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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24, 2016

제4부
1945-1960
해방과 환난, 교회 분


제1장 해방과 제주 교회
1. 제주 교회의 재건
2. 제주의 목회자들


제2장 4·3사건과 제주 교회
1. 제주4·3사건
2. 교회의 피해와 구명운동
3. 4·3사건과 제주 교회의 성장
4. 제주 선교에 협력한 인물들과 기관들
5.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제3장 한국전쟁과 제주 교회
1. 피난 기독교인들의 열성
2. 군인교회의 설립
2. 피난 기독교인들의 교육
4. 부흥회 개최
5. 피난 기독교인들과 제주 교회
6. 피난 기독교인들이 세운 교회
7. 주일학교연합회 창립


제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1. 고신파 분열
2. 예장과 기장
3. 통합과 합동의 분열
4. 이 시기의 교회들

들어가는 말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적과 같이 왔다”라고 하였지만, 이 말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암시하였다. 윤치호는 일찍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200년을 지내다가 2100년에 이르러 독립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해방은 35년이 지나서 드디어 이루어졌다.

해방은 한편으로는 자유와 독립이었지만, 주변국이 염려하는 것처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하였다. 우리의 의견과는 다르게 유엔에 의한 신탁통치가 가결되어, 1945년 9월부터 미국 군인과 소련 군인들이 38도선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에 체류하면서 신탁통치를 시작하였다.

해방의 기쁜 소식에 해외에 체류하던 교포들이 물밀듯이 귀국함으로써 주택과 각종 사회기반 시설의 미비로 인하여 일대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여기에 북쪽 주민들이 남쪽으로 몰려옴으로써 각종 문제가 쌓여 갔다. 정치적으로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해방과 함께 남한을 통치하기 시작한 미국 군정청은 좌익을 소탕하기 시작하였으며, 남쪽 단독 정부 수립 쪽으로 방향을 정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교회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풀려남으로써, 교회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이 일기 시작하였다.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을 향하여 ‘한국교회 재건안’을 제시하면서 자숙할 것을 요청하였다.

해방 이후 평양에 있는 신학교로 공부하러 다녔던 사람들이 1946년부터는 자유로운 통행이 제한됨으로써 남쪽 세 지방이 힘을 합쳐서 6월 12일에 ‘남부대회’를 결성하여 조선신학교를 직영 신학교로 인정하였다. 이어서 1948년부터는 장로회신학교를 또한 인정함으로써 총회 직영 신학교가 2개가 되었다.

이 시점에 제주도는 가슴 아픈 4·3사건을 맞게 되었다. 또한 교회는 이도종 목사의순교를 비롯하여 17명의 사망자를 내었고, 여러 교회가 불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4·3사건의 난리가 아직 마무리되지 못하던 때,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7월 16일에 제주항과 성산포항에 1만여 명의 피난민이 밀려들었다. 1951년에는 1·4후퇴 이후 지속적으로 피난민들이 밀려들어 3도 이동(묵은성)에 피난민촌을 형성하였다. 그 밖에도 피난민들은 제주도 전역에 분산 거주하였다.

제주도는 피난민들의 도피성이었으나 동시에 제주도 교회들에게는 부흥과 각성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피난 기독교인들의 뜨거운 기도, 전도의 열정, 적극적인 삶의 자세 등은 제주도인들과 제주도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뜨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반면 육지 교회의 분열이 제주에까지 연장 혹은 재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한편, 한국교회는 이미 분열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신사참배 참여자들과 출옥 성도들 사이에 대립이 고조되어 감정적인 측면까지 건드림으로써 결국 고신 측이 독립하게 되었다. 신학적 자유와 보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동거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으며, 결국 조선신학교 측(기장 측)과 장로회신학교 측(예장 측)으로 나뉘고 말았다. 또다시 예장 측은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지지하는 에큐메니칼(Ecumenical) 측과 복음주의협의회(NAE)를 지지하는 측으로 나뉘어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분열되었다.

제주도 교회는 고신파의 분열에 따른 아픔을 크게 겪지 않았으나 서문교회에서 기장 측과 예장 측의 분열에 따른 아픔을 겪었다. 다행히 분열에 따른 아픔을 슬기롭게 대처하고 후유증을 최소화시킴으로써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예장 측이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나뉘는 분열에 따른 아픔도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제1장
해방과 제주 교회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제주도에 잔류하던 일본군 제58군 사령부 소속 군인들은 58,320명이었다. 9월 23일부터 한국 전역에서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게 되어 제주도에도 9월 28일에는 미육군 그린(Roy A. Green) 대령, 해군 윌든 중령이 38명의 요원과 함께 내도하여 제주도 주재 사무관 도사(島司)인 센다 센페이(千田專平)으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고 상경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병기장교 파월(G.F. Powell) 대령이 이끄는 무기해체팀이 입도하여 무기와 폭약을 바다에 버리고 비행기를 폭파하였다.

일본군 제58군은 10월 2일에 미군 부대에 투항하였으며, 10월 23일부터 11월 20일까지 10차례에 걸쳐서 일본군의 송환작전을 진행하였다. 10월 26일에 이르러서는 제주도 청년들이 일본 신사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11월 9일부터 미국 육군사령부 제59군정중대가 제주도에 상륙하여 스타우트 소령의 지휘로 미 군정이 제주도 일대에 걸쳐서 실시되었다.

1946년 7월 12일에 이르러 미 군정청은 군정법령 제94호에 의하여 제주도를 전라남도의 관할로부터 분리시켜 도(道)로 승격시켰다고 발표하였다. 이는 다음달 8월 1일부터 실행되었다. 제주도는 북제주군(5면)과 남제주군(6면)의 2군, 1읍, 11면, 10구역으로 이루어졌다. 제주도 인구는 276,148명이었다.1)
이상의 인구에 덧붙여서 해방 이후 일본을 위시한 해외 각지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제주도로 돌아온 전재민(戰災民)은 6~8만여 명에 달하였다. 이는 제주도 기존 인구의 30%에 달하는 수였다. 이들은 또 다른 사회불안의 요인이었다. 일본군은 떠나면서 쌓아두었던 군량미를 태워버렸다. 식량 부족이 가중되었으며, 콜레라의 기승으로 400여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생명을 잃기도 하였다. 식량 부족과 의료환경의 악화로 사회적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이들 귀환 전재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학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식량난, 위생난에 덧붙여 고학력 무직이라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이들 귀향민들은 불안이 점증되는 시대에 새로운 향토건설을 위해 선봉에 서고자 하였다. 특히 일본에서 귀환한 전재민들은 주로 오사카를 중심으로 생활하였던 사람들인데, 오사카의 노동시장에서 저임금과 민족적 차별에 시달리면서도 자립의식을 강하게 함양하였다. 고향에서 자치활동과 야학 운동, 학교 설립 등 민족주의적인 의식을 강하게 가졌다.

당시 한국사회의 가장 큰 갈등 요소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 사상들에 동조하는 우익과 좌익 등이었다. 이들이 통일의 방식에서 차이를 드러내면서 각 정당이 각종 공약을 발표하였으며, 신탁통치 찬성 측과 반대 측으로 나뉘어서 사회는 혼란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제주사회에서는 지주층이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우익이 성장하지 못하였고, 대부분 사회주의 의식을 함양한 채로 해방정국의 파국에 휩쓸리게 되었다.

1. 제주 교회의 재건
해방과 함께 제주도 교회들과 목회자들의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이도종 목사는 고산에서 귀농생활을 하고 있었고, 강문호 목사는 한림지역이 폭격된 이후 사역이 위축되었다. 조남수 목사는 서귀포교회를 지키고 있었다.2) 해방을 맞이한 후 조남수 목사는 서귀포에서 고산에 있는 이도종 목사를 찾아갔다. 조남수 목사는 모슬포교회의 허성재 장로와 해후한 다음에 이도종 목사에게 간청하였다.

더욱이 목사라곤 그분과 나만이 있는 실정인데 내가 찾아가서 애원한다면 선배목사의 입장에서 냉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택을 찾았다.……“24개 교회 문제를 저 혼자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이제는 목사님이 나와서 교회도 맡아 주시고 저를 지도하여……”라고 애원하였다. 바로 즉석에서 제주도를 양분하여 산북 쪽은 이 목사가, 산남 쪽은 내가 맡기로 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 목사도 기쁘게 생각하고 열심히 순회했으며 교회들도 반갑게 환영하였다.3)

강문호 목사는 1945년 11월 21~22일 한림교회의 문명옥 장로 자택에서 제16회 정기노회를 소집하여 향후 대책을 숙의하였다. 노회장으로 재선임된 강문호 목사가 여러 교직자들과 함께 통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순간이었다.

1946년 1월부터 제주성경학교를 다시 개강하여 각 교회 청년들과 제직들 70여 명이 모여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강태국 목사가 부흥성회를 이끌기도 하였다. 1946년 6월 장로교 단독으로 ‘남부총회’를 조직하여 해방 전 제31회 총회를 승계하는 제32회 총회로 출발할 때 강문호 목사는 제주노회장으로 참석하였다. 사회가 안정되는 조짐을 보이자 1946년 4월에 임기봉 목사가 제주도로 돌아와 서부교회 담임목사직을 맡았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에는 4명의 목사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맡아야 하는 교회는 담임목회지와 더불어 치리 당회장을 맡아야 했다. 강문호 목사는 12개처, 이도종 목사는 8개처 교회의 당회장을 맡았다.

그리하여 이들 목회자들이 제주도 교회의 재건과 부흥을 위하여 시도한 것이 제주도 전역을 순회하면서 전도 강연회를 개최하는 일이었다. 또한 이 시기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상 대립이 예민한 상황이었으므로 제주도 내 170여 개 부락에서 학교나 향사를 빌려서 순회 사상 강좌를 개최하였다. 이 순회 강연회는 당시 미 군정청 당국의 의뢰를 받고 이루어진 행사였으나 동시에 복음 전도의 기회로 활용함으로써 임기봉, 이도종, 강문호, 조남수 목사 등은 복음 설교와 함께 “공산주의에 빠지지 말자”는 제목의 강연을 지속하였으며, 보조 강사는 고원숙, 조시병 장로를 비롯한 각 지역의 장로들이 맡게 되었다.
이 시기에 제주도 선교에 큰 도움을 준 선교회가 있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제주 출신 신앙인들이 모인 ‘일립선교회’(一粒宣敎會)는 1947년에 순회 전도대를 제주도로 파송하여 제주도 전역을 상대로 전도집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선교비를 보내어 전도사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협력하였다. 또한 일립선교회는 화순 지방 전도 목사로 이도종 목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으며, 이도종 목사는 1948년 4월에 회집한 제19회 정기노회에서 “화순교회는 결신자 10여 명을 얻었는데 주일집회가 30명 내외”라고 보고하였다.
1946년부터 1947년 사이에 제주도 교회는 안정세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사례가 몇 교회에서 있었다. 첫 번째는 한림교회이고, 두 번째는 성내교회이다.


가. 한림교회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한림교회는 일제 말엽 미국 공습기가 한림항을 폭격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불타는 아픔을 겪었다. 그리하여 문명옥 장로의 주택에서 임시로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강문호 목사의 사택은 예배드리기에는 매우 비좁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문호 목사는 미 군정청 내에 한국지원단(AFAK: Armed Force Aid to Korea)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를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한림교회의 피해 상황을 보고하고 복구를 요구하였다. 그 결과 미 군정청이 일본인 신사 부지 329평을 교회의 대지로 무상으로 넘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군대가 남겨놓은 건축자재도 무상으로 지급받을 수 있었다. 일본군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11월에 퇴각할 때까지 산적한 군량미와 자재들을 소각함으로써 한국인들이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였다. 그렇지만 한림교회를 위한 일부 자재가 남아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에 한림교회 교우들은 1946년 12월에 예배당 72평과 목사 사택 28평을 신축하기 시작하였다. 신축자금은 구 예배당 대지를 매각한 돈과 헌금으로 충당하였다. 건축공사는 순조롭게 진행하여 1947년 4월에 마무리짓고 준공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처럼 일제가 남긴 신사(神社)터 혹은 신사 사옥을 해방 이후에 불하받아서 예배당으로 사용한 사례는 광주 송정리제일교회, 목포 중앙교회, 그리고 제주도 한림교회 등 전국적으로 많았다.


​▲ 한림교회 네번째 예배당(1946건축)


나. 성내(서부)교회
성내교회는 일제 말엽에 정부 당국자들의 강압적인 조치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일제는 통치 말엽에 이르러 전쟁 수행과 함께 재정적 압박을 받자, 전국에 있는 형무소의 수형자들을 지역 내 건축사업장에 강제 노역자로 파송하여 임금을 받음으로써 운영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따라 성내교회는 1941년 현 동문시장 제주신협 터위에 2층으로 된 석조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다. 이 건물은 1942년에 완공되었으며, 총회 보고서에 “성내교회는 2만 원의 경비로 석제 2층의 교회당을 신축하고 동부교회로 분립하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분립은 이듬해에 교회 통폐합 등의 문제로 연기되었으므로 주일 낮 예배는 동부지역 새 예배당에서, 그리고 주일 저녁예배와 수요일 저녁예배는 서부지역 성내교회에서 드렸다. 이러한 사이에 일제는 동부 예배당을 일본군의 막사로 징발하여사용함으로써 이마저도 불가능하였다.

성내교회는 이렇게 두 채의 예배당을 가진 상태로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탁명숙 전도사는 해방 후에도 동부지역 예배당을 예전과 같이 주일 저녁예배와 수요일 저녁예배 처소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46년 4월에 임기봉 목사가 다시 부임하여 목회하였으며, 1948년에 이르러 동부지역 교우들이 남문로를 기준하여 분립을 요청함으로써 교회는 서부교회와 동부교회로 따로 예배드리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1949년 5월 노회에서 허락을 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분립하였다. 그리고 동부교회 당회장은 임기봉 목사가 맡고, 서부교회는 이북에서 온 이윤학 목사가 맡았다.

한편 성내(서부)교회는 이윤학 목사의 부임과 함께 착실하게 성장하였으나, 용담동 지역에서 출석하였던 교우들이 동부교회의 분립을 보면서 독자적인 교회를 갖기를 희망하였다. 아직까지는 미약한 세력이었으나 전재민들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고경자 여전도사를 중심으로 한 가족들과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30~40여 명 정도의 교인들이 분립하여 ‘한라교회’라는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다. 그 밖의 교회들
제주도 교회들이, 경제적으로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우들이 힘겹게 힘을 합하여 교회를 세워가는 모습은 참으로 헌신과 희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리교회(1947년 7월), 강정교회(1948년 4월), 표선교회(1948년 8월), 애월교회(1948년 12월)가 세워졌다.

《제주노회사》는 예리교회의 설립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1947년 제주 4·3으로 인해 예래 지역에 파견되어 있던 경찰관 김두혁 씨의 전도 활동으로 결신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의 결신자 중 초등학교 교사 정연기 씨를 중심으로 현 교회 위치인 강춘복 씨 소유 1266번지에 대지 100평을 구입하여 1948년 3월 27일 초가 교회 건평 24평을 건축하여 예리교회가 설립되였다.4)


강정교회의 설립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법환교회에 출석하던 김문현 집사와 고원련, 김문언, 강영희, 이만희(도순), 문정희(용흥), 이양춘(도순), 이효순(도순), 윤미라 제씨들이 강정리 4580번지 김문현 집사 자택에서 서울 영락교회에서 파송된 이득홍 전도사의 인도로 1948년 4월 30일 첫 예배를 드린 교회는…….5)


애월교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1948년 당시 제주 출신으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일립동신회는 회원 11명이 고향의 복음화를 위하여 김윤옥 전도사를 파송하니 애월리에서 금성교회로 출석하던 이순명 집사와 강문수, 김대봉, 김홍범 등 여러 성도들이 협력하여 김윤옥 전도사 댁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개척하였다.6) 

제주도 교회는 깨어나고 있었다. 아니 제주인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 기간에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도인들이 들어옴에 따라 치열한 문화적, 사상적 갈등이 잠재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2. 제주의 목회자들
제주도는 목회자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과 함께 강문호 목사가 재건 제주노회의 노회장을 맡았으나 여전히 교회를 이끌어 갈 목회자는 태부족이었다. 해방 전에는 1930년부터 제주 출신 이도종 목사와 김재선 목사가 제주노회를 이끌어 갔으며7) 그 가운데서도 이도종 목사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강문호 목사와 조남수 목사가 제주도 교회를 이끌어 가게 된다.

가. 강문호 목사(1898-1986)


​▲ 강문호 목사


강문호 목사는 제주노회장을 23회 역임한 목회자이다. 그는 1898년 1월 26일 중문면 중문리 1598번지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고, 1913년 3월에 중문리에 있는 중문사립개성학교를 졸업하였다.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기도 쉽지 않은 시대였다. 강문호는 생각이 트인 재목으로 성장하였다.

바로 그 시점에, 즉 1914년 강진 출신 최대현 집사가 중문리에 거주하면서 자비량으로 전도하였다. 강문호는 최대현 집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영접하였다. 강문호는 부모의 완강한 거부에 부딪치자 아버지의 금고에서 80전을 훔쳐서 제주성내교회로 피신하였다. 성내교회 교우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지속하다가 1916년 한 교우의 성금으로 군산 영명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영명학교 재학 시 성경은 매우 우수하였고, 특히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5일 군산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5일 구류 생활을 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료 학생들이 재판 받는 재판정에서 일경이 보는 앞에서 의분을 드러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1년 6개월 실형을 살아야 했다. 고향에 돌아온 아들의 뜨거운 애국심과 의협심에 감동한 아버지는 강문호를 용서하고 또한 기독교 입문에 대해서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모슬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강문호는 1920년 9월부터 1922년 6월까지 약 2년 동안 성결교회의 교역자 양성소인 경성성서학원에서 공부한 후 경기도 지역에서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그리고 1926년에는 일본 고베 중앙신학원에서 공부하였다. 강문호는 일본에서 수학하는 동안에 고학으로 건강을 해쳤으나 끝까지 이겨내고 1932년 3월에 졸업하였으며, 6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았다.

강문호 목사는 임직과 함께 경기노회 소속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 있는 고읍교회에서 목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1년 6개월쯤 지나 1934년에는 서귀포교회에 부임하여 이도종 목사의 목회를 이어받았다.
서귀포교회에 재직하는 동안에 제주노회 제7대 노회장을 맡았으며, 《기독신보》에 여러 차례 글을 발표하였다. 주로 1935년에 “표준적 신앙생활”, “요단 강변 이스라엘”, “성탄에 제한 명상일절”, “그리스도의 이상” 등의 설교문을 발표하였다. 이 당시에 설교문을 작성하여 설교하는 사례도 흔하지 않았겠지만 강문호 목사의 문체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논리는 정확하였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이상(理想)”에 대하여 말한다.


진정한 평화는 일 개인만이나 또한 일 국가만이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한편이 아무리 평화를 주창할지라도 다른 편이 적의를 품고 그 평화를 깨뜨릴 때는 그 평화는 불화로 변함에야 어찌하랴! 그러므로 참 평화라는 것은 세계적이 아니고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만 볼 수 있는 사상은 신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 함이니, 세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섬기는 정신이 없이는 사해형제주의는 성립되지 못할 것이요, 형제주의 없이 봉사주의도 실행되지 못할 것이며, 형제주의와 봉사주의 없이 세계 평화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8)


이 글에서 보듯이, 강문호 목사는 일본이 신사를 신설하고 한국인들에게 요구하는 강요된 평화는 독선적이며 일방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일본과 한국이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적인 평화는 예수를 통한 공통의 길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강조한 셈이다. 그는 서귀포교회 재직 시 강원도 ‘예수원’을 창설한 영국성공회 목사(신부) 대천덕 신부의 아버지(R. A. Torrey)가 쓴 《우인의 무디관》이라는 책을 번역하여 개인 전도와 경건에 열심히 할 것을 독려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한국에 소개된 덴마크의 그룬트비의 농촌운동과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의 농촌 계몽운동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강문호 목사는 1936년 10월에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면 내교리 교회에 부임하여 1941년 4월까지 섬겼으며, 1941년 초에 첫 목회지였던 경기도 양평군 고읍교회에 재부임하였다. 고읍교회에서 1년간 사역하는 사이에 한림교회의 초청을 받고 부임하여 1971년까지 30여 년 목회하였다. 한림교회에 재직하는 동안에 제주 4·3사건, 한국전쟁 등 시대적 어려움을 몸소 경험하였으며, 그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신앙의 모범을 굳게 보여주었던 신앙의 대스승이다.

나. 조남수 목사(1914-1988)


▲ 조남수 목사

조남수 목사는 1914년 6월 24일 한경면 조수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0남매를 낳았으나 모두 어려서 죽고, 네 번째 아이인 조남수만 살아남았다. 자녀들이 연달아 죽자 아버지는 집을 떠나 방황함으로써 생사가 묘연하였으나 조남수가 10세 때인 1925년에 아버지로부터 편지 연락을 받고 일본 오사카로 어머니와 함께 건너갔다.

조남수는 오사카 다니마치 심상고등소학교에 전학하여 3년간 공부하고, 고등과 2년을 마친 후 구보(久寶) 상업학교에 입학하여 3년을 공부하고 졸업하였다. 졸업 후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려고 준비하던 중, 조수리의 조부모로부터 귀향하라는 성화에 못이겨 귀국함으로써 공부가 중단되고 말았다.
조남수는 귀국 후 별로 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 이봉한 씨 집에서 야학을 시작하였다. 국어, 조선어, 수신, 산술, 주산, 역사, 창가 등을 과목으로 하여 소년 소녀 7명으로 시작하였으나 동리의 어른들도 참여함으로써 학습 공간을 확장해야 하였다. 그래서 조남수는 집 옆에 있는 조수교회의 공간을 빌어서 야학을 진행하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조수교회는 1920년경에 두모리 2구(반동)에 거주하는 허신애 권찰이 지혜롭게 시작하였다. 환자의 초가집 네 모퉁이의 그신새(초가 지붕의 풀로 수년간 연기에 그을려 검게 변한것)를 뽑아다가 소각하면서, 집안에 붙여놓은 미신 섬기는 도구들을 모두 소각하며 환자의 머리에 허 권찰의 손을 얹고 찬송을 부르면서 사도신경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기도하였다. 이것을 소위 청결예배라 하였다.9)

허신애 권찰의 지혜로 과거 환자였던 10여 사람이 모여서 예배드리다가 두모리교회에 출석하였으며, 밤에는 조수리 홍자하 부인 댁에서 모이곤 하였다. 이들이 합심단결하여 1930년경에 강순평 씨의 초가 3칸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고산교회의 당회장이 순회구역에 포함시켜서 한 달에 한 번씩 순회하면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이러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조남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종형제(남석, 남규, 남봉, 남준)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함께 신앙생활하면서 야학을 이끌었다.

이렇게 조씨 형제로 인하여 교회가 발전하게 되자 오히려 문중으로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집안과 부친의 모진 구타와 박해를 견디다 못하여 조남수는 당회장인 고산교회의 정태인 목사를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함으로써 고산교회 교인들의 후원금 36원으로 목포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담양의 성경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서울로 가서 조선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조남수는 어렵게 고학하면서 1943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 협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협재교회에서 1년간 전도사로 사역한 후 서귀포교회의 청빙을 받고 1944년에 목사 임직을 받아 서귀포교회와 법환교회의 당회장으로 사역하였다.

조남수 목사가 서귀포교회에 재직할 때 서귀포 지역에 있는 하천풍언 농장의 감독관 소림청길(小林淸吉)이 서귀포교회에 출석함에 따라, 그 농장의 40여 정보를 대여받아 ‘자선원’(慈善院)이라는 무의무탁한 노인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법환교회에서는 유치원을 설립하려고 하였으나 일제 당국의 간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찌 되었거나 조남수 목사는 서귀포교회에서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1947년 모슬포교회 제4대 당회장으로 부임하였다. 조남수 목사는 모슬포교회 당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 4·3사건, 한국전쟁과 피난민의 유입, 교파 분열에 따른 교회의 분열이라는 아픔을 겪다가 1960년에 서귀포로 이전하였다. 이때부터 새마을 유아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1971년에 세기교회를 개척하여 1985년 은퇴할 때까지 사역하였다. 그 사이에 서귀포신용협동조합을 창설하여 이사장을 역임하고 각종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조남수 목사는 예장과 기장의 분열 시 기장 측에 섰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모슬포교회가 두 교회로 분열하는 아픔을 낳기도 하였으나, 그가 4·3사건 당시에 많은 지역주민들의 생명을 건진 일은 결코 가볍게 말할 수 없다.

​1) 《제주도지》 제2권, p.574. 《제주사연표 II》, p.14.
2) 조남수 목사는 회고록에서, 해방될 때에 자신이 제주의 목회현장에 남은 유일한 목회자였다고 술회하였다.

이도종 목사는 귀농으로, 강문호 목사는 육지 피신으로 정리하였다.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제주 교회와 관련된 글에서, 조남수 목사의 회고록은 유일한 증언으로 인용 서술되어 왔다. 하지만 이 회고록이 당시의 상황을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는지 의문스러운 부분들이 있다. 더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참고, 김인주, “해방 당시 강문호 목사는 어디에 있었나?”, 《제주기독신문》, 제478호(2012. 11. 24).

3) 《조남수 목사 회고록》, pp.127-128.
4) 《제주노회사》, 2000, p.160.
5) 《제주노회사》, p.104.
6) 《제주노회사》, p.153.
7) 김재선 목사는 1933년경부터 목회직을 중단하여 왔으며, 1937년 7월 14일 노회에서 목사직 면직이 선포됨으로써 목회자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제주노회록 제8회 회록(1937), p.18 “4년간 유안하였던 김재선 씨의 성직 사면서는 번안하여 장시간 의론타가 수리키로 결의되어, 회장이 허성재 씨로 기도한 후에 회장이 김재선씨의 면직됨을 선언하다.”
8) 《기독신보》, 1935년 9월 4일자.

9) 《조남수 목사 회고록》(1987), p.72.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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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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