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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24, 2016


 

3. 4·3사건과 제주 교회의 성장


제주도의 4·3사건은 제주도민들에게 교회의 위상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조상 숭배를 배격하는 서양 외래 종교로 인식되어 배척당하였지만,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전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생명을 살리는 종교로 인정받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교회의 목회자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그리고 외지에서 제주도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하여 파송된 군인들과 경찰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많았으며, 이들의 배려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므로 이들은 기독교를 다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제주도민들의 마음 문이 열리는 것을 알고 제주노회는 1949년 7월에 제주도 부흥전 도대를 조직하여 전역에 걸친 부흥집회를 계획하였다. 조직표는 다음과 같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제주도 전역에 걸쳐서 철저하게 호별 방문을 통한 개인적인 설득과 권유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였다. 아직 치안이 완전하게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호별 방문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신설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세워진 교회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서귀포를 포함한 남제주 지역에서 네 교회, 북제주 지역에서 두 교회, 제주시에서 한 교회가 세워졌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4·3사건의 피해가 가장 컸던 남제주 지역에서, 그것도 서귀포 지역에서 개종자가 가장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증명되었다.

앞에서 말하였듯이 4·3사건으로 인하여 피해를 크게 입은 교회, 바로 예배당이 불타버리고 한 사람이 순교한 교회가 서귀포교회이다. 또한 서귀포 지역에서 가장 철저한 공산주의로 무장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전도대회의 결과는 표선교회까지 포함하여 무려 네 교회가 세워짐에 따라 이 지역의 전도를 맡았던 한기춘 목사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서귀포교회는 이 당시에 목회자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총회로부터 전도목사를 파송받게 되었다.
한기춘 목사는 제35회 총회에서 제주도 전도목사로 파송받고 1949년 5월부터 서귀포교회에 상주하면서 서귀포 지역 일대에서 전도목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귀포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전소됨으로써 박경옥 영수, 오정순 집사 등의 집에서 예배를 인도해 왔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알고 최영자 교우가 자기 소유의 대지 200평을 성전 부지로 제공하였다. 그러자 홍영옥 교우가 자기 소유의 대지 300평과 가옥 53평의 절반을 교회에 헌납하기로 하였다.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 가운데 헌금이 답지하였다. 대구에서 피난 온 신임복 집사는 성종 대품을 기증하고, 강유찬 씨는 2삭간 6천 원, 3삭간 3천 원을 기증하였다. 서귀포교회는 기독청년 하령회를 실시하고 소년 밀알회를 조직하여 60여 명의 소년들이 예배를 드리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여기에 소실된 교회 부지 보상금으로 15만 원과 노회에 답지한 구제금 가운데 13만 원을 확보하였다. 재건축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그리하여 한기춘 목사는 교회 재건축을 위하여 상경하여 90만 원을 모금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서귀포교회는 홍영옥 교우가 제공한 대지와 집을 팔아서(약 300만 원 상당) 그 가운데 절반의 금액으로 최영자 교우가 제공한 터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서귀포 교회는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상황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이어서 피난 기독교인들이 몰려옴으로써 부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1년 5월 총회에서는 이렇게 보고한다.


제주도 서귀포에 한기춘 씨를 전도목사로 파송하였던 바, 그의 열심 봉사로 양호한 결과를 얻었사와 금번 해 교회는 자립교회로 한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하여 지난 2월에 위임식을 거행하였사오며 제주노회에서 서귀포 사역을 안덕면으로 옮겨 달라고 청원하옵기로 동면의 오석유 목사를 거년 4월부터 파송하여 전도 중 많은 재미를 보고 있사오며.28)


이렇게 교회가 부흥함으로써 한기춘 목사는 이경준 전도사를 청하여 1950년 1월부터 시무하기 시작하였으며, 탁명숙 선생(여전도사)을 청빙하여 전도 업무에 전념케 하였다.


4. 제주 선교에 협력한 인물들과 기관들


가. 여러 신앙인들의 헌신
제주도 교회가 4·3사건으로 인하여 피해도 입었지만, 동시에 부흥의 기회로 삼음으로써 여기에 여러 단체와 여러 사람들이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둘째는 일립선교회, 셋째는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넷째는 남대문교회 남전도회, 다섯째는 기독교인으로 제주도에서 근무하던 군인과 경찰들이었다. 우선 첫째부터 넷째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예배당이 불타버린 교회들에게 1949년 총회 이후에 20만 원씩 지원해 주었으며, 현장 파악을 위한 답사단 겸 위문단을 파송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노회를 위해서 30만 원을 지원하고, 전도목사 한기춘 목사를 파송해 주었다. 특별히 애월교회를 위해서 ‘일립선교회’는 이도종 목사의 순교 이후 김윤옥 전도사를 파송하여 애월교회와 금성교회를 돌보게 하였다. 총회 산하 여전도회 전국연합회에서는 4·3사건 이전부터 강형신 여전도사를 지원하여 제주도 여성 선교에 앞장서게 했고, 한라교회를 맡고 있던 탁명숙 여전도사까지 지원함으로써 두 여전도사는 제주도 전역을 순회하면서 ‘부인조력회’와 제주도 지교회의 여전도회를 돌보았다. 서울 남대문교회 남전도회는 개교회의 개별단체에 불과하였지만, 최희준 목사를 파송하여 성산포교회를 중심으로 성산포 지역에서 전도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렇게 기관 혹은 개인이 4·3사건 이후의 제주도 교회의 부흥에 협력하였고, 실제적으로 제주도 현장에서 제주도 교회의 편익을 위해서 크게 협력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아닌 기독교인 군인이나 경찰들이었다. 여기에서 한 사례씩 설명하려고 한다.


1) 김창준 순경(서울 영락교회)
한국전쟁 이후 피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기 시작하였으나 아직도 4·3사건의 후유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인적이 드문 피난민촌 지역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쉽지않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교인들의 집을 순회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무릉지서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김창준 순경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예배 시간에 맞춰서 경비를 서도록 순경들을 배치하는 등 안전 조치를 취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열심히 전도함으로써 매주일 100여 명의 성도들이 모여 주일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실로 교회의 설립 초기에 자칫하면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 예배 공동체를 건실하게 떠받들어 준 공로자였다.


2) 김병섭 순경(화순교회)
남제주군 화순 지역은 모슬포 지역에 가까워 치안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회집하는 것이 공격의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교인들은 조용히 집에서 예배드리곤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김병섭 순경은 예배의 안전을 보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나서서 지역 사람들에게 전도함으로써 화순교회는 매주일 60명이 예배드리는 교회로 부흥하게 되었다.


3) 김두혁 경사(중문교회)
중문 지역도 치안이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이러한 지역의 치안을 책임진 중문지서의 김두혁 경사는, 불의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혹시 폭도들에게 협력할 수 있는 지역민들을 전도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 결과 예상 밖으로 지역민들이 쉽게 개종하기 시작하였으며, 30여 명의 청장년이 교회에 등록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결과였다.

4) 박용범 순경(서귀포교회)
서귀포교회에는 1947년 5월에 이북에서 남하한 기독 청년 박용범 씨가 찾아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박용범 씨가 서귀포 교인이 되고 약 4개월이 지나서 조남수 목사가 1947년 9월 모슬포교회로 옮겨가자 교회는 설교할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용범 씨는 목회자 역할을 맡아서 설교까지 겸하였다. 그러다가 박용범 씨는 경찰에 투신하여 사찰계 형사로서 교회와 교인들에게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박용범 씨는 20세 중반의 청년 신앙인으로서 경찰이었지만 사찰계 형사였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크게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는 1948년 11월 7일 폭도들에 의하여 교회가 불타고 임명선 씨가 피살되는 어려움을 목도하였지만, 이 정도의 피해로 그친 것도박용범 씨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함병선 대령과 김명 대위(함명교회/봉개교회)
1948년 4·3사건으로 인하여 제주시 봉개동 일대는 주민들이 떠나고 한때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 초에 토벌대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과 작전과장 김명 대위가 봉개동 회복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 마을을 재건하면서 이름을 ‘함명리’로 명명하기로 하고 지역 유지를 초청하였는데, 서부(성내)교회 이윤학 목사도 참석하였다.

이윤학 목사는 이 지역 동민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함병선 대령에게 제안하였다. 임병기 동장과 상의하여 파출소 최경홍 경사의 부인 김송남 집사와 몇몇 주민과 청소년들이 파출소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교인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함병선 대령의 적극적인 후원과 동민들의 협조로 봉개동 2415번지 119평 대지 위에 초가 25평 예배당을 1949년 9월 14일에 헌당하기에 이르렀으며, 교회의 명칭을 ‘함명교회’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1971년 4월 노회에서는 행정 동명에 따라 함명교회를 봉개교회로 개명하기에 이르렀다.


6) 김도평 씨와 의귀교회
4·3사건의 참혹한 현장은 보는 사람에게 갖가지 생각을 갖게 하였다. 김도평 씨는 1950년경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복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야 한다는 도전을 받았다. 그리하여 김도평 씨는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개인 전도에 힘씀으로써 상당 수의 교인들이 회집하게 되었다. 여기에 자비량 전도목사 오민식 목사가 참여하여 성경구락부 야학반을 실시하여 지역사회의 생활 개선, 문맹 퇴치 등에 주력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의귀교회는 1953년 봄 개인주택을 매입하고 내부를 개조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동년 10월 19일에 입당예배를 드렸으며, 1954년 1월 정기노회에서 교회 설립을 허락받아 초대 당회장에 미국 남장로회 목포 선교부 소속 라빈선(Robert Kitchen Robinson, Jr.) 목사가 임명되었다.


나.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


​▲ Talmegy, John Van Neste(1884-1964)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는 이기풍 목사 시절부터 제주도 선교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왔다. 그러나 제주도에 학교와 병원까지 세우는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여운을 남길 뿐이었다. 그렇지만 제주교회는 이 부분에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학교와 병원을 요구해 왔다.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완전히 철수하였다가 1946년 9월에 이르러 재차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각 지역의 선교부를 어느 정도 복구한 다음 1947년 6월에 최초의 선교사 연례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제주 노회장 강문호 목사는 제주도에 전임 주재 선교사 한 사람을 파송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연례대회는 제주노회 청원서를 접하고 탈마지 부자(아버지 J.V.N. Talmage: 타마자 / 아들 J. T. Talmage: 타요한)에게 제주도를 방문하여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면서 현황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이에 아버지 타마자 목사는 부흥회를 인도하고, 아내 타애리사는 부인조력회를 독려하는 등 바쁘게 보냈다. 강문호 목사는 이들의 방문에 고무되어서 더 크게 요청하였다.


1. 제주도에 선교사 한 사람을 파송해 주십시오.
2. 도내 각 마을에 1교회 개척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십시오.
3. 고등성경학교와 기독교계 중학교를 각각 하나씩 설립해 주십시오.
4. 기독병원 하나를 설립해 주십시오.

1948년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열린 해방 후 제2차 선교사 연례대회에서 제주노회장의 청원서에 대한 답변을 결정하고 이렇게 회신하였다.


1. 과도한 인력 부족으로 선교사 한 가정을 제주도에 할당해 줄 수 없습니다.
2. 마을 전도 사역에 소용되는 금액의 일부는 제주노회에서 부담해 주시기 바랍니다.
3. 고등성경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병원은 세울 수 없지만, 달성경학교를 도울 수 있는 두 분의 남성 전도사와 한 분의 여성 전도사를 파송하고 그들의 경비를 부담할 수있습니다.
4. 위로위원회에서는 상기 3.의 경우 전도자들과 더불어 간호사 한 분을 파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는 선교사 한 가정을 상주시키는 대신에 탈마지(타마자) 목사가 수시로 제주도를 왕래하면서 사역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그들이 남성 전도사 한 분을 보내겠다고 하여 보내준 사람이 유화평 전도사였다. 그러나 제주노회의 청원은 1965년에 이르러 제주기독센터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1948년 4·3사건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제주도 교회의 발전은 어떠하였는가? 이 부분을 제주노회는 이렇게 정리하였다.




위의 표에 의하면, 총 35개 교회 가운데서 조직교회는 남제주군에 3개(1개는 허위), 북제주군에 10개이다. 미조직교회는 남제주군에 13개이고, 북제주군에는 9개이다. 이로 보건대 남제주군에 위치한 교회들이 북제주군에 위치한 교회들에 비하여 절반 정도의 약세를 보이고 있다.

이 시기, 즉 1951년 3월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보기로 하자. 이를 10년 전인 1942년의 통계와 비교한다면 더욱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1942년과 1951년의 통계를 비교함으로써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서부교회는 동부교회와 이분되었으나 여전히 예전의 출석률을 유지함으로써 갑절의 부흥이 있었다. 이밖에도 부흥한 교회는 김녕, 세화, 용수, 두모, 한림, 법환, 중문, 협재, 조수 등의 교회였다. 이 가운데에서도 성읍교회는 7명에서 16명으로 128%, 김녕교회는 30명에서 60명으로 100% 성장하였으며, 한림은 85명에서 140명으로 64.7% 성장하였다.

반면에 삼양, 모슬포, 고산은 축소되었다. 이들 가운데에서 삼양교회는 100명에서 60명으로 40% 감소, 모슬포교회는 200명에서 146명으로 37% 감소, 고산교회는 107명에서 90명으로 19% 감소하였다.

28) 제36회 총회록, 1951, p.126.​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