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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01, 2016

제5장
최흥종 목사와 서서평 선교사

2. 서서평 선교사의 제주 사역123)


가. 서서평 선교사

셰핑(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은 유대계(?) 독일인으로 코블렌츠에서 태어났다.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신앙교육을 받았으나,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유아시절 아버지가 별세했고, 어머니는 미국의 신천지로 홀로 이민하였다. 돌보아주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셰핑은 미국으로 어머니를 찾아 떠났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뉴욕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았으며, 개신교로 신앙의 노선을 바꾸게되었다. 이로 인해 가족과 주위로부터 단절되었고, 성서교사훈련학교에서 훈련받고 사역자가 되었다.

1912년에 간호전문선교사로 한국에 오게 되었고, 주로 광주에서 사역하였다. 서서평(徐舒平)이란 이름으로 22년간 조선에서 일하는 동안, 의료선교 외에도 여성들의 교육과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2년 10월 10일, 광주 금정교회(광주제일교회)에서 처음으로 부인조력회(여전도회)를 설립하고, 잘 성장하도록 열정으로 보살폈다. 이 조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23년에는 조선간호부회를 일본과는 별도로 조직하고, 10년 동안 생을 마칠 때까지 회장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이끌었다. 당시 간호협회가 지정한 교재 22권 중에서 4권을 그가 집필하였다. 그리고 세계간호협회(ICN, International Council of Nurses)에 일본과는 다른 독자적인 조직으로 가입하려고 줄기차게 노력하였다.124) 또한 교회의 여성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광주이일학교를 설립하고 육성하였다.125)

1934년 6월 26일, 광주에서 130일간의 투병 끝에 “먼저 가니,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이생에서의 삶을 마쳤다. 시신을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한 것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결단이었다.

언어의 재능도 탁월하여 그는 한국어를 쉽게 터득하였고 품위있게 잘 구사하였다. 보리밥과 된장국을 즐기며, 남자들이 신는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한국인들과 같이 어울리는 일이 그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서서평은 제주도와 추자도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대부분 선교사들이 휴가를 지리산 등지에서 휴양하며 보내었는데, 서서평은 이 기간을 제주도를 찾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나. 제주에서의 사역


1917년 성내교회는 2인의 장로를 임직하였고, 이 예식 과 더불어 부흥사경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전도와 봉사를 위하여 함께 제주를 찾은 선교사 중에 서서평이 있었다. 의료선교사로 사역하던 서서평은 제주의 여성들을 진료하고 위생을 지도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였다.

1​919년 서서평은 다시 제주를 찾아 3월 9일부터 부인 성경공부반을 인도하였다. 다음 해에는 타마자 목사, 서로득 부인(Lois Swinehart)과 함께 방문하였고, 모슬포에서 선교사역을 펼쳤다.126) 이때의 여정과 경험을 서로득은 1922년에 선교동역자들을 위하여 기행문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외지인에게 비친 제주의 삶과 믿음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므로 아래에 다듬어 싣는다.

서서평은 1922년에 추자도에 주일학교 인도자를 파송하였다. 그 이름은 원용옥인데 추자도 출신으로 모슬포에서 살던 때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 처음에는 김기남의 집에서 모였는데, 점차 성장하여 추자하도 신양리에 교회가 서고 원용옥의 삼촌 원상건을 초대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비교적 늦게 복음이 들어갔지만, 주민 절반이 교회를 다닐 정도가 되었다. 교통이 불편한 낙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한 결과였다.

1925년 8월, 모슬포교회를 방문한 서서평은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세화리, 성읍리, 조천리에서 각각 3일씩 여신도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제주읍내 교회(성내교회) 등 여러 곳에 부인조력회(Women’s Auxiliary)를 조직하였다. 1928년 8월에도 모슬포교회에 초청되어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1933년에는 병약한 몸이었지만 모슬포를 방문하고 2주간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주위에서 모두가 만류하였지만, 그는 단호히 길을 나섰다. “건강이 회복된 다음에 하자면 하나님 사업은 언제 하겠는가? 약속했으니 기어코 가야겠다.” 동행한 서로득 부인과 조수 박해라의 부축을 받고서 움직였고, 옷을 입는 것도 남이 도와줘야 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더운 물주머니를 허리에 얹고 침상에 누운 채로 가르쳐야 했는데, 제주 전역에서 여성들이 모여들었다.

사경회를 마치자 서서평은 더 큰 용기를 내었다.

“처음보다 크게 회복되었습니다. 나귀를 타고 제주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습니다. 교회가 10군데가 넘으며, 선교사가 순회하길 고대하는데, 지금까지 돌아볼 기회가 없었어요. 이왕 온 김에 돌아보고 싶습니다.”

아무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용맹스럽고 순수한 영웅적 자질에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고 서로득 부인은 술회하였다. 이때 제주에서 다섯 살 고아 순이를 입양하였다.127) 찢겨지고 조각난 날개를 가지고서도 더 크게 비상하려는 정열이 그의 사역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에 힘입어 제주노회 여전도회연합회는 1934년 3월 8일 창립되었다.128) 1934년 5월에 광주에서 열린 전국여전도회에 보고된 것을 보면, 제주의 부인조력회는 15교회에서 230명의 회원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그가 길러낸 여성지도자들이 제주교회의 큰 일꾼이 되었으니 강형신, 김명숙, 엄현숙, 홍순희, 김치수, 탁명숙 등을 꼽을 수 있다.129)


​▲ 제주부인조력회와 서서평 선교사


다. 서로득 부인의 기행문130)


이 아침에 땅 끝에 왔다고 분명히 느낀다. 목포에서 이틀이나 와야 하는 태평양의 섬 제주에 도착했다. 백인 여성으로 여기에 발을 디뎠던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낯선 땅을 발견하고, 원주민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둘러싸였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갔을 때의 심정이 바로 이러했을 것이다. 서평, 타마자 목사와 나는 모슬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열흘 동안 성경공부를 인도하러 왔다. 모슬포는 섬에서도 구석에 있는 도시이다.

지난 월요일 낮에, 냄새 나는 작은 일본 배를 타고 폭포를 출발할 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일등선실에는 일본인 관리들이, 이등선실에는 편한 옷을 입은 일본인들이 16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들은 내내 갑판에서 지내야 했다.

선교사들은 일할 때 무슨 옷을 입느냐는 질문도 있었다. 서평은 8년 전 조선에 처음올 때 입었던 정장 차림이었다. 선교사들은 후원교회에서 보내준 복장을 입고서 그 고마움을 나타낸다. 갑판에는 의자가 없기에 여행용 가방을 깔고 앉았다.

어두워지자 비가 내렸다. 우리도 숨막히는 방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배는 계란껍질처럼 곧 부서질 것만 같았다. 서평은 죽도록 멀미에 시달렸고, 나는 창을 열어 환기시켰다. 그때마다 일본인들이 화를 내며 창을 닫으려 했는데, 미국인의 미소가 저들을 무마하였다. 풍랑을 만나 14일 동안 배가 표류할 때, 바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침이 되자, 답답한 방에 생선과 음식이 들어왔다. 우리들은 갑판으로 다시 올라갔다. 차갑지만 신선한 바닷바람은 달콤했으며, 새날의 찬란함이 간밤의 어두운 기억들을 지워버렸다.

정오쯤 되자 제주도가 보였다. 다음 날 아침에 제주도 남쪽 모슬포에 도착하였다. 해변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모슬포교회 교인들이 보였다. 낯선 땅에 도착하지만, 기다려주는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할 때의 선교사의 심정이란……. 검은 바위를 따라 우리를 환영하려 내미는 따뜻한 손을 잡았다.
“여러분, 여러분은 저와 동일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서도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이렇게 말하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예수님이 나보다 먼저 이곳에 오셨고, 사람들과 섬들 사이로 다니셨다고 깨달았다. 세상 끝에 주님이 나보다 먼저 도착하셨던 것이다. 진심으로 질문하였다.

“이 여자들이 나를 필요로 하나요? 이미 그리스도인입니다.”

순식간에 대답이 임하였다.

“저들을 너가 필요로 한다. 그들의 믿음이 오히려 너희에게 힘이 될 것이다. 이 긴 여정을 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온 교우들과 함께 목사의 사택까지 걸어갔다. 서평과 나는 한 방에서, 타마자는 다른 가족들이 쓰던 방을 배정받았다. 13일 동안 침대도 의자도 없는 곳에서 견뎌야 했다. 온도는 10도 정도였다. 미지근하고 불쾌한 기온이었다. 연료가 너무 비싸서 방에 온기는 전혀 없다. 스웨터를 다 껴입었다. 사역의 즐거움으로 불편함은 사라졌다.

조직에 능한 서평은 24시간 만에 모든 회중이 성경공부를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다섯 반으로 나누었다. 개인 신상도 모두 파악되었다. 첫 시간에,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성경말씀을 듣기 원하는 18명의 여인들을 만났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들으려고 했다.

제주의 이 교회는, 조선장로교총회의 해외선교위원회가 세웠고, 목사와 조사들의 급여는 조선인들이 전부 감당한다. 10년 전에 세워진 교회인데,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였다.

5일 후에

성경공부반에는 해녀들도 더러 있다. 어제는 공부를 마친 후 배를 타고 나가서 물질하는 것을 보았다. 해변의 동굴에서 해녀들이 옷을 벗고 흰 면 잠수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해녀들의 몸은 깨끗하고 유연하며 활력에 넘쳤다. 깊은 물속으로 검은 바위를 향해 선임자를 따라 헤엄쳐 들어갔다. 오른 손목에 둥그런 갱이를 매어서 전복이나 미역을 땄다. 모든 해녀들에게 그물로 된 자루와 크고 노란 테왁이 하나씩 있었다. 해녀들이 강한 발길로 바닷속을 향할 때에 테왁은 파도 위에 떠 있다. 10미터 이상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데, 푸른 바다를 뜰처럼 돌아다니는 그들은 매우 아름다웠다.

잠시 후, 소라와 흐느적거리는 미역을 끈으로 묶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기 테왁을 향해 재빠르게 헤엄쳐가서 테왁을 잡고 수면에서 잠시 쉰 다음 인어처럼 다시 잠수해 들어갔다. 육지에서 보았던 조선여인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이었다. 조선 여인들이 이런 기술로 일을 하고 존재감을 확인하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시 집으로

집은 천국과도 같은 곳이지만 섬을 떠난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해녀와 어부들과 지내는 게 너무 좋았다.

어느 새벽에 일본 증기선의 날카로운 기적소리가 들렸다. 광주의 사역이 우리를 기다리기에 귀환해야만 했다. 주님께 기도하면서 그 배에 올랐다. 돌아오는 뱃길 내내 현기증과 죽음의 위기가 계속되었다. 여름철의 녹색 기운이 어린, 갈색 화산섬의 풍경을 여유있게 즐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으랴.

옷이 젖지 않도록 선실로 내려가야 했고, 54시간 동안 일본인과 조선인들 사이에서 시달렸다. 담배연기, 구토, 역겨운 냄새들과 음식냄새 등 끔찍한 시간이었지만 사역의 기쁨으로 기꺼이 견뎌냈다.

결심

다음에는 비가 억수같이 오더라도 그 일본 배에 해부학 교과서를 맡기고 우비와 방수포를 쓰고서 갑판에서 버틸 생각이다.


라. 제주에 임하실 하나님 나라131)


조선 남쪽에 있는 제주도는 달걀처럼 생겼습니다. 그 한가운데 후지산의 축소판처럼 생긴 한라산이 물 위로 솟은 풍광은 아름답습니다. 제주의 역사는 아직도 가려져 있어서 신비롭습니다. 조선에서 제주인의 기원이 모호하다고 천시하며, 그 언어와 관습이 다르기에 조선인들조차도 낯설어할 정도입니다.

인구는 20만 명인데, 본토인과는 매우 다릅니다. 부지런하고 활력에 넘치고 정직합니다. 검소하고 절약하며 거지가 없습니다. 여자가 가정 경제를 주도하며, 이혼도 쉽게합니다. 조난당한 중국인들과 일본 여자들 사이에서 제주인의 조상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운 숲 속에서 고, 부, 양 삼성 시조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들이 나왔다는 구멍도 있습니다. 이들이 제주의 지배자로 세 족장이 되었습니다. 아이를 등에 업고 다닌다는 점, 집안 난방을 하지 않는다는 점, 동물을 애호한다는 것 등 일본의 흔적도 있습니다. 소들은 코뚜레를 하지 않습니다. 조랑말은 초지에서 떼를 지어 다니고 길에도 있는데, 차량의 경적이 울리면 달아납니다.

일본과는 매우 우호적이어서 사촌처럼 여깁니다. 오사카 등 공장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일하기도 합니다. 본토에서 보면 애국자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먹고 사는 일에서 현실적인 생각을 한다고 봅니다. 거칠고 강인하며 검소합니다.

남자들은 집을 지키고 아이들을 돌봅니다. 여인들은 문맹입니다. 본토에서 남자들이 하는 밭일을, 여기서는 여자들이 다 하고 가사일도 합니다. 조선여인들은 모자를 쓰지 않지만, 제주에서는 밭일을 할 때 모자를 쓰고 헐렁한 바지를 입습니다. 나무를 져 나르고 물을 길어옵니다. 아기들은 멀리 갈 때도 집에서도 구덕에 담아 놓습니다. 교회에도 구덕에 놓고 옵니다. 본토에는 없는 일입니다.
남자들은 갓을 쓰고 집을 지키는데, 여자들은 시장에서 장사하고 잠수하여 해산물을 캡니다. 미역이 식재료로 사용되며, 소라는 일본에서 통조림으로 만들어 조선과 일본의 시장에 나옵니다.

해녀들은 9개월 동안 일하는데, 3개월은 날씨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거칠고 물살이 센 제주바다의 날씨가 험해지면 큰 타격을 줍니다. 바다에 들어갈 때, 물안경을 쓰고 고무로 묶으며, 어깨 한쪽만 걸치는 모시로 된 잠수복을 입습니다. 갱이와 테왁을 활용합니다. 수면에 다시 올라오면 숨비소리를 내는데 충분히 공기를 폐에 다시 채우게 됩니다. 무리를 지어 일하며, 한 곳에서 일이 끝나면 이동하는데 심지어 일본으로 가기도 합니다. 일본이 이를 통제하기에 많은 작업을 할 수 없고 혼자서 잠수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나무가 귀하기에 쇠똥과 말똥을 연료로 활용합니다. 물이 귀하여 해안에서 나는 단물을 허벅으로 길어갑니다. 여자들이 떼로 몰려와서 물을 길어갈 때에는 물을 얻을 차례가 없어지게 되니 적절한 시간대를 지켜야 합니다.

여자들의 옷도 본토와는 사뭇 다릅니다. 일할 때 입는 옷이나 가난한 이들의 평상복은 감물을 들입니다. 습기 많은 기후라서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갈색을 띤 붉은 옷이 되는데 본토에서는 죄수들의 복색입니다. 죄수 이야기가 나왔으니 지적하는데, 여긴 죄수가 너무 없어서 재정의 이유 때문에 목포로 감옥을 옮겨갔다고 합니다. 도둑이 거의 없습니다. 미국에서 제주의 보물동굴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봤습니다. 저도 동굴에 가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주에 강도는 없습니다. 사화산인 분화구들이 많고, 아름다운 폭포들, 풀과 꽃들도 아름답습니다. 해안에는 바위섬들도 더러 있습니다. 섬 전체가 화산암이기에 바위투성이입니다. 이 돌들을 담장으로 활용합니다.

지붕은 거친 풀로 만들어지고, 태풍이 매섭게 지나가므로 굵은 밧줄로 묶고 돌을 달아 고정시킵니다. 지속적으로 안질을 앓고 시각장애인도 많습니다. 조리할 때 덮개가 없는 화로를 사용하는데, 연기가 지속적으로 눈에 접촉하기 때문입니다.

보리와 조, 미역과 해물을 먹는데, 본토인처럼 쌀을 먹지는 않습니다. 쌀은 제사나 명절, 귀한 행사 때에나 먹게 됩니다. 육지사람들처럼 보수적이지는 않지만 흥분을 잘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싸우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중국말 어조를 띤 변형된 조선어입니다. 일본어를 쉽게 배우고 유창하게 말합니다. 중국과의 교역을 좋아하고, 일본인들처럼 정열적이고 활동적입니다.

조선교회는 20년 동안 이곳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평양신학교 첫 졸업생 중에서 한 사람이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 섬에 가자, 수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의사 에비슨에게 수술받았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거기서 복음을 접했지만, 이 전도자가 제주에 올 때까지 더 이상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는 제주의 첫 그리스도인이요 장로가 되었습니다.

20년 복음사역의 열매는 5명의 목사와 12여 명의 장로들입니다. 교회는 16개처이며, 3년 전에 노회가 구성되었습니다. 부인조력회는 12개 교회에서 조직되었고, 이번 달에 연합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일본으로 간 기독교인들이 수백 명 되며, 유동적인 교인들이 많습니다. 또 신앙의 길에서 낙오한 사람들도 꽤 됩니다. 거의 모든 신앙인들이 극심하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귀신과 우상을 섬기거나, 무지하여 미신을 좇거나, 심지어 뱀을 숭배하는 사람도 있어서 복음에 강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가에서 쫓겨난 한 청년은 추운 겨울에 옷도 못 입고 도망쳐서 목숨을 부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죽음의 위협에 처하거나 심하게 얻어맞은 청년과 목사도 있습니다. 옛날에 비해 지금은 나아졌습니다. 제주의 내 친구들 중에 몸에 고난의 표를 지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당한 고난의 증거입니다.

일본에 갔다 온 제주인들 중에 볼셰비키의 치명적 사상에 빠져 돌아오는 사람들이 유행처럼 번져갑니다. 교회를 포위하고 지도자들을 때리는 사람들입니다. 매우 악명 높은 공산주의 지도자가 섬에 사는데, 일본 정부의 요시찰 대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자들이 우리 주님의 깃발로 승리하였습니다.

태풍이 오기 전에 우리의 사역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다행이지만 개개인을 충분히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떠날 때에 태풍은 그쳤지만 바다는 여전히 파도가 높았고 우리들은 멀미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사역이 시간과 경비의 낭비일까요? 따져 본다면 가치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여했던 사귐과 위로, 격려로 본다면 분명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옛신자들을 만나고 새 신자들을 얻는 것은 선교여행의 기쁨입니다. 영적으로 더 깊어지고 복음을 더 알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값진 일입니다. 육지에서 저들을 기억하고 영적 성장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노회에 대한 총회의 지원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저들은 여전히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과 말씀에 헌신하지만 아직도 대부분 약하고 무지하므로, 앞으로도 꾸준히 저들과 함께 기도하며 일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진리가 있으니 이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저들을 염려해야 합니까? 심각한 가난, 엄청난 무지, 훈련받은 지도자가 없는 점, 고립된 환경, 열광적인 공산주의자들의 난폭한 움직임,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귀신을 무서워하며 미신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여인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제주인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수천 부의 소책자를 부인조력회에 주었습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명확하고 간결하게 중생을 설명하는 《하나님을 발견하는법》도 배포하였습니다. 십일조 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내가 십일조 하는 열 가지 이유》라는 책자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스티븐스 의사가 번역하여,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제가 인쇄했습니다.

우리는 공중 보건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법, 질병 예방법, 집을 깨끗하게 하는 법 등 우리는 그들을 교회 제자훈련으로 도왔고, 개인과 가정의 문제들도 상담하였습니다.

선교사가 피하기 어려운 것은 재정적인 어려움입니다. 레무스 삼촌이 말했듯이 “그들은 그 안에 홀로가 아닙니다.”

조선인들과 함께 사는 어려움은, 단순히 그들 가운데서 살아가며 극복합니다. 우리엄 부인(이일학교 교사)과 나는 심한 열기가 있는데도, 파리가 윙윙거리는 어려운 숙소 환경에서 지냈습니다. 사람들이 하루종일 가만히 지켜보며 우리들을 관찰하기에, 한 순간도 사생활을 가질 수 없지만,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정말 놀라웁게 우리를 지키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는 시간을 선용하였고, 미미하게 시작된 제주노회가 장차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강한 조직으로 자랄 것이라 확신합니다.

​123) 양창삼, 《조선을 섬긴 행복》, 서서평의 사랑과 인생, 서울: Serving the people, 2012
124) 해방이 되고 1949년에야 ICN에 가입하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간호협회도 조선을 포함하는 유일의 협회로 등록하려 하였기에, 1943년까지 ICN 가입이 지연되었다. 양국주,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섬김이야!》 서울 2012, pp.78-79.

125) 학교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로이스 니일(Lois Neel) 양을 기념하여 이일학교로 명명하였다. 나중에 전주의 한예정신학교와 하나로 합치게 되어 한일여자신학교가 탄생하였다. 현재의 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에 해당된다.

126) 서서평이 특별히 모슬포교회를 여러 차례 방문한 것은, 담임목사인 이경필, 최흥종과 친분 혹은 신뢰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서서평은 동년배(1880년생) 최흥종 목사를 생일이 앞선다고 하며 스스럼없이 오빠라고 불렀다. 한센인들을 위한 사역에서 두 사역자는 뜻이 일치하였다.

127) 서서평은 평생 독신으로 사역하였으며, 남자아이 1명, 여자아이 13명을 입양하였다. 이중에 훌륭히 성장하여 큰 일꾼이 된 자녀들도 있다. 순이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조선을 섬긴 행복》, pp.249-254.

128) 최순신, 《여전도회 80년사》, 2008. 이 책의 속표지에는 창립총회 회의록이 영인되어 있다. 1933년 서서평선교사가 제주를 방문하였을 때에 여성지도자들의 모임은 이 조직을 위한 예비모임 성격으로 보인다. 1933년 8월 1일에 읍내교회에서 촬영한 사진에 서서평, 강계생, 최정숙 장로 등을 볼 수 있는데, 창립총회 기념사진으로 잘못 해독되기도 한다. 참고, 《제주성안교회 100년사》, p.225.

129) 최순신, 《여전도회 80년사》, 2008; 《제주교회 인물사 I》. 죽엉ᄀᆞ도람 수게, 2013.

130) 《조선을 섬긴 행복》, pp.368-372. 원문은 "An Island in Pacific", The Korea Mission Field, January 1922, pp.10-12.

131) 서서평의 선교 보고서(1933. 12)에 해당된다. 《조선을 섬긴 행복》, pp.401-405.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