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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26, 2016

제4장
제주 교회의 정착


3·1만세운동과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통치는 한국인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오히려 한국인들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정책으로 일관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사회운동이 전개되어 야학 실시, 신용협동조합의 결성, 노동조합의 결성, 소작 쟁의 등 당국으로서는 사회 불안을 야기시킬 것처럼 보이는 단체들이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면에는 항상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제주도에서도 1922년에 YMCA가 결성되고 1926년에 YWCA가 조직되었는데, 주로 기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한편 1922년을 기하여 김창국, 윤식명, 임정찬 세 명의 목회자가 육지로 떠나고 이어서 이창규, 김정복 목사, 이경필 목사가 내도하여 제주도 교회를 이끌어갔다. 이 사이에 제주도 교회들은 자립 단계에 접어들면서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 내에 사숙을 설립하고, 선교 활동의 대상에서 자립 교회로 독립하기에 이르러 1930년에 제주노회가 설립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기간은 또한 제주도 출신 목회자가 배출되어 제주도 목회자가 제주도 교회를 이끌어가는 기초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는 실로 복음이 제주도에 뿌려진 지 20여 년 만에 일구어 낸 희망이었다. 이 시기에 바르게 정리되지 못한 일도 생겨났다. 제주도에 사숙 설립을 위하여 모금하였던 자금의 행방이 묘연해진 사건이다. 이 일의 전말이 어떠하였는지 아직까지도수수께끼로 남아 있다.84)

​84) 제주선교 백주년을 준비하던 때에, 제주노회는 총회와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2007년 8월 23일에 총회를 향하여 발표한 성명서에는 다음와 같은 내용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대로 인용한다. “1920년 2월 23일전주 서문밖 교회당에서 개최된 임시노회에서 이러한 참상을 눈물로 호소하여 제주에 기독교 학교를(선교 차원에서) 지어 줄 것을 호소하였고, 이에 너나 없이 감동하여 즉석에서 선교헌금(학교설립 기금)을 한 결과 1,335원 50전이 헌금으로 연보되었습니다(《장로교회 사기 하권》 참조). 그 이듬해인 1921년 8월 23일 전라북도 옥구군 구암리 교회당에서 열린 제9회 노회에서 역시 제주 미션스쿨 설립을 위한 강연을 하고 즉석에서 헌금한 결과 329원이 연보되었습니다. 그래도 학교 설립에 필요한 돈이 200여 원 모자람으로 순회 선교목사인 김창국으로 하여금 전국 주요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모금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돈이 제주에 들어왔다는 얘기도, 들어온 흔적도 없이 증발되어 버렸습니다. 당시의 1864원 50전이라는 돈은 상대가치로 환산하면 오늘날 약 200억 원 정도의 막대한 돈입니다. 그 후에 전라노회가 이 돈을 어디에 전용하였는지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상회인 총회가 전라노회에 제주선교를 위임하였다고 했지만 역시 장본인은 총회이기 때문에 이를 감독 독려할 책임이 있는데 유구무언입니다. 제주노회가 총회를 상대로 학교를 지어 주어야 한다는 요구는 막무가내 식으로 떼쓰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정당한 권리요, 엄중하게 요구할 구속력을 지닌 사안입니다. 총회가 직접 감당할 수 없다면 총회 내의 유력한 교회를 감동적으로 설득하여 총회를 대신해서 이를 시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총회는 무책임의 부끄러운 굴레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1. 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이경필 목사는86) 목포 양동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직하다가, 전남노회의 결정에 따라 1921년 12월 22일 목포 양동교회에서 송별예배를 드리고 12월 27일 경흥환(慶興丸)을 타고 제주도에 도착하였다.87) 이경필 목사의 활동은 우선 선교의 거점 교회인 모슬포교회 사역이고, 그 다음은 산남지방의 여러 주변 교회들을 돌아보는 목양이었다.​

가. 모슬포교회의 부흥
윤식명 목사가 1921년 5월 즈음에 전라북도로 떠났지만, 교회에는 최정숙 영수가 있었다. 그는 이미 앞에서 밝힌 대로 수백 원에 달하는 사업자금을 교회에 헌납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 교회들을 위하여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기다림 속에 부임한 이경필 목사는 모슬포교회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곧바로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집회를 계획하였다.

1922년 3월 20일에 이경필 목사는 산남지방 연합부흥사경회를 개최하여 10일 동안 지속하였다. 이 집회의 주강사는 닷슨(Samuel K.Dodson: 도대선) 선교사와 이기풍 목사였으며, 여기에 이경필 목사가 가세하여 큰 은혜를 나누었다.

모슬포교회 부흥사경회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는 구역 내 각 교회를 합하여 3월 20일부터 부흥사경회를 가졌는데 교사는 이기풍, 도대선, 이경필 이렇게 세 목사요, 공부하는 남녀 40여 명이며, 새벽기도회와 하오 공부와 저녁전도회에 무한한 은혜와 지혜를 얻고 받았으며, 특히 저녁에는 이기풍 목사의 열렬한 강도에 일반 신자가 통회하여 대대적 부흥이 되는 중에 더욱이 감사한 것은 새로 믿은 자 20여 명이었다더라.88)


닷슨 선교사도 모슬포교회에서 받은 감동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 모슬포 교회는 내가 보아온 것 중에 가장 소망스러운 교회이다. 교인 수는 적으나 교회 안에는 몇 분의 훌륭한 남녀 교우들이 있다. 주일학교는 잘 조직되어 있고모두 일곱 반이다. 불신 아동을 위한 주일학교가 정규 집회 전에 열리는데, 내가 한국에서 본 가장 활력 넘치는 모임이다. 교우들은 학교를 시작하기 위해 모금해 왔으나 아직까지 교사를 활보하지 못했다.……제주도 사역은 소망이 가득하며 활발히 자라고 있다.89)


이경필 목사의 부임 이후에 모슬포교회가 성장하자 당회의 필요성을 느끼고 1923년 7월 3일에 모인 제12회 전남노회에서 ‘장로 2인’을 청원하여 허락받았다. 모슬포교회는 1923년 춘계 신앙대부흥사경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김익두 목사를 강사로 청빙하였다. 이 행사는 제주도 각 지방의 목회자들이 새롭게 바뀐 상황에서 제주도 교회들의 영적 부흥과 단결을 꾀하기 위한 연합 행사였다. 이 부분을 《기독신보》는 크게 보도하였다.

제주도 대정면 모슬포교회의 주최로 제주 전도(全島) 각 교회가 연합 부흥코져 수월 전부터 특별기도 중 3월 19일부터 김익두 목사를 청빙하여……수백 명이 회집하여……방청인이 구름같이 모인 바 예배당 마당에 임시 장막을 치고 일주일간 대부흥을 받았는데, 특히 감사한 것은 많은 환자가 각색 병을 고침받은 것이며, 예배당 건축비로 연보한 것이 일천이백 원에 달하므로…….90)


1923년 3월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는 모슬포교회의 부흥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때로부터 나타난 변화는 첫째, 여전도회의 조직이고 둘째, 부인 야학의 실시이며 셋째, ‘광선의숙’(光蘚義塾)의 재건이었다. 앞의 《사기》에서도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한다.

1923년(계해)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 부인전도회를 조직하고, 순번을 따라 교체하여 열성 전도하므로 부인 야학까지 설립되었다.91)

윤식명 목사는 1920년에 광선의숙(光蘚義塾)을 설립하였으나 재정과 교사 등 여러 난관에 부딪혀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성장하게 되자 여전도회에서 이 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여성들의 교육은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실시하려는 사업이었으며, 한국교회는 이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YMCA, YWCA가 이 사업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다면 제주도에서는 여성들의 교육에 대하여 어떠한 준비가 있었는가? 1920년5월 3일 《동아일보》는 “제주도민, 여자 교육의 부진을 염려하여 여학교 설립 준비로서 제주여자장학회를 조직하고, 만 원의 의연금을 모집”이라고 보도하였다.92) 1922년 5월에는 여성 문맹 퇴치 강습소인 여수원(女修園)을 강평국(姜平國)과 최정숙(崔貞淑)이 개설하였다.93)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모슬포교회는 1920년에 광선
의숙을 세웠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사업을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슬포교회가 1923년에 여성들의 야학을 실시하고 광선의숙을 재건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큰 사회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광선의숙의 교과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는 제3회로 광선의숙 교실에서 7월 26일부터 개학하였는데 당일 입학생이 30여 명이었으며 과목과 직원은 여좌하더라.
과목: 성경, 유희, 음악, 수공, 습자

직원: 교장 박남규, 교사: 문공언, 강규언, 정신경94)


두 번째로 이경필 목사가 시작한 사업은 예배당의 신축이었다. 1912년 설립 당시에는 신창호 씨의 집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하다가 예배당을 신축하였으나 예배당이 회집 인원의 수효를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1920년부터 신축 계획을 세웠다. 이 시기에 이미 4천 원 예산의 예배당을 계획하였으며, 최정숙 영수와 강흥주 집사의 열성이 곧바로 건축을 시작할 것으로 보도하였다.95) 그렇지만 건축은 쉽지 않았다. 재정난으로 교회 건
축이 점점 미뤄지다가, 다른 교회들의 예배당 건축에 모슬포교회도 예배당 신축의 자극을 받았다.

1924년에 교회의 부지 256평과 초가 3칸을 650원에 구입하지만, 1926년에 비로소 대정읍 하모리 1075번지에 60평 규모로 새 건축술에 의한 목조기와 교회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많은 교우들이 힘써 헌신하여서 완공하자, 1929년 1월에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고 예배당도 봉헌하였다.96)

이경필 목사는 1921년 말부터 1926년까지 성심성의껏 제주도 산남지방의 여러 교회를 살피고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교인들에게 장로교 전통에 따른 권징을 강조하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면서도,97) 신자들의 삶의 도덕성을 매우 중시하였다. 치리의 원칙에 따라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일관성 있게 징계하였다.98)

그러다가 192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극심한 소화불량과 과로가 겹쳐서더 이상 목회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1927년 4월부터 12월까지 휴식을 허락받았다.99) 이 공백 기간에 김성원 목사가 목양의 책임을 맡아 수고하였다. 이경필 목사는 쉬는 대신 고산지역에서 전도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다가 1930년에 광주 금정교회(광주제일교회)의 청빙을 받게 되었다.100)

나. 두모리교회
이경필 목사가 목양하였던 산남지방 여타의 교회들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이 교회들이 두모리교회, 고산교회, 용수교회, 중문리교회, 조천교회, 성읍교회 등이었다. 여기에서는 우선 두모리교회에 대하여 언급하려고 한다. 두모리교회는 1920년에 시작된 교회이다. 두모리교회는 윤식명-원용혁에서 이경필-원용혁으로 이어지면서 1923년에 큰 발전을 보였는데, 제사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승리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923년 2월 14일자 《기독신보》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제주 구우면 두모리교회에서 이경필 목사와 원용혁 전도인을 청빙하여 4일간 부흥회를 하는데 김관첨 씨가 몇 번 방청하다가 성신의 능력으로 그 마음을 일으키사 믿기로 결심하였는데……자기 조모의 제일(祭日)에 참여치 아니하고……문중이 달려들어 무수히 괴롭게 함으로 예배당으로 피하여……자기 모친의 대상을 당하여 참여치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조객에게 암매한 시대의 폐풍을 들어 말하였는데……주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더라도……핍박을 받고도 굳굳하게 승리하였다더라.101)


두모리교회 교인들 가운데에는 제사 문제로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초창기에 예배 처소를 제공한 강성립, 고태행, 고용표, 김계공 등이 기독교와 제사 문제로 인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1930년대에는 여러 교회가 목회자 한 사람을 청빙하여 순회하며 목양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두모리교회는 1935년에 새 예배당 헌당식을 가질 정도로 힘이 있었다.
제주 두모리교회의 대성회

지난 5월 1일 제주노회 시에 두모교회 외 다섯 교회가 임시 목사로 시무중이던 정태인 목사의 위임식을 위원장 최희준 목사의 사회로 성대히 거행하고, 식이 마치자 두모교회의 헌당식이 최 목사의 사회로 거행되었는데 이도종 목사의 의미심장한 설교와 내빈 축사 등이 있었다더라.102)

​85) 《사기》, 하권, pp.299-300.
86) 이경필 목사는 1876년 6월 2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1894년 부모를 따라 전라북도 금산읍으로 이주하였다(금산은 1963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충청남도가 되었다). 1903년 8월에는 9품 종사랑에 임명되어 국세를 거두는 징세관으로 일하였다. 그는 1906년 마로덕(L. O. McCutchen)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1909년에는 그의 조사가 되어 용담 지방을 맡았으며, 191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그는 목사 임직 후 마로덕 선교사와 함께 동사목사로 사역하다가 1917년에 목포 양동교회로 부임하여 1921년까지 사역하였다. 1921년에는 전남노회장이 되었다.

87) 《기독신보》, 1922년 2월 1일자.
88) 《기독신보》, 1922년 5월 31일자.
89) Korea Mission Field, 18-19(1922) p.210.
90) 《기독신보》, 1923년 5월 23일자.
91) 《사기》, 하권, pp.322-323.
92) 《제주사연표 I》, p.373. 1921년 11월에는 제주 성산청년회 주최 야학회를 개최하여 지원자가 10여 명에 이르렀으며, 12월에 구좌면 종달리 김생길은 교육기관 설립을 위하여 일천 원을 기부하는 등 교육과 계몽에새로운 움직임이 교회 안팎에서 진행되었다. 《제주사연표 I》, p.378.
93) 《제주사연표 I》, p.379. 여수원은 재정난으로 명신학원에 편입되었으나 명신학원마저 3년 만에 중단하고말았다.
94) 《기독신보》, 1926년 9월 1일자. 강규언은 중문교회 초기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고, 1919년에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학생으로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유죄선고를 받았으며, 제주도 성안교회에서 운영하는 사숙에서 조봉호와 함께 교사로 활동하였다.

95) 1926년 9월 1일자. “모슬포 교당 건축”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신문에서는 최정숙 장로로 표기하였으나 이 시기에는 아직 영수였다.
96) 《기독신보》, 1929년 2월 13일자.
97) 《조남수목사 회고록》(1987), pp.81-85.
98) 《모슬포교회 100년사》(2012), pp.133-134.
99) 제16회 총회록(1927) p.83.
100) 1925년에 간행된 《제주기독교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제주선교 70년사》(1977)에도 인용되어서, 여기에 그대로 옳긴다. “이기풍 목사는 복음의 씨를 질머지고 와서 전파할 때 의관(衣冠)을 찢기워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뿌린 파종자(播種者)와 같으며, 윤식명 목사는 피땀 흘리고 팔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역한 灌水者(물 주는 자)이며, 이경필 목사는 조직적인 주의력을 가지고 밤낮으로 돌아보며 전도한 운경자이며, 이 세 목사를 도와 전도에 종사한 수많은 전도인들은 주님의 사업에 충실하게 수종 든 보조병들이라.”
101) 《기독신보》, 1923년 2월 14일자.

102) 《기독신보》, 1935년 6월 20일자.

2. 산북지방의 선교


산북지방의 중심 교회는 아무래도 성내교회(당시는 서문교회)였다. 김창국 목사가 1922년 3월에 광주 양림교회로 떠나고 이창규 목사가 선교사로 전북노회의 파송을 받게 되었다. 이창규 목사는 1923년 1월 23일에 회집한 제12회 전북노회에서 “삼례교회를 시무하던 이창규 목사를 전도목사로 허락하노라”는 결정에 따라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창규 목사의 시무는 매우 짧았으며, 뒤를 이어서 김성원 목사와 김영식 목사가 짧은 기간 동안 산북지방의 여러 교회를 돌보았다.


가. 성내교회
이창규 목사가 성내교회에서 행한 중요한 사역은 예배당을 신축하는 일이었다. 성내교회는 1922년 8월 22일 제11회 전북노회에서 “…… 당석에서 연보한 금액이 140원이었다”는 보고와 함께 건축의 꿈이 익어가고 있었다. 이창규 목사는 1923년 부임 후 4월에 이르러 건평 52평의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건축은 그리 쉽지 않았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도 출향민들이었다. 이들이 1923년 6월에 70여 원을 헌금하여 보내왔다.

제주도 서문교회(성내교회)는 수년 전부터 성전을 신축코져 경영하였으나…… 금전의 공황이 여간 아닌 중에 일본 대판의 동포 중 믿는 형제 몇 분이 곤경에 처함을 알고 70여 원을 구집하여 보내었으므로……기부자의 이름과 금액은 고재만, 서삼룡, 장이보, 김사진 각 10원, 장두만, 문기천, 김재하, 무명씨 각 5원, 좌응순 3원 30전, 김경찬, 우병성 각 3원, 이중화 2원, 강좌규 1원…….103)

이상과 같은 헌금이 답지함으로써 성내교회 교우들도 힘을 합쳐서 성심성의껏 5,338원 80전을 헌금하여 부지는 620원에 매입하고, 총 건축비는 4,700여 원에 달하는 반양옥 예배당을 헌당할 수 있었다. 건축공사는 4개월 동안 진행되었으며, 1923년 8월 3일에 1,000여 명의 내빈이 축하하는 가운데 성황리에 낙성식을 거행하였다.104) 그렇지만 건축에 따른 부채가 청산되지 못하여 헌당식을 미루고 있다가 1925년 1월에 이기
풍 목사를 초청하여 특별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 기간에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전남 제주 서문교회 김수사나 여사는 당년 70세의 노령으로 슬하에 일편혈육도 없이 독신으로 소소한 상업을 경영하여 현시 150원 가격의 가게를 장만하고 생활하던바 신앙 독실한 씨는 주의 사업을 위하여 그 가게를 교회에 기부하였으므로…….105)

이렇게 하여 성내교회는 건축 부채 500원을 갚아가기 시작하였으며, 1926년 8월 15일에 봉헌하였다.106)

성내교회가 아름다운 예배당을 신축하고 성장하기 시작하자, 이창규 목사가 성내교회로 하여금 선교지 교회에서 탈피하여 자립하는 교회로 독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단독으로 담임목사를 청빙하도록 촉구하면서, 자신은 산북지방의 다른 교회들을 돌보겠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이창규 선교사의 뜻에 따라 전남노회는 “전북노회 내 강도사 김정복 씨를 청빙하여 장립한 후 제주 서문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오”107)라고 보고하였듯이 김정복 목사는 1924년 2월에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4년 2월 23일 제주읍교회에서는 김정복 목사의 환영회를 김재원 씨의 사회로 개회하고 김두봉 씨의 환영사와 이창규 목사의 축사와……3월 2일에는 이창규, 이경필 목사가 김 목사의 위임식을 교인 일동의 서약으로 거행하였다더라…….108)


김정복 목사는 성내교회와 삼양교회 두 교회의 위임목사로 시무하는 한편 이창규 목사는 내도리, 금성, 한림 등의 산북지방 교회들을 맡아서 순회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그렇지만 이창규 목사는 제주도의 풍토가 맞지 않아 자주 발병함에 따라 1924년 9월에 사역을 중단하고 육지로 떠나고 말았다.

김정복 목사는 성내교회와 삼양교회의 위임목사로 사역하였으나, 1924년 9월 이후에는 이창규 목사가 떠남으로써 산북지방 여러 교회를 동시에 보살피는 광범위한 사역을 전개하였다.

김정복 목사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성내교회와 삼양교회에서 다같이 사숙을 운영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모슬포교회에서도 ‘광선의숙’을 재건함으로써 제주도에는 3개의 사숙이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1924년 총회록에는 서문교회와 성내교회 두 교회가 사숙을 가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유지해 오던 사숙(영흥학교)은 재정적 어려움과 학생수의 감소에 따라 폐교 조치를 하게 되어 마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러한 아쉬움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성내교회는 유치원을 개원하기로 결의하고서 전라남도 도지사의 허가를 얻기에 이르렀다.

사숙을 포기한 성내교회는 이왕에 전라남도 도지사의 허가를 받은 유치원 운영 경비를 교회에서 전담하기로 결의하였다.
본 월(10월) 1일로부터 개원하고 200명 학생이 공부하는 중인데, 원장은 김정복 씨 교사는 홍보영 씨요, 경비는 본교회의 제직의 전담으로 장차 더욱 확장할 계획이라하오며…….109)


성내교회의 이러한 결의와 딱한 사정을 알게 된 변호사 이창휘는 10원을 후원하여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이창휘 씨의 미거
제주: 경성에서 변호 사업에 종사하는 이창휘 씨는 당지 중앙유치원을 관람한 후 그 궁색한 정형을 듣고 10원금을 연조하였으므로 해 유치원이 감사한다더라.110)

김정복 목사는 1924년부터 성내, 삼양 두 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사역하다가 성내교회의 예배당을 신축하고, 고영흥(高永興) 장로를 장립시켜서 당회를 보강하고, 중앙유치원을 개원하고, 사숙을 성내, 삼양 두 교회에 설립하고, 이선광 여전도사를 재 청빙하여 여성 교우들을 강화시키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26년 가을에 성내, 삼양교회를 사임하고 벌교교회로 떠났다. 이기풍 목사는 1927년 2월에 고흥읍교회를 사임하고 성내교회로 부임하여 7월 31일에 위임받았다.

나. 산북지방 교회들의 선교
성내교회는 김정복 목사 때부터 자립 교회가 됨으로써 단독적으로 목회자를 청빙할 수 있었으므로 전북노회에서 파송하는 전도목사가 제주 성내교회를 거점으로 삼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전북노회는 1924년 6월에 회집한 제15회 노회에서 선교 거점을 한림으로 이전하기로 결의하였다.111)

이 과정에서 전북노회는 성내교회와 약간의 의견충돌이 있었다. 즉 성내교회 목회자사 택은 전북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이어서 기거하였을지라도 이 사택에 대해서는 성내교회 교우들의 헌금도 다소간 들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내교회는 교회의 사택을 매도하여 한림지역에 새로운 사택을 구입하겠다는 전북노회의 결의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북노회는 1925년 1년 동안의 목회를 위하여 춘기(5월) 성례전 집행과 목회 사역을 위하여 5월에 홍종필 목사를 파송하였으며, 추기(11~12월)에는 곽진근 목사를 파송하여 산북지방 여러 교회들을 돌보게 하였다.112) 이러한 상태로 1925년을 보내고 1926년 1월에 전북노회는 김성원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전북노회의 파송을 받은 김성원 목사는 1926년 2월 22일부터 28일까지 금성교회에서 산북지방 연합부흥성회를 인도하였다. 이 부흥회에서 “오전에는 40여 명이 공부하고, 오후에는 300여 명이 청강하며, 60여 명이 새신자를 얻었다.”113)

이처럼 김성원 목사의 활동으로 산북지방 여러 교회들이 힘을 얻었다. 그리고 김성원 목사는 1926년 6월에 회집한 제19회 전북노회에서 “세례교인 4인과 학습교인 16인을 문답하였으며, 김녕리에 교회가 새롭게 설립될 희망이 있사오며”라고 보고하였다. 특히 이 기간에 김성원 목사는 성내교회 사택을 매도하여 2,000원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 500원은 성내교회에 지불하고 나머지 1,500원은 식산은행에 저축하였다.

이 시기에 제주도 선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1926년을 기하여 지금까지 제주도 선교에 참여하였던 전북노회, 전남노회, 순천노회는 사회와 교회의 경제적 위축으로 인하여 한 노회가 단독으로 선교를 수행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세 노회는 ‘제주연합전도부’라는 이름으로 연합사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선교 본부는 전남 광주에 두기로 하였다. 전도 비용은 전북노회가 매년 500원을 지원하고 전남, 순천 양 노회는 세례교인 1인당 20전 비례로 회비를 거출하기로 하였다. 부족한 경비는 총회 전도부의 보조금과 독지가의 의연금으로 충당키로 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지금까지 전북노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받아 사역하던 김성원 목사는 전남노회로 이명하였다.

김성원 목사는 산북지방의 여러 교회와 전남노회에서 미처 손을 쓰지 못하던 산남지방의 동지방까지 맡기로 하였다. 이 시기에 제주도 산북지방의 대표적인 교회들은 금성교회, 삼양교회, 내도리교회가 있었고, 산남지방을 대표하는 교회들은 조천교회, 세화교회, 성읍교회 등이었다.

1) 금성교회와 이덕련 장로
금성교회의 1918년의 형편에 의하면, 이덕련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새로운 예배당 건물을 위하여 얼마간 저축도 하는 등 기도로 준비하여 왔으나,114) 1923년에 이덕련이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헌납하게 되었다. 이 부분을 《기독신보》는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 금성이란 곳에는 10여 년 전부터 주의 빛이 비추어 주 예수를 믿고 남여 10여인이 모여 예배하나 예배당이 없어서 일반이 우려하는 터이나 소수의 교인이라 물질적 힘이 부족함은 사실이더니 그 교회 영수 이덕련 씨가 자기의 주택 초가 한 채를 예배당으로 드렸으므로 일반은 씨의 성의를 축하며 열렬한 충심에 감복하다더라.115)

2) 삼양교회와 오주병 장로

삼양교회의 설립에 대하여 기록상으로는 1917년 12월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기풍 목사의 초기 선교사 시절부터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그곳에서도 나름대로 예배드리는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918년 7월 24일자 기독신보의 기록에 의하면 공식적인 설립에 이르기까지 30여명이 예배드린 것으로 보아서 산북지방 선교사와 전도인들이 삼양리를 순회구역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예배드리기 시작하다가, 1917년 12월에 이르러 오주병 씨의 변화가 교회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기독신보》는 이렇게 말한다.

삼양교회는 작년 12월 분에 비로소 설립된 교회로 남녀 30명이 이르러 재미가 많이 있는 중에 그곳도 형제의 집에서 모이는데 새로 믿는 오주병 씨는 이왕 술객으로 허망한 일을 많이 하던 것을 다 온전히 회개하고 믿는 날부터 열심히 믿는 형님이올씨다.……오십 원 가치 되는 자기의 집을 바쳤는지라 성안교회와 수원, 금성 양 교회가 그 형님의 열심 성의를 하례하는 중 이십여 원을 당장 연보하여 수리비로 도와주어……지금은 새 예배당에서 기쁨으로 예배하며…….116)

이렇게 보면 삼양교회는 1917년 12월에 비로소 교회로 설립되었으며, 점술사로 이름을 날렸던 오주병 씨가 예수님을 믿고 50원 가치가 있는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헌납하자 성내, 수원, 금성교회에서 수리비로 20원을 헌금하여 보탬으로써 1918년 여름부터 새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있었다. 이때에 지은 예배당이 8칸이었다. 오주병이 자가를 교회에 헌납하였다는 사실은 1919년 4월 2일에 회집한 제4회 노회에서도 “제
주 삼양리 오주병이 자기 사택을 예배당으로 기부한 것을 보고하고”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헌신하던 오주병은 1923년 삼양리에 유치원을 세우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1924년 8월 6일에 장로로 임직받아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교회가 완전 당회로 발전하지 못함에 따라 목회자를 단독으로 모실 수 없었다. 성내교회의 김정복 목사를 삼양교회까지 겸하는 동사목회자로 청빙하자 교회는 또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교회가 부흥하자 1918년에 지은 예배당에 4칸을 확장시켜
야 했다. 이 확장 공사는 일본 오사카로 떠났던 교우들이 헌금을 보내옴으로써 가능하였다.

삼양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게 됨에 따라 김정복 목사는 성내교회에 주력하고, 1926년 2월부터 김성원 목사의 지도 아래 크게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삼양교회는 김성원 목사가 재직하던 1926년 4월부터 1928년 4월까지 학습교인이 32명, 세례교인이 23명, 유아세례자가 8명이었다.117)
그러나 김성원 목사가 1928년 5월에 전도목사직을 사임하자, 삼양교회는 때를 맞추어 신학교를 졸업한 제주도 출신 김재선 목사를 단독 위임목사로 청빙하였다.


八. 전남노회 상황 보
고四. 특별한 형편
1. 금년 평양신학교 졸업생……김재선 씨는 제주 삼양교회의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목사로 장립하여 시무케 하였사오며…….118)
김재선 목사는 1928년 9월부터 삼양교회를 맡아서 목회하다가 1930년 11월 제주노회의 설립으로 인하여 사임하고, 이어서 “6. 삼양리, 조천리 2처 교회가 연합하여 목사를 청빙하기로 함”이라는 노회의 결의에 따라야 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제21회 총회 시에 제주노회 보고서에서 “순천노회에서 치리받았던 정태인 씨를 목사로 복직시켜 삼양교회 임시목사로 세웠사오며……”라고 보고한 대로 정태인 목사가 삼양교회 임시목사로 재직하였다.이 게시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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