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2016.08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24, 2016

 

제2장
4 · 3사건과 제주 교회


제주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주민의 25%에 달하는 6~7만여 명이 전재민(戰災民)으로 귀환하였으나 생활기반은 열악하여 뚜렷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실업율은 매우 높았다. 생필품 부족, 전염병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이들 귀향민들은 해외의 선진 문물을 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학력의 비평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혼돈 상태에 있던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서 사회의 불만 세력에 동조하기 쉬웠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주도의 4·3사건의 불행이 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4·3사건으로 제주의 교회는 17명의 순교자를 낳게 되었고 많은 교회의 건물이 불타고 피해를 당하였지만 수습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므로 많은 생명을 살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중에도 부흥전도대를 조직하여 제주 전역에 전도운동을 전개하므로 교회의 성장이 있었다.10) 

 

1. 제주 4·3사건11)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시작됨으로써 제주도에 미군이 상륙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좌우익의 냉전체제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38선 이북은 소련이 점령하여 공산주의 체제가 굳혀져 가고 있었고 38선 이남은 좌우익의 충돌로 많은 혼란이 있었다.

이러한 때에 미군은 대한민국 각 지역에서 공산당 세력들을 색출하는 데 많은 인력과 비용을 투자하였다. 특히 제주도는 공산 세력들의 은거지로 파악되었기 때문에 미군정 당국과 한국 정부는 이 부분에서 유연성을 보이지 못했다.

발단은 1947년 3월 1일 기념식장이었다. 제주 행정당국은 2월 22일에 3·1절기념행사 모임이 순수한 3·1절 행사 모임이 아닌 좌익계의 주도로 반미와 찬탁12)을 주장하는 모임이기에 3·1절 기념행사준비위원회 해체 명령과 시위 엄금에 대한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25일에는 미 군정장관 스타우드 소령과 3·1절 기념행사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였으며 이를 불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절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집회 주최 측인 안세훈을 비롯한 3-4명은 당시 강동효 경찰서장을 찾아가 장소를 변경하여 허락하도록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이에 안세훈은 “좋소, 그렇다면 당국의 허가 없이 행사를 강행할 테니 그리 아시오” 하고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13)

드디어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제주시민 30,000여명이 모여 진행이 되었으며, 기념행사를 마치고, 시위대는 반미선동구호를 외치면서 관덕정 앞으로 행진하였다. 그리고 기마대장 임영관 경위는 시위를 막기 위해 군중들을 해치다가 제북교에서 관덕정으로 돌아가는 길모퉁이를 돌려 할 때 고빗길에서 서성대던 어린이를 치고 말았다. 어린이가 크게 울어대자 시위 군중들은 “경찰이 어린이를 치어 죽였다” 하면서 경찰에 돌을 던지는 등 거리는 난장판으로 변해 갔다. 당시 현장으로 나오던 강동효서장의 눈에 경비임무를 맡고 있던 기마경찰 한 사람이 부근에 몰려 있던 군중들에게 다리가 붙들려 말에서 끌어 내려지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었고, 간 어디선가 고막을 찢는 듯한 총성이 울려퍼졌다. 결국 이 일로 사망자가 6명, 부상자가 10명14)이 생겨났다.


…… 조병옥(경무부장)이 담화문을 발표해 3·1절 기념행사시 경찰의 발포는 시위가 폭동 수준에 이르러 어쩔 수 없었다고 함.15)


행정당국과 미 군정청 당국자들은 위의 인용문과 같이 폭동으로 인식한 반면에 희생자 가족들은 전혀 다른 입장이었다. 우선, 뜻하지 않은 사태로 발전한 것은, 시위대모두 지나간 다음이고, 구경꾼들만 200명 정도 남아 있던 때였다. 따라서, 이들이 분노하고 거세게 항의하였다 하더라도, 꼭 발포하여 진압할 수준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사상자 6명 중에는 초등학생, 젖먹이를 안고 있는 부녀자도 있었다.16) 또한, 사망자들이 피격으로 쓰러졌던 위치는 광장 한복판이 아니고, 골목 모퉁이거나 경찰서와 상당한 거리가 있는 지점이었다. 더구나 희생자들은, 한 명만 빼놓고는, 등 뒤에서 총탄을 맞은 것으로 판명되었다.17) 경찰이 당시에도 스스로 인정하였듯이,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상태였고, 상황에 대처할 준비가 없었다. 지휘부에 의해서 제대로 통제되지 못했고, 군중에 대한 공포심으로 과잉대응하여 사태를 키운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도립병원에 있던 이문규 순경이 사태에 대처하는 방식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그 전날 교통사고를 당한 동료를 경호하기 위하여 병원을 지키고 있을 때, 일이 터졌다. 사상자들이 병원에 도착하는 것을 보자, 공포심을 제어하지 못하고 소총을 난사하여 행인에게 상해를 입혔다. 심지어, 간호사와 의사를 총기로 협박하기도 하였다.18)


상황을 제어하지 못한 채, 일신의 안전만을 위해 발포하는 경찰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과감하고 빠르게 민심을 수습하지 못한 채, 일 년이 흘러갔다.
1948년에 들어서자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5월 10일 선거 준비가 진행되었다. 남북 단일정부 수립을 염원하는 세력은 좌익계로 분류되었다. 제주도에서도 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무장봉기가 획책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이승진(김달삼) 등 남로당원 350여 명이 무장하고 도내 지서들을 급습하였다.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가 공격 대상이 되었고, 제주 전역이 참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7월 10일까지의 피해 상황은 이러하였다.


제주 12개 면장, 4월 3일부터 6월 15일까지 가옥 소실, 양민 사살 피해 상황을 보고함. 가옥 소실 400여 호, 양민 사망 292명, 양민 중경상 98명, 납치 525명임.19)


전국적으로는 제헌의원들이 순조롭게 선출되었고, 8월 15일에 제1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투개표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3개 선거구 중에서 한 선거구만이 당선자를 내었다. 혼미한 상황에서, 여수, 순천 지역에서 국군 제14연대가 명령에 불복하여 1948년 10월 19일에 반란이 일어났다.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출동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 겨울에, 제주에서는 많은 인명이 살상당하는 참혹한 일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상황이 점점 더 대결 양상으로 발전하면서 상호간의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는 늘어만 갔다. 이러한 상호 교전이 오가는 상황에서 교회와 교인들의 피해는 없었는가?

 


▲ 4·3사건 당시 피난에서 돌아오는 사람들


2. 교회의 피해와 구명운동


제주도 기독교계는 4·3사건으로 인하여 무엇보다도 크게 손해를 당하였다. 우선 4·3 사건을 일으킨 좌익의 입장에서는 제주 기독교가 정치권에 가까워 자신들에게 불리한 존재로 보였다. 그리하여 일부 교회와 교인들이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가. 교회의 피해와 순교자들
강문호 목사는 1948년 당시 노회장으로 제주도 교회들의 피해 상황을 파악한 후 1949년 4월 새문안교회에서 회집한 제35회 총회에서 제주도 4·3사건 피해 상황을 보고하였다.

제주도는 개벽 이래 처음 보는 민족 항쟁의 처참한 사태에 빠져 사상자가 양민 1,512명, 반도가 수만 명, 가옥 소실은 34,611동, 이재민은 86,757명, 학교 소실은 초등학교 175학교, 중등학교 11개교, 교회 관계 피해는 피살자가 15명인데, 이도종 목사는 작년 6월 16일 교회로 가던 도중에 납치된 후 종적이 없사오며, 허성재 장로는 중학생에게 살해를 당하였고, 서귀포교회 임 씨는 예배당 소제를 하던 중 폭도에게 피해를 당하였고, 교회 건물 피해는 서귀포, 협재, 삼양, 조수 등 4처 예배당이 소실되고, 서귀포, 세화 등 2처의 목사 댁이 소실되었고, 교인 가옥 소실은 서귀포 1, 중문 1, 인성 3, 협재 6, 삼양 15, 제주읍 1, 외도 3, 남원 3동 이상 33호이옵고, 농작물 형편은 전경작지의 5분의 1에 불과하오며, 총성이 그칠 사이가 없으므로 민중은 공포에 싸여 실로 생지옥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에 당하여 중앙정부에서는 반도 진압에 주력함과 동시에 이재민 구호에 힘쓰고 있고, 신구 양 선교사 단체에서는 구호물품을 가지고 와서 분급하기도 하며 진상을 조사하는 등의 활동이 있으나 같이 동포 된 우리 민족에서는 아직까지 개인이나 단체로서 여기에 대한 여하한 동태도 없음은 실로 유감천만사외다. 민족의 동맥이 되어야 할 우리 총회는 급속한 시일에 위문단을 특파하여 진상을 조사하시며, 조국의 평화 수립과 아울러 동포의 구령을 위하여 유효한 대책을
강구하여 주시옵고, 또 총회로서 중앙정부에 종군목사제도 설치를 건의하여 주시옵기 자에 청원하오니 조량하시옵소서.20)


강문호 목사의 청원서에 따라 총회는 위문단 파견을 결의하고, 총회장 최재화 목사와 서기 유호준 목사가 제주도로 와서 각 교회를 다니면서 교인들을 위로해 주었다.

이때 총회 파송 위문단이 주로 위로하여 준 사람들은 4·3사건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은 희생자 혹은 순교자들에게 집중되었다. 강문호 목사는 피해자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21)


강문호 목사가 정리한 17명의 희생자 혹은 순교자들을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교회별로는 모슬포교회 교인이 4명, 중문교회가 3명, 삼양교회가 2명, 서부교회가 2명, 대정영락교회가 2명, 그리고 화순, 김녕, 두모, 서귀포교회가 각각 1명씩이다. 따라서 산북지방에서는 서부교회, 삼양교회, 김녕교회에서 5명이며, 산남지방은 12명으로 산남지방이 단연 많았으며, 그것도 산남지방 동쪽 지역이 5명이며, 서쪽 지역이 7명이다.

희생의 유형별로는 폭도22)에게 납치되어 순교한 사람이 4명, 자택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폭도에게 피살된 사람이 6명, 국군에게 피살된 사람이 4명, 승차 중 폭도의 습격으로 피살된 사람이 2명, 교회당 소각시 함께 피살된 사람이 1명이다.

제주도 출신 최초의 목사 임직자이며 또한 목사 순교자인 이도종 목사는 어떻게 순교하였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한 묘사가 불가능하지만 김춘배의 기록을 인용하여 전택부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 목사가 하루는 맡은 심방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 일주일이 되어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군경 합동으로 사로잡은 폭도의 자백에서 이 목사의 죽음과 그 광경을 알게 되었다. 또 목사 장립식에 기념으로 받아 차고 다니던 시계가 시중에 나돌게 되고 그가 타고 다니던 자전거가 산속에서 발견되었다. 그 폭도의 자백에 의하면 10여명의 폭도가 산길에서 그를 사로잡고 모욕과 힐난을 하고 죽이려고 덤볐다. 이때 그가 자기는 목사라고 신분을 밝힌 다음 예수 믿고 바른 길로 가라고 권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그들이 모욕과 폭행을 더하매 이 목사가 그 유난히 빛나는 눈을 부릅뜨고 “이 무법한 자들아, 하나님의 종을 몰라보고 감히 누구를 어떻게 하려느냐?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모르느냐?”고 노기를 띠고 질호하더니 다시 부드러운 소리로 “예수 믿어 좋은 청년들이 되라”고 훈계하였다 한다. 조금 후에 다른 대여섯 명이 나타나 “잠깐 봅시다” 하며 이 목사를 데리고 솔밭 속으로 가서 땅 구덩이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이미 체념하듯이 합장을 하고 기도를 올리더라는 것이다. 그는 제주도의 첫 순교자로서 예루살렘의 첫 순교자인 스데반의 뒤를 따른 것이었다.23)

 

1949년 6월 강문호 목사는 고산교회당에서 제20회 노회를 소집하여 ‘4·3사건으로 인한 희생자와 교우들을 위한 추도식’을 집례하였으며, 예배당과 사택이 소실된 서귀포, 협재, 삼양, 조수, 그리고 세화 등 5개 교회에 각각 20만 원의 복구비를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나. 조남수 목사의 구명 활동

1947년에 조남수 목사가 당시 34세의 젊은 나이로 모슬포교회에 부임하자 교회는 부흥일로에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4·3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자신의 생명마저 위태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산남지방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으며, 특히 산남 서쪽 지방에서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이는 순전히 당시 교통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국군이 신속하게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 주원인이었을 것이다.

1948년 11월 20일 새벽(2시 반경)에 조남수 목사는 사택에서 폭도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새벽 5시까지 약 2시간 30분 동안 피나는 대결을 하였다. 대결이라고 할지라도 한쪽에서는 무장한 힘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매달리는 기도의 대결이었다. 그런데 조남수 목사는 폭도들이 물러난 다음에야 경찰이 나타나서 공포탄을 쏘아댔던 것에 섭섭함을 느꼈다.

이에 조남수 목사는 당시 철도경찰 소속 응원대의 토벌대장으로 파송되었던 문형순 대장을 찾아가서 면담하였다.24) 조남수 목사와 문형순 대장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진다.

조남수: 밤에는 공비의 흉기에 양민이 죽고, 낮에는 군경의 총에 혐의 양민이 매일같이 죽고……30만 도민이 모두 죽겠으니 백성 없는 나라를 세우겠습니
까?

문형순: 제주도는 좌익운동의 온상지라고 듣고 왔습니다. 한라산 토벌대에서 노획한 불온문서인데 이 명단에는 부락민 90%가 공비들에게 식량을 비롯한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조남수: 왜곡된 지식은 중대한 과오를 범할 소지가 있습니다. 제주도는 일본과 가까워 유학한 분들이 많고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많습니다. 애국운동 사
회운동을 하다 보니 좌익으로 몰린 분도 있고 또한 과격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 숙청되고 도피하고 현재 남아 있는 자들은 극소수의 부화뇌동한 사람들이며 …… 방금 보여주신 불온문서 명단역시 동조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칠야삼경에 무장 공비가 나타나서 총기를 들이대고 내놓으라는 것을 누가 감히 불응하겠습니까?25)


조남수 목사는 밤에는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낮에는 군경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어가는 양민들을 구하고 특히 좌우를 알지 못한 채 좌익에게 동조한 자들과 본의 아니게 살기 위한 수단으로 물품을 제공하므로 죄책감에서, 걸리기만 하면 죽는다는 공포심에서 우향도 좌향도 못하고 중간에서 고민하고 있는 양민을 전향하게 함으로 억울하게 죽게 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방법과 공비토벌을 신속하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바로 그 방법은 주민들의 의식구조를 바꾸어 비록 밤중에 생필품을 제공하였을지라도 결코 국군이 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각 부락에 돌로 3미터 높이의 성을 쌓아서 자체 방어선을 구축하자는 의견이었다.


다. 자수 선무 강연
조남수 목사는 문형순 대장과 함께 경비대의 허욱 대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이에 경비대장의 명령으로 상모, 하모, 동·서일과 4개 리 6,000여 명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에 허욱 대장이 신분 안전을 보장하겠노라고 하여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허욱 대장은 조남수 목사에게 자수 권유 계몽 활동을 맡겼다.

조남수 목사는 1948년 11월 25일 경비대장과 그의 부하들이 자리를 비켜 준 가운데 5,000~6,000명이 모인 군중 앞에 섰다. 강연자와 청중이 같이 눈물을 흘림으로써 상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조남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이들이 자수하지 않을 경우에 당하게 될 처참한 모습을 묘사한 후 안전을 보장하였다. 

“여러분의 주소와 성명이 기재되어 있는 명단을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 명단에 기명된 사람들의 생명은 어쩌면 시간 문제만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살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대로 자수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불문에 부치기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자수하였다가 그분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죽임을 당하면 나는 여러분 앞에서 할복할 것을 약속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믿고 자수하십시오.

나는 기독교 목사입니다. 내가 강연회 폐회를 선언하고, 군중에게 자수할 사람은 내뒤를 따르십시오.” 모슬포 경찰서에 따라온 사람은 약 300명 가량이었다. 집에 와 보니 수십 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다시 경찰에 인계하였으며 계속하여 밀려들었다. 며칠 동안은 계속하여 집으로 밀려드는 자수자들을 받아 경찰에 인계하는 일로 즐거운 비명을 울렸다. 이 소식이 요원의 불길처럼 각 부락에 퍼져 나갔다. 대정 지역에서는 각 부락을 빠짐없이 순회하며 자수 강연을 하였으며, 다음은 중문면, 서귀면까지 서쪽으로는 고산, 용수, 두모, 신창, 판포, 월령, 귀덕까지 순회하면서 150여 회의 자수강연을 가졌다.26)


조남수 목사는 이렇게 하여 약 3,000여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조남수 목사의 보증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이 200여 명이며, 그 가운데는 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사람도 있다. 조남수 목사는 류화평 전도사의 처남 부자를 살려낸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하루는 인성교회 류화평 전도사가 다급하게 찾아와서 그의 처남 부자(양중화, 양남룡)가 내일 총살을 동시에 당한다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경비대장은 “목사님, 오늘도 눈물을 머금고 악질 20명을 처단하기로 결재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경비대장은 “경찰 보고에 따르면 악질들이 있어 내통하며 삐라를 뿌리고 물품까지 공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야기를 듣고 난 조남수 목사는 경비대장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다름 아니고 한 농부가 들녘에서 밭일을 하는데 공비가 나타나서 점심을 빼앗아 먹고 삐라를 주면서 부락에 가서 뿌리라고 했습니다. 겁에 질린 농부는 살려 준다는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기고 삐라를 받아가지고 뛰다시피 하면서 생각하기를, ‘저놈만 피하면 이 삐라를 태워버리려고’ 하면서 오는 중에 공교롭게도 경찰관을 만나서 그 삐라를 빼앗긴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실을 이야기해도 통하지 않아서 수차에 걸쳐서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는데 내일 부자가 처형을 당한다고 합니다.”27)


이렇게 하여 류화평 전도사의 처남 부자를 살려낸 김에 조남수 목사는 함께 처형되기로 한 나머지 18명의 생명도 구하였다. 이때 생명을 구원받은 양남룡 씨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때 20명의 같은 운명의 사람들을 조 목사가 인솔하고 부대를 빠져나왔다. 우리는 처음에는 총살장으로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모슬포교회당으로 들어가서 우리를 앉혀 놓고 설명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들 20여 명은 조남수 목사가 향후 3개월 관찰하기로 약속하였던 사람들이었으며, 그후로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인이 되었다.

10) 한인수, 《제주도선교 100년사》, (서울: 도서출판경건, 2009), pp.156-158. 강문호·문태선, 《제주선교70년사》, pp.63-67.
11) 4·3사건은 보는 관점에 따라 ‘무장봉기’. ‘4·3폭동’으로 보게 된다. 남로당의 입장에서 볼 때 ‘무장봉기’ 또는 ‘애국투쟁’, ‘4·3항쟁’이며 우익의 입장에서는 ‘4·3폭동’ 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편집자의 입장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폭동’이나 ‘봉기’로 쓰지 않고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12) 당시 대한민국의 입장은 반탁이었는데 좌익에서는 찬탁을 지지하였다.
13) 강용삼·이경수 편저, 《대하실록 제주100년》 pp.550-551.
14) 부상자가 8명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15) 《제주사연표 II》, p.22.
16) 사망자는 허두용(15세, 제주북교 6학년), 박재옥(21세, 여), 오문수(34세), 양무봉(49세), 김태진(34세), 송덕수(49세)
17) 도립병원 내과과장 김시존의 증언, 독립신보, 1947. 4. 5.
18) 경향신문, 1947. 4. 3.
​19) 《제주사연표 II》, p.51.
20) 총회록, 1947-1955, pp.67-68.
21) 《제주선교 70년사》, p.64.
​22) 1949년 4월 새문안교회에서 회집한 제35회 총회에서 제주도 4·3사건 피해 상황보고서에 보고된 대로
23) 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2》, 1982, pp.190-192.
​24) 조남수 목사는 문형순 대장이 함경도 출신으로 중국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으며, 40대 중반이라고 했다.
25) 《조남수 목사 회고록》, pp.174-175.
26) 《조남수 목사 회고록》, pp.181-182.
27) 《조남수 목사 회고록》, p.183.​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