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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24, 2016


제3장
한국전쟁과 제주 교회


한국전쟁은, 세계사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냉전체제의 피할 수 없는 이념 대결의 결과였다. 그러나 한민족에게는 씻을 수 없는 동족상쟁의 피흘림이었으며, 민족의 분단으로 이어진 가슴 아픈 분열이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일제 통치 기간에 신사참배에 참여한 죄에 대한 씻음이며 정결의식이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한국의 한쪽을 남겨두셔서 피할 길을 주셨으며, 제주도는 전쟁 기간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도피성이었다.

제주도에는 약 5~6만 명의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1950년 7월 16일에 제주와 성산포에 약 만여 명의 피난민이 도착하고, 이어서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개입 이후 후퇴하는 인파와 함께 많은 피난민들이 도착함으로써 5만에서 6만에 이르는 피난민이 제주도에서 생명을 건졌다.

이 가운데 기독교인은 얼마나 되었을까? 당시 기독교인들이 즐겨 보던 잡지 《신앙생활》은 피난 교인이 9,663명이고, 목사가 180명이라고 보도하였다.29) 피난민들은 주로 제주시 삼도이동, 일명 ‘무근성(묵은성)’으로 알려진 곳에 천막촌을 마련하고 거주하였으며, 그 외에도 모슬포, 서귀포, 한림 등 제주도 전역에 퍼져 나갔다.

피난민들에게는 정부에서 무상배급으로 천막과 소량의 식량과 땔감을 제공하였으며, 기독교인들에게는 선교부의 지원이 조금 있었다. 그렇지만 피난민의 응급 대피 생활이란 처음부터 가난과 추위, 공포와 불안 등으로 가득하였다.


​▲ 피난민교회인 모슬포교회(1951)


육체적인 어려움과 더불어 심적이며 영적인 고통은 자연히 이들에게 신앙의 열정을 회복시켜 주었다. 서귀포 지역에는 2,500여 명의 피난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피난 기독교인들은 제주시에 영락, 도두, 화북, 한라교회를 세웠고, 동쪽 조천 지역에서는 신촌, 함덕교회를 세웠으며, 서귀포 지역에서는 시온, 보목, 효돈, 토평교회를 세웠고, 한림 지역에서는 비양도, 월령교회를 세웠고, 추자도에서 추광교회를 세웠다. 그 밖에 감리교회와 성결교회에서도 제주도에 교회를 세움으로써 제주도는 이제 다교파 교회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피난민들은 목회자 양성을 위한 대한신학교 분교를 설립하였으며, 단기 성경학교를 운영하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피난민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 부분들을 차례대로 알아보고자 한다.

1. 피난 기독교인들의 열성
피난 기독교인들은 ‘피난민 교회’를 세웠다. 이환수 목사와 김재호 목사, 이인식 목사, 오응식 목사 그리고 김봉하 장로와 나송덕 장로 등이 주축이 되었으며, 이환수 목사와 김재호 목사가 담임목사직을 맡았다.
그 밖에도 피난민들은 제주도 전역에 흩어져 교회를 세우고 신앙의 새로운 면모를 제주도 기독교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교회 출석의 엄수, 많은 액수의 헌금, 뜨거운 기도생활, 그리고 생활의 모범 등은 제주도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신앙생활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비록 예배당 건물은 판잣집이었으나 교인은 수백 명에 달하였으며, 이 판자 교회야말로 피난 성도들의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요, 성도들 서로가 피난 생활의 괴로움과 슬픔을 달래며 하나로 뭉쳐지고 협력하는 신앙생활의 본거지였다.30) 


▲ 1951년 모슬포에서의 부활절 예배


피난민들은 기존 제주도에 있는 교회들에도 출석하였다. 장로교인들은 주로 서부교회에, 감리교인들은 동부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렸다. 1951년 11월 서부교회 예배 참관기를 통하여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마침 감사주일을 당하여 비를 맞으며 운집한 교인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 장엄한 합창과 목사 사중창, 엄숙히 예복을 입은 담임목사의 위엄은 본 교회에 조금도 부러울게 없다. 부모 잃고 가정 잃은 저들에게 무엇이 있으련만은 필하고 감사헌금을 드리니 이백만 원이란다. 과부의 주머니에서 드린 연보가 이백만 원이라고! 환난 중에서 감사, 역경 중에서 감사! 이것이 바울이 경험하던 신앙의 세계이다. 저 영국의 청교도 신앙이다.31)


피난 기독교인들은 하루속히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옛날의 모습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큰 바람이었겠지만, 전쟁이 지속되고 현실이 어렵게 되자 더욱더 분발하자고 각오를 다지면서 기다리는 길밖에 없었다. 이러한 취지에서 1952년 2월에 ‘이북 기독교 신도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날의 모습을 《기독공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이북 기독교 신도대회
지난 2월 21일부터 23일까지 서부교회에서 신앙 부흥과 교회 재흥을 목적하고 이북 신도대회가 열렸다.……이번 대회는 기독교인 피난민들이 제주도에 작년 1월21일 제1착으로 입도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이므로 더욱 감개가 깊었다. 그리고 3일간 집회시간에는 박형룡 박사께서 설교를 담당하셨다.32)


대회의 분위기는 한국 지도를 강단 뒤에 크게 그리고서 “싸우며 이기자”라는 표어를 내걸었으며, 박형룡 박사의 설교는 이사야의 ‘포도원 노래’를 중심으로 한국이라는 포도원을 되찾아 ‘시온의 노래’를 하루속히 부를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로 끝을 맺었다.

이렇게 제주도에서 피난민들이 열성으로 통일을 기다리는 사이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제주도 선교’를 하나의 사업으로 택하였다. 즉 ‘장로회 제주 전시대책전도부’에서는 그동안 60명의 전도인을 파송하여 제주도 전역에서 전도 활동을 진행하여 왔으나, 경비 부족으로 인하여 1952년 2월에 중단하였다. 그 대신에 총회 전도부 간사 이무호 씨를 통하여 모금한 500만 원으로 우선 도와주어야 할 8개 교회를 지원하게 되었다. 지원을 받은 교회는 8개 교회로서 ‘화북, 함덕, 신산, 성읍, 강정, 협재, 비양도, 하귀’ 교회이며, 제주노회와 협력하여 이 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33)


2. 군인교회의 설립


제주도는 한국전쟁 기간에 육군 제1훈련소와 해군사령부가 세워졌으며, 자연히 이들 부대 내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훈련소 혹은 군병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군인교회는 크게 부흥하였으며, 군인들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


가. 육군 제1 훈련소 교회
제주도는 일제 강점기 말엽에 일본군의 최후의 항쟁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 시기에 모슬포 지역에는 일본군(오무라 부대)이 주둔했으며, 그들이 주둔하던 자리에 1946년 육군 제9연대를 창설하였으나 4·3사건 이후 해체되고, 1951년 3월 31일 육군 제1훈련소를 창설하였다.
군부대에는 장병 위문시설이 있었는데, 그 장소를 일명 ‘댄스 홀’이라고 하였다. 이 시설을 교회로 바꾸는 데 가교 역할을 한 사람이 훈련소장 장도영 준장이었다.
이 부분을 《기독공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육군 제1훈련소에는 과반 댄스 홀까지 시설하고 사관들의 일시적인 위안을 주고 있었으나, 군의 풍기뿐 아니라 여러 가지 방면으로 폐단이 많아 사회의 비난을 사고 있는데, 장도영 준장이 부임한 이래 철저히 단속할 뿐더러댄스홀을 육군훈련소 소속 군인교회로 만들고 예배하기 시작하여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많이 생기는 동시에 구령운동에 하나의 횃불이 되어 일반사회의 칭송이 자자하다 한다.34)


나. 해군병원교회
제주도 해군교회는 민간인 위두찬 목사가 자원 군목으로서 해군 입원 병사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함으로써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제주의 해군교회는 해군병원장 백기호 중령의 열렬한 후원을 받아 장족의 진보를 하며 군목 위두찬 목사의 신앙 열성으로 현재 100여 명의 신도 장병이 예배에 참석하고있다. 지난 8월 3일 주일에는 성례식이 있었는데 세례받은 이가 15명, 학습 선 이가 13명에 달하였다. 앞으로 교회당을 신축하기 위하여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35)

위두찬 목사는 피난 온 이환수 목사 등을 초청하여 해군 환자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수차례 진행하였다. 이에 교회가 부흥하게 되자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모금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부산 해군부인회와 제주도 내 각 교회들의 후원으로 200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부분을 《기독공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제주도 해군교회
제주도 해군 제3병원에서는 민간인 목사 위두찬 씨가 1년 전부터 군병원에 근무하면서 활동하던 중, 군목실을 설치하고 지난 9월 15일에 군인교회 건축을 시작하여 10월 20일에 준공하였는데, 건평 30평에 3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총 공사비 5백 5십만원 중 2백만 원은 해군부인회에서 보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예배당 건축 시에 해군 상이군인 20여 명이 매일같이 봉사하였고, 인근 피난 교우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26일 주일에는 준공예배를 드렸다.36)
해군교회에는 ‘미실회 제주지부’의 후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1952년 크리스마스 예배에서는 21명에게 세례와 학습을 베풀 수 있었다.37)


3. 피난 기독교인들의 교육

피난 기독교인들은 제주도 삼도이동 무근성(북초등학교 뒤쪽)에 피난촌을 형성하고 신앙생활을 지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이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한 단기성경학교와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대한 신학교 분교를 설치하였다.


가. 단기 특별성경학교

해방 이후 한국전쟁 발발까지 제주도 교회는 미약한 상태에 있었는데,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목회자 혹은 교회 내 평신도 지도자층의 빈약이었다. 이에 피난 성도들은 제주도에서 제주노회와 협력하여 피난민 교회 내에 단기 특별성경학교를 두기로 하였다.

1951년 10월에 시작한 단기 특별성경학교는 보통과 5개월, 고등과 5개월, 그리고 교역자 양성과는 7개월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당시 피난 상태에서 특별한 사업을 일으킬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주간과 야간으로 나누어서 수업하였으며, 1952년 2월 80여 명이 등록하여 수업을 받고 있었다. 1952년 3월에 보통과와 고등과, 5월에는 교역자 양성과가 각각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이 학교에 대한 보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주성경학교 소식
외로운 섬에서 열심 공부
제주읍에서는 피난 목사들이 제주노회와 연합하여 단기 특별성경학교를 개교하고……작년 10월 17일부터 시작하여 제1학기는 지난 12월 15일까지 마치고, 제2학기는 금년 1월 2일부터 개학하여 피난민 학생들과 보통 학생들 80여 명이 주야간 2부제로 수업하는 중이라……그리고 그 직원과 강사는 다음과 같다.

교장: 이윤학 목사

보통과장: 강원모 목사

고등과 및 교역자 양성과장: 윤필성 목사

서무와 회계: 김재호 목사

강사: 오응식, 이인식, 강원모, 윤필성, 현태룡, 이환수, 이윤학, 김용복, 김성칠, 박윤삼, 김재호, 김지호.38)


이 학교는 단기 특별성경학교라는 성격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계속하여 학생을 모집하였다는 보고나 졸업식을 거행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나. 대한신학교 분교
제주도는 오래 전부터 교통의 불편함과 기독교인 인구의 부족으로 자체적으로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운영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러다가 피난 목회자들이 대거 유입됨으로써 신학교 교수진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학생들도 피난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대한신학교는 1952년 9월에 이르러 대학령에 준한 인가를 문교부로부터 받고 제주도와 지리산 개척전도단을 파송하는 등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에 있었기 때문에39) 제주도 피난 기독교인들의 요구에 부합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52년 9월 15일에 70여 명의 학생으로 대한신학교 제주분교 개교식을 가졌다. 이 부분을 이렇게 보도한다. 

대한신학교 제주 분교 개교
제주읍에서는 아직도 피난 기독교인이 수천에 달하는데, 그중에는 신학을 원하는 이들이 다수 있으나……대한신학교 제주 분교를 제주에 두기로 생각하고 부산 본교 교장 김치선 박사와 연락 교섭하던 일이……지원자 70여 명에 달하여 9월 15일에 개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당일 밤 7시 반에 피난민 제주읍 교회에서 이사장 임인식 목사의 사회로 제주노회장 강문호 목사의 복음적인 설교에 이어 이사들과 강사들의 소개가 있은 후 제주 초유의 신학교 개교식이 끝났다.……예과에 60명 본과와 별과에 12명 합하여 72명이나 되어……교직원은 아래와 같다.


교장: 윤필성 목사 교감: 김재호 목사
강사: 이인식 목사, 강문호 목사, 오응식 목사, 이환수 목사, 현태룡 목사,
우상필 목사, 김성칠 목사, 강원모 목사, 박윤삼 목사, 우호익 장로, 김덕삼 선생
서무와 회계: 김봉로 장로
후원회 회장: 이환수 목사40)


대한신학교는 1기생 모집으로 그쳤다. 그렇지만 이 신학교는 제주도 신학계 역사에서 최초로 제주도에서 학생을 모집하고 가르쳤다는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다. 피난 중학교 설립
피난 기독교인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우호익 장로를 교장으로 세우고 피난 남녀중학교를 설립하였다. 700여 명의 학생들이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자신들이 처한 현재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고 또 신앙적인 열성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부모들의 신앙적 각성이 결합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4. 부흥회 개최


제주노회는 선교사 혹은 전도목사 시절에는 매년 초에 선교사들과 한국인 협력자들이 찾아와서 달성경학교와 부흥회를 인도해 줌으로써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곤 하였다.이러한 전통은 지속적으로 이어져서 제주노회 설립 이후에도 각 교회가 매년 1차씩 부흥회를 인도한 것을 보고하여 왔다.

그러다가 4·3사건과 한국전쟁 이후 교회들이 부흥회를 더욱더 활기차게 개최함으로써 교회 부흥의 발판을 삼았다. 1951년 한 해 동안에 진행되었던 부흥회를 1952년 노회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부흥회가 교회 발전의 큰 역할을 하였으며, 각종 사회적인 사건으로 영적인 기갈에 목말라하는 교인들에게 큰 위로와 영적인 에너지를 제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영적 에너지는 1952년부터 1953년 사이에 상당히 많은 교회에서 교회 건축이라는 대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되었다. 그리하여 예배당을 신축한 교회는 6개(도두, 예리, 효돈, 보목, 화순, 표선), 재건축한 교회는 2개(삼양, 서귀포), 증축한 교회는 4개(서부, 동부, 성산포, 법환), 예배당을 수리한 교회는 8개(중문, 세화, 두모, 조수, 애월, 금성,고산, 용수)이다.

​30) 《제주선교 70년사》, p.69.
31) 《기독공보》, 1952년 1월 28일자.
32) 《기독공보》, 1952년 3월 10일자.
33) 《기독공보》, 1952년 8월 4일자.
34) 《기독공보》, 1952년 2월 30일자.
35) 《기독공보》, 1952년 9월 1일자.
36) 《기독공보》, 1952년 11월 14일자.
37) 《기독공보》, 1953년 1월 5일자, 1월 19일자.
38) 《기독공보》, 1952년 3월 10일자.
39) 《기독공보》, 1952년 10월 6일자.
40) 《기독공보》, 1952년 10월 13일자.​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