감동을 받았으며……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수십 명이요, 7처 교회가 많은 은혜를 받았다 한다.19)

한편 전북노회는 1930년부터 제주도 선교를 중단하고 충청도 선교에 집중하기로 하였으나,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여전히 제주도 선교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전라북도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을 포함한 전도대원 13명은 1933년 4월 5일부터 13일까지 제주노회와 협력하여 성내교회에서 도제직회를 개최하고, 이어서 제주도 전역에 산재한 교회에서 동시적으로 부흥 전도집회를 개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참여한 교회와 부흥강사는 다음과 같다.




이상귀 목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집회는 제주노회와 도제직회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행사로 5~6개월에 걸친 준비 기간을 가진 행사였다. 일행은 전주→ 신태인→ 목포에 당도하였다. 제주도에서 다년간 목회하였던 김영식 목사가 찾아와 목포 시내를 관람시켜 주기도 하였다.20)

전도단 일행은 저녁 7시에 태서환(太西丸)이란 기선에 승선하여 파도에 시달리면서 다음날 새벽 3시에 산지포항에 도착하였으나 성내교회 교우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하선하였다. 이로 보건대 목포와 제주 사이의 뱃길은 8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이상귀 목사는 고산교회를 맡았기 때문에 자동차로 이동하여 부흥회를 이끌었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고산은 성내에서 120리 되는 곳인데, 700여 호나 되는 큰 부락이며 일본으로 직항하는 복목환(伏木丸) 등의 큰 기선이 닿는 좋은 포구이다. 이 고산교회는 작년까지 조상학 목사가 시무하였고, 현재는 임경순 전도사가 시무하고 있다. 나는 강홍섭 장로 댁에 있게 되었는데 강 장로 부인은 요리에 유명한 부인이라……대변을 하는데 대단히 불편하였다. 고산은 반기독교자들이 많아서……좀 염려하였는데……새로 믿기로 작정한 자가 27인이며 끝나는 날에는 기념사진까지 촬영하고……제주도인은 대단히 검소하고 또 부지런하다.……제주도에는 걸인과 도적이 없다.……제주도 교회는 일반적으로 약하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18처에 있는데 교역자는 겨우 목사 3인 전도사가 2인 뿐이니…….21)


이 집회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지난 1933년 2월 제주 성내교회에서 조직한 제주도교회 연합제직회가 스위코드 선교사의 주선으로 4월 12일 제주도 연합제직회의 조직을 완성하였는데, 회장은 정태인 목사, 서기는 고영흥 장로, 부서기는 김계공 장로, 규칙제정위원은 정태인, 김재선, 허성재 씨가 맡았다.22)
이 전도집회에는 여행경비만 하더라도 250원이 소요되었는데, 이를 감당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을 포함한 윤동석 장로와 이경로 집사 등 여러 사람들이 협력하였다. 이당시 물가가 쌀 한 가마에 6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큰 금액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라북도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전도집회가 1933년 4월에 있었고, 여름철인 8월에는 광주 선교부의 서서평 선교사(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가 여성들을 중심으로 전도집회를 가졌다. 서서평 선교사는 1933년 8월에 성내교회 기독청년회 초청으로 엄현숙 선생과 함께 제주도를 방문하여 8월 2일부터 8일까지 금주와 금연에 대하여 그리고 공중보건과 위생에 대한 특강을 실시하고, 8월 11일부터 25일까지 여름성경학교까지 겸하여 실시하였다. 이 시기에 실시한 강의에 대하여 서서평 선교사는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공중보건에 관한 강의를 하고, 육아법, 질병 예방법, 가정 청결법을가르쳐 주었다.23)


서서평 선교사와 엄현숙 선생의 활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제주도 내 ‘부인조력회’(Women’s Auxiliary Conference, 여전도회 연합회)를 조직하여, 연합회 총대로는 홍순희, 강형신, 한신귀, 장돈필을 선출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을 전개한 배경은 이러하다. 일제는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한국인들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술과 담배를 보급시켜 나갔다. 조선의 향촌 구조에서는 향촌의 자율적인 방침에 따라 주점을 개설하고 운영하는 것이 지역주민들의 동의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강제 합병 이후에는 상업적 차원에서 술집 개업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방침이 바뀜에 따라 술과 담배 소비는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했다. 1917년에는 술과 담배가 세수 총액의 11.49%이었으나 1919년에는 33.1% 그리고 1920년에는 39.98%, 1921년에는 34.52%로 증대되었다. 이와 더불어 한국인들 사이에서 술과 담배가 국민건강을 해친다는 인식이 확대되어 갔으며,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기독교적 윤리에 따라 이를 자제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1928년 1월 21일자 《기독신보》는 금주에 관하여 이렇게 주장하였다.


조선에서 금주할 이유
조선에서 일 년간 소비되는 술값이 78,627,446원이요
조선에서 일 년간 소비되는 담배 값이 25,266,388원이요
그러면 조선 안에서 술 담배로 소비되는 돈이 총합 103,893,834원이요동포여! 생각하라! 당면의 대문제는 그 무엇!
우리는 왜?
광선과 공기가 잘 통하지 못하는 움막에 사는가?
해마다 소비되는 술 담배 값만으로도 백 평 되는 집터를 사서 열 칸 기와집을 짓는다면 일 년에 94,448채를 지을 수 있다.
30년 후면!
우리 조선인 가정마다 이런 기와집에서 살 수 있다.
우리는 왜?
해마다 고국을 떠나 외지에 유리방황하는가?
일 년간 소비되는 술 담배 값만 가지고 519,469인의 일 년간 생활비가 된다.우리가 일년간 술 담배만 금한다면 우리 동포의 생활난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남과 같이 자녀교육을 못 시키는가?
일 년간 소비되는 술 담배 값만 가지고도 800개소의 소학교 600개소의 고등학교를 우리의 사상 우리의 힘으로 능히 경영하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자! 동포여! 우리의 당면한 대문제를 해결함이오직 금주 단연함에 있는 것이다.24)


금주단연운동은 곧바로 공창폐지운동으로 이어졌다. 《기독신보》의 편집은 술, 담배, 아편, 색은 하나의 동일선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술과 색은 먼저 담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요, 그로부터 아편까지도 먹게 되는 것이며 동시에 수음, 남색, 창기 집 출입 등 모든 성적 죄악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금주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으로는 단지 술만 상대로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술과 관련되는 담배, 술 담배와 관련되는 수음, 수음과 관련되는 남색, 남색과 관련되는 예창기, 예창기와 관련되는 아편 등의 모든 해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
면 아니 될 것이다.……그러면 이를 어찌하여야 될까. 이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다.

첫째로는, 우리의 믿는 기독교의 도리에 의하여 개인의 도덕관념을 고상케 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정을 청결히 하고 자녀를 위하여 남녀의 도덕을 존중히 하여 나가면 이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둘째로는, 이런 해독을 깨달은 인사들이 정신상과 물질상으로 이런 사회의 해독과 건전하게 싸워나갈 것이다.25)

서서평 선교사가 1923년에 광주제일교회 여성도들을 중심으로 창설한 ‘부인조력회’는 성미운동과 함께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이 운동은 청년면려회 운동과 손을 잡고 일제 말까지 지속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앞에서 이상귀 목사가 밝힌 대로 제주도의 교세는 전반적으로 ‘약하다’라는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었다. 목회자 3명에 전도사 2명이라는 약세는 1933년 후반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성내교회에 최희준 목사가, 한림교회에 정순모 목사가 그리고 제주도 출신 강문호 목사가 부임함으로써 목회자는 정태인 목사와 이도종 목사를 포함하여 5인이 되었다. 한편 김재선 목사는 육지 교회로 이동하였다.

이렇게 목회자가 보강된 상태에서 제주도 교회는 약한 그대로 정체할 수는 없었으며, 1934년에는 한국 선교 50주년 희년 대회를 앞두고 총회의 결의에 따라 1934년 5월 1일 제5회 제주노회는 전북노회의 스위코드 선교사가 일본 도쿠시마 현에서 선교하던 로간(Logan) 선교사를 대동하여 통역 강연회를 개최하였다.26) 강연의 주제는 “예수는 우리의 생명”이었다. 이렇게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가운데 희년 준비를 결의하였다.
제5회 제주노회에서는 서귀포교회에서 청빙한 강문호 목사의 이명을 허락함으로써 제주도 교회사에 길이 남을 목회자가 부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노회는 전도집회의 강사진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1. 최희준 목사: 모슬포, 중문, 법환, 서귀포, 추자도
2. 정순모 목사: 협재, 두모, 지사, 용수, 고산, 조수
3. 강문호 목사: 읍내, 내도, 금성, 한림
4. 정태인 목사: 세화, 김녕, 조천, 삼양
5. 이도종 목사: 표선, 성읍리


어찌 되었거나 제주도 교회는 약한 가운데서도 조금씩 부흥하였다. 목회자는 5~6명에 그쳤으나 교회는 점점 늘어남으로써 제주도의 선교는 밝은 희망을 보여 주기 시작하였으며, 김녕교회, 추자신양리교회, 신풍리교회, 서귀포교회, 성산포교회, 남원리교회, 조수교회 등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다.

17) 《기독신보》, 1931년 7월 22일자.
18) 《기독신보》, 1930년 7월 30일자.

19) 《기독신보》, 1931년 5월 20일자.
20) 전주 덕진교회 담임목사인 이상귀 목사는 1933년 10월 18일자와 25일자 《기독신보》에 제주도 전도 여행기를 게재하였다.

21) 《기독신보》, 1933년 10월 25일자.
22) 《기독신보》, 1933년 5월 10일자.
23) Elizabeth Shepping, Our Korean Home Mission, The Presbyterian Survey, December 1933, pp.745-747.
24) 조선에서 금주할 이유, 《기독신보》, 1928년 1월 21일자.
25) 금주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 《기독신보》, 1928년 1월 21일자.
26) 로간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유진 벨 선교사의 사촌이다.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