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2016.08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25, 2016

제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해방과 함께 신사참배 문제는 교파 분열이라는 사생아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어 온 문제로 250년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로 생겨난 노바투스 이단, 302~305년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로 인하여 카르타고에서 생겨난 도나투스 분파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또한 1850년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한 역사비평학의 등장과 소위 말하는 구약성서의 문서편집설 이론은 신학계의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교회에는 보수적인 선교사들의 신앙관으로 이처럼 학문적인 신학이 자리하지 못하다가, 독일과 캐나다의 학문적 분위기가 강한 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한 신학자들이 국내로 유입되면서 신학적 갈등이 필연적으로 일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내의 주도권을 놓고 진행된 예수교장로회의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은 지역 감정과 교권 다툼의 희생물이라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지만 제주도 교회는 강문호 목사의 지혜로운 판단에 따라 양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교파 분열의 분위기에서도 제주도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으며, 성내(성안)교회와 영락교회의 비약적인 발전은 한국 교계에 큰 모범을 제시하였다.


1. 고신파 분열


1945년 8월 18일을 기하여 옥중에서 수감생활하던 성도들이 출옥하게 되었다. 이들은 출옥 후 한국교회 갱신을 위하여 신사참배에 참여한 교직자들은 자진하여 사표를 낸 후 최소한 2개월 이상 자숙한 다음에 해당 교회 공동체로부터 재신임을 물어 업무에 재복귀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신학교를 새롭게 만들어서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할 것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교계의 지도자들이 대다수 신사참배 참여자였던 상황에서 자숙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자명한 결과였다. 출옥 성도를 대표하는 한상동 목사는 주남선 목사, 박윤선 목사를 대동하고 1946년 9월부터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본신학교의 교장으로 신사참배 기간 중 만주 봉천신학교에서 교수직에 있었던 박형룡 박사를 초빙하였다. 부산 고려신학교는 한국교회에 그리고 목회자 지망생들에게 신선함을 주었으며,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 목사의 강의에 불만을 품었다가 징계를 받은 51명의 학생 가운데 8명이 전학하는 등 시작 단계에서는 인기가 있었다.

교장에 취임한 박형룡 박사는 헌트(B.F. Hunt: 한부선) 선교사 등 미국에서 1920년대 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일어났던 신학논쟁에서 메이첸(J.G. Machen) 교수파 노선을 고집하였다. 이로 인하여 당시 한국에 와 있었던 미국 북장로회,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그리고 호주 장로회 선교사들과 신학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게 되었다.

노회와 총회 시에 고려신학교 관계자들은 자숙안 준수를 지속적으로 꺼냄으로써 경남노회로부터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 거부라는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나게 되었다. 이에 입지가 좁아진 고려신학교 측은 한국전쟁이 진행 중인 1951년에 ‘경남법통노회’를 별도로 조직하고 1952년에는 ‘총노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인 출발을 선언하였다.

고신파는 제주도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당시 제주도의 주된 통로는 목포를 거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주에서 부산으로 항해하는 선편은 자주 풍랑을 만나 전복되는 사고를 겪기도 하였다. 이 부분을 제주노회장을 역임한 강문호 목사도 밝히고 있다.


​▲ 노회 회무 처리 모습


2. 예장과 기장


1939년 평양신학교가 폐쇄된 뒤 서울의 김대현 장로는 거금 20만 원을 희사하여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 그리고 캐나다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을 대거 교수로 영입하여 학문적 자유와 신앙적 자유를 지키려고 하였다.

해방 이후 자유 왕래가 보장될 때에는 남쪽의 신학생들이 복원된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46년 9월 이후 남북 왕래가 중단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실시되자 경기, 호남, 경상 3지역은 ‘남부총회’를 결성하고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지정하였다.

조선신학교 신학생들은 보수적인 선교사의 신앙을 이어받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김재준 교수의 강의가 자신들의 신앙노선과 맞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947년 김재준 교수의 강의에 반발하였던 학생들이 소위 말하는 ‘학생 51명의 진정서’ 사건을 일으켰다가 총회와 신학교로부터 징계를 당하였으며, 이들 학생 중 8명이 부산 고려신학교로 전학하였다. 총회는 1948년에 평양신학교를 계승한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내에 직영 신학교가 2개가 되었다.

한편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총회 각종 기구가 대구로 옮겨 갔다. 1952년 제37회 대구 총회 시에 2개의 직영 신학교를 각각 폐쇄하고 총회가 운영하는 ‘총회신학교’를 세우자는 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총회신학교의 학장은 감부열(A. Campbell)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 결정에 조선신학교 계열에서는 따르지 않았으며,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 계열에서는 9개 노회(전북, 군산, 김제, 충남, 충북, 경남, 경북, 목포, 제주)의 대표자 47명이 자신들이야말로 ‘법통총회’라고 주장하면서 제38회 총회를 속개하였다. 1954년 6월에는 ‘대한기독교장로회’라는 별도의 독립된 교단으로 출발하였다.

바로 이 무렵에, 즉 1953년 법통총회를 조직할 무렵에 소위 말하는 ‘조신파’를 징계 하기에 이르렀다. 즉 1952년 4월 제37회 총회에서 ‘성경유오설’을 굽히지 않는 김재준 목사를 면직시킨 후, 1953년 5월 제38회 총회에서 이를 재확인함과 동시에 조선신학교 직영 인가를 재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신학교 졸업생을 교역자로 채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제주도 교회가 고신 측 분열 시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가 조신 측 분열 때는 아픔을 겪었다. 서부교회, 모슬포교회, 중문교회, 화순교회가 분열하였으며, 동부교회는 조신 측에 가담하였다. 이들 교회가 분열하는 아픔에는 총회의 지시도 있었다. 총회는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에게 면직 처분을 내린 것처럼 각 노회에게도 김재준 목사를 따르는 목사에게 동일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제주노회도 재판국을 개설하고 이윤학 목사와 조남수 목사에 대한 면직 처분을 내렸다.


가. 서부교회 분열
이북에서 피난 온 이윤학 목사는 1948년부터 서부(성내)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윤학 목사는 독신이었던 관계로 고원숙 장로의 집에서 3년이 넘도록 기숙하면서 지냈다. 이 시기에 이윤학 목사와 당회 수석장로인 고원숙 장로 사이에는 깊은 정이 쌓이고 쌓였다. 제주노회 출신으로 조선신학교 계열의 법통총회에 참석한 사람이 이윤학 목사와 조남수 목사였다.
강문호 목사는 총회 지시대로 이윤학 목사에 대한 면직 처분을 내리고 서부교회를 방문하여 노회의 판결문을 낭독하여 이윤학 목사의 면직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총회와 관련된 행정 절차는 여기에서 끝났지만 해당 교회의 아픔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해당 교회가 실제로 당면한 문제는 교회와 예배당 건물에 대한 소유권 논쟁이었다. 이윤학 목사에 대한 면직 처분을 낭독하는 순간, 이윤학 목사를 지지하는 교인들이 예배당을 장악함으로써 반대하는 교인들은 자연히 예배당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로부터 이윤학 목사를 지지하는 측을 조신 측이라고 하고 반대하는 측은 장신측 혹은 노회 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신 측은 예배당 안에서, 그리고 노회 측은 교회 마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노회 측이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서 한 예배당을 양분하여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순서로 예배를 드리다가, 양측이 서로 합의하여 ‘격월제 윤번식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조신 측에서는 기존의 이윤학 목사가 담임목사로서 설교와 더불어 목회 활동을 지속한 반면에 노회 측에서는 목회자가 없었기 때문에 고원숙 장로와 조화행 장로가 윤번으로 1년간 강단을 지키다가 1954년에 나기환 목사가 부임하였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기독공보》에도 서부교회의 소식이 게재되기 시작하였으며,
《제주신보》에도 실리게 되었다.


서부교회: 재산상의 문제로 한신파와 장신파 간의 분쟁이 발생함. 그러다가 법적인 재산권 문제가 1959년 2월에 노회 측에 유리하게 됨으로써 조신측에서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대법원 민사부는 광주고법에 재심토록 환송함으로써 노회 측에 유리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진행되다가 1960년 1월에 일단락되었
다.


제주서부교회: 8년간 이끌어 온 내분은 장신(대한예수교장로회) 조신(기독교장로회)양파에서 교회 재산을 이등분해 분리함으로써 평화적 해결.


평화적 해결이란 노회 측은 제주노회의 건물과 그 대지를, 조신 측은 원 예배당과 그대지를 소유하고 각각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나. 모슬포교회 분열


​▲ 조남수 목사와 모슬포교회 성도들


모슬포교회는 1947년 7월부터 조남수 목사가 서귀포교회를 사임하고 부임하여 목회함으로써 부흥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948년 4·3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구하고 교회에 출석함으로써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제주도 전체 교회 가운데에서 재정면에서도 가장 여유로운 교회였다. 조남수 목사는 예장 측과 기장 측의 분열 당시에 이윤학 목사와 손을 잡고 기장 측에 가담함으로써 모슬포교회는 기장 측과 예장 측으로 양분되었다.
이때로부터 재산 분할에 관한 소송이 시작되었다. 소송은 만 3년 동안 지속하다가 1956년 3월에 광주고등법원의 판결로 종결되었다. 즉 “분열되기 전의 교회 재산은 원교회인 대한예수교장로회에 재산권이 있다”라는 평결이었다. 이 부분은 《제주신보》에서도 보도하였다.


광주고법
지난해 4월 장신파와 한신파 간의 모슬포교회당 소유권 문제로 발생한 분쟁의 2심에서 장신 측의 승소 판결을 내림.50) 

기장 측에서는 교회 건물을 철거해 가지고 나갔으며, 예장 측에서는 전국 교우들의 원조를 받아 1960년 12월 원래의 대지 위에 새 교회당을 신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다. 중문교회
중문교회는 타 지방과 타 교회의 분열이 잦아들던 1956년에 시작하였다. 특히 중문교회의 분열은 개인 감정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찌되었거나 양쪽으로 나뉜 교인들은 협정에 의하여 예배 시간을 각각 달리함으로써 한 예배당을 무난히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7년 12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자 성가 연습 때문에 조신 측에서 오후 1시까지 예배당을 사용함으로써 양측은 드디어 감정싸움으로 치닫고 몸싸움으로 비화하였다. 결과적으로 양측의 대표가 서귀포경찰서에 구금되는 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양측은 다같이 교회의 덕을 상실하였다는 깊은 뉘우침을 가졌다. 상황에 대한 인식이 여기에 이르자 조신 측은 새로운 예배당을 신축하여 이동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 수습되고, 양측은 그렇게 두 교회로 갈라섰다.


라. 동부교회
제주 동부교회는 강흥수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제반면에서 뛰어난 목회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로 쉽게 이전하게 되고 뒤이어서 윤명렬 전도사가 잠시 사역하였으며, 1956년 초에 최의종 목사가 부임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조신 측과 노회 측으로 당회가 양분되어 있어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있었으므로 중립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렇지만 양분된 상황에서 중립을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으며, 조신 측에서는 최의종 목사가 장신 측(노회측)에 가깝다고 지목됨으로써 당회 시에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신 측과 장신 측은 한 예배당의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신 측(노회 측)이 교회를 떠나서 제주영락교회에 합류함으로써 교회의 분규는 일단락되었으며, 예배당 건물은 조신 측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그 밖에도 화순교회가 나뉘었으나 중문교회와 화순교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한 교회로 연합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어찌되었거나 제주도의 교파 분열은 타 지방에 비하여 비교적 쉽게 마무리되고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은 것으로 본다.


3. 통합과 합동의 분열


한국교회의 분열에서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은 명분이 없는 교권 다툼이며 지방색의 표출에 따른 감정 다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표면상으로는 에큐메니즘을 내세운 세계교회협의회(WCC)와 복음주의를 부르짖는 국제교회협의회(ICCC)의 싸움의 연속이지만, 내용면에서는 해방 이후 남하한 기독교인들이 남쪽의 기존 기독교인들과 연대하는 가운데서 생긴 힘의 대결이었다.

1959년 제44회 대전 총회에 제주노회 대표로 참석한 강문호 노회장은 노진현 총회장의 정회 선언에 불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어느 한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관망하는 자세를 유지하였다. 그는 1959년 10월 제주노회에서 “제44회 총회가 법적 질서를 찾아 속총회로 모일 때까지 어느 한 편에도 총대를 파견하지 않고 옵서버(참관자)를 보내어 총회의 화평에 노력하자”라고 발의하여 노회는 이 안을 채택하였다. 이어서 강문호 목사는 중립적 입장을 가진 목회자들이 모이는 ‘충무로교회 기도회’에 참석하여 양측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서 선교 중이던 각국 장로교 선교회는 어떠한 입장이었는가? 캐나다 장로교 한국선교회는 기장 측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나머지 세 장로교회, 즉 미국 북장로교회, 미국 남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는 예전 기장 측과의 분열 시에 있었던 과오를 범치 않기 위하여 ‘세 선교부 통합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방안에 협력하는 측은 연동 측(통합 측)이고 거부하는 측은 승동 측(합동 측)이었다. 그리고 연동 측(통합 측)은 세 선교부 통합방안을 받아들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통합 방안’을 제시하였다.
제주노회는 강문호 노회장의 판단에 따라 세 선교부 통합 방안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통합 방안을 지지하기로 하였다. 이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말씀으로 된 성경에 의해서 세워졌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자라 왔음을 잘 아는 까닭에, 또 교회의 대다수인들이 열렬히 교회의 통일을 원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들은 정중히 아래와 같이 결의함.

(1) 한국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1920년 이래 평양신학교 교수들의 신앙 고백에서 진술된 신앙을 재긍정하는 토대 위에 재통일을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한국교회의 75년의 보수적 통일을 고수한다
(2) 통합 총회는 2월 17일 하오 2시 새문안교회 예배당에서 소집한다. 이 총회의 준비위원은 오석주, 이기혁, 강문호, 이권찬, 김세진, 유재한, 타요한, 서두화, 감의도, 임옥, 김삼대
(3) 총대들은 사망하거나 병으로 인하여 출석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전 총회에서 인쇄된 총대로 한다. 경기노회는 분열 직전 노회장이 노회를 소집하여 총대를 선출하여 온다.
(4) 한국교회는 WCC에 대한 심각한 의견 차이 때문에 교회의 화평을 위해 이를 탈퇴한다.
(5) 한국교회는 WCC적 에큐메니칼 내에 자유주의적이요 용공주의적이요 세계 단일교회를 지향하는 어떠한 운동에도 반대한다.
(6) 한국교회는 교회나 그 기관단체가 ICCC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백히선언한다.
(7) 1959년 9월 24일에 구성된 신학교 이사회는 즉시 신학교를 개편하고 75년간이나 전통을 지켜 온 노선을 지킨다. 이사회는 이 총회에서 인준을 얻기 위해 교장을 지명한다.
(8) 1960년에는 우리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문제에 대하여 아무 성과 없고 쓸데없는 쟁론을 중단시키고, 또 성경공부와 전국적 복음운동을 강조할 것을 각 교회에 호소한다. 위에서 특별히 강조한 것들은 통합 총회가 개회하기 전에 모이는 2월 15일 하오 7시부터 17일 정오까지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이는 수양회에서부터 착수한다.51)

강문호 목사가 새문안 통합총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강문호 목사의 위치를 말한다. 강문호 목사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제주노회 소속 모든 교회가통합 측 교회에 잔류할 수 있게 하였다.


4. 이 시기의 교회들


제주도 교회들은 교파 분열의 시기(1953~1959년)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서부교회와 모슬포교회는 분열로 인하여 교세가 양분되었지만, 양 교회가 또다시 분열 이전의 교인 수를 확보함으로써 오히려 교인의 증가를 가져왔다. 또한 동부교회는 영락교회의 터전을 확고하게 해주는 밑거름이 됨으로써 교회의 분열은 교회의 터전을 확고하게 다지는 역할을 하였다.

오히려 이 시기는 1950~1953년에 이르는 피난민 기독교인들이 보여 준 신앙적 열정이 제주도 교회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고 또한 예배당을 신축하는 등 부흥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가. 새롭게 시작한 교회
이 시기에 신설한 교회는 통합 측에서 6개 교회이고 기장 측에서는 3개 교회이다.

통합 측 6개 교회는 감산교회(1955년), 옹포교회(1956년), 모슬포중앙교회(1956년), 중엄교회(1958년), 태흥교회(1960년), 하귀교회(1960년)이다. 그리고 기장 측의 3개 교회는 제주성풍교회(1956년), 서귀포중앙교회(1957년), 세기교회(1960년)이다.

감산교회의 시작은 이러하다. 감산리의 신자 김왈수 씨 가정이 김연순, 오무생 등을 전도하여 화순교회에 출석하던 중 화순교회가 기장 측으로 기울자 김왈수 집사 외 23명 정도가 놀대왓 김왈수 집사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중문교회 오공화 장로가 주일마다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하였다. 교인 수가 점점 늘어 나자 모슬포 안식교회 감산 기도처였던 당그터 예수집으로 예배 장소를 옮겼으며, 계속해서 교인이 늘어나자 서동 김금선 씨 집으로 옮겨서 예배를 드렸고, 모슬포중앙교회 김봉서 목사가 최초의 당회장으로 성례식을 인도하기도 하였다.

김봉서 목사는 모슬포중앙교회 윤제칠 집사를 파송하여 전도인으로 봉사케 하였으며, 군인교회의 지원 아래 1958년에 24평의 예배당과 12평의 사택까지 마련하여 교회로서의 위상을 갖추었다.

여기에서 모슬포 제1육군훈련소 내에 있었던 군인교회(강병대교회)에 대하여 언급하려고 한다. 초기부터 이 교회에서는 부대 내에 거주하는 군인들과 부대 밖에 거주하는 군인 가족들이 함께 예배를 드려왔다. 그러다가 훈련소가 철수함에 따라 소수의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예배를 드리다가 1956년 1월에 모슬포중앙교회로 이름을 개칭하여 제주노회에 가입하였다.


나. 예배당을 신축 또는 증축한 교회
1950년대에 예배당을 신축 혹은 증축/개축한 교회는 하도교회, 화순교회, 귀덕교회, 내도교회, 월령교회 등 5개 교회이다.
이들 교회의 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도교회는 1944년 8월에 하도리의 고성보, 김봉언, 김용택 등 3명이 세화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면서 1945년에 김봉진, 김봉학, 김영진, 송옥춘, 김복순 등이 결신하자 하도리에 기도처를 세우게 되었다. 이들은 1951년 10월 8일에 김봉언 씨 주택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개조하여 첫 입당예배를 드린 후 1958년 8월에 하도리 2162번지에 대지 120평에 16평 규모의 예배당을 신축함으로써 세화교회로부터 분립하여 10월 8일에 설립예배를 드렸으며, 첫 번째 전임 교역자는 하시현 전도사였다.

화순교회는 기장 측과 예장 측으로 분열한 이후 모슬포중앙교회의 손원보 장로의 보살핌으로 유지되는 동안에 여러 명의 전도사 교역자를 거쳤다. 그러던 중 1958년에 미군 케메지 군목의 협조로 조그마한 예배당을 신축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교세는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귀덕교회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피난민 교인들의 합류로 1951년 5월 6일에 문을생 집사 집에서 한림교회의 기도처로 시작하였으나 7년 동안이나 문을생 집사의 집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그러다가 현 소재지인 3740-2번지에 예배당 28평과 사택 12평의 건물을 완공함으로써 1958년 10월 7일 한림교회로부터 분립하여 귀덕교회로 설립하였다.

내도교회는 이기풍 목사에 의하여 설립된 이후로 줄곧 초가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57년 12월에 별세한 김유진 영수가 760평의 땅을 기증함으로써 그 땅을 매매하여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월령교회는 협재교회에서 1950년부터 분립하여 고인화 집사가 기증한 가옥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그러한 와중에 몇 교인들이 기장 측으로 감으로써 더욱더 교세가 약화되었다. 1959년에 제주고등성경학교 출신의 오만식 전도사가 부임하여 교세는 든든해지기 시작하였으며, 그로부터 1년 반에 이르러 교인수는 유년 55명, 장년 41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동안 사용하여 오던 예배당은 낡고 비좁았을 뿐만 아니라 붕괴의 위험까지 있어서 오만식 전도사가 교인들과 힘을 합쳐서 1960년에 18평 규모의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다.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의 지원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는 한국전쟁이 종식된 후 1954년 6월부터 한국에 나와서 선교활동을 개시하였다. 제주도에 관한 선교협력은 목포 선교부에서 맡았으며, 로버트슨(Robert K. Robertson, Jr.) 목사, 브라운(George T. Brown: 부명광) 목사와 탈마지(J.V.N.Talmage) 목사 부자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제주도를 둘러본 다음에 감산, 예리, 중문, 토평, 위미, 성산, 신양, 애월, 하귀, 중엄 등 10개 교회를 보조하기로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보조를 받은 교회들은 자립으로 가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라. 타 교파의 상황
감리교회는 1950년 피난 성도들로부터 시작한 이래로 1950년대에 하원교회(1954년), 함덕교회(1954년), 그리고 서귀포호근교회(1957년)를 개척하였다. 이로써 감리교회는 1950년대에 9개 교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제주지방 50년사》는 이렇게 말한다.

제주지방 9개 교회는 평균 한 교회의 장년 50명, 어린이 60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일 아침에 교회에 나오지 못한다. 수전을 낼 수 없어

서……제주중앙교회는 150명이 주일 아침에 나온다. 수전이 800환쯤 걷힌다.52)
1950년대에 세워진 교회들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0) 〈제주신보〉 1956. 3. 16.
51) 제37회 제주노회 회의록(1959), p.11-12.
52) 《제주지방 50년사》, 2005, p.104.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