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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24, 2016

 

3. 제주도 부흥의 주역 목회자들


제주도 교회는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이기풍 목사, 최흥종 목사, 김영식 목사, 조상학 목사 등 목회자들이 떠남으로써 새로운 목회자가 부임하는 1933년 후반에 이르기까지 약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 중반부터 최희준 목사와 정순모 목사가 부임함으로써 부흥의 발판이 마련되었으며, 여기에 이도종 목사와 강문호 목사가 적극적으로 가세함으로써 제주도 교회는 일제 말엽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여기에서는 세 사람, 곧 정순모 목사와 이도종 목사와 강문호 목사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가. 정순모 목사

정순모 목사는 뉴랜드(L.T. Newland: 남대리) 선교사의 조사로 나주와 함평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 1월 28일에 “신학교 입학 허가를 노회로부터 얻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1923년에는 제12회 전남노회의 부서기를 역임하였으며, 1928년에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 임직과 함께 나주교회를 봉직하다가, 1929년 4월부터 광주 향사리교회로 전임하였다. 그 사이에 향사리교회의 건축을 마치는 등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순모 목사는 1930년 광주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의 이수현 목사가 마산 문창교회로 이임함으로써 북문밖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정순모 목사는 북문밖교회를 섬기다가 1933년 2월경부터 제주도 전도목사로 부름을 받아 김녕, 협재 지역의 전도목사로 시무하였다.

정순모 목사의 제주도 활동은 처음부터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정순모 목사는 제주도 산북지방의 동쪽을 맡아서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의 정순모 목사의 활동을 《기독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제주 산북 동지방 생명문이 열려
전남노회 내 일대 기관인 전도국 파송을 받고 현재 제주도 구좌면 금령리에 터를 닦고 도피성을 쌓고 1,400~1,500호 인구 10,000여 명을 도피성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기갈이 자심하던 영들의 배부름을 주었으며 팥 껍질만 먹던 우리에게 참된 진미를 먹여 주었으며

1. 제일회는 제주노회 임시회와 면려연합회 하기 수양회에서 복음의 소리를 외쳐 자던 잠을 깨우쳤으며
1. 제이회는 제주면 삼양교회에서 부흥전도강사로
1. 제삼회는 구우면 한림교회 부흥강사로
1. 제사회는 제주 산북 동지방 세화리교회에서 대전도회
1. 제오회는 성탄일 전도
신자들이 크게 부흥을 받고 새로 믿고 나온 자와 세례를 받은 자들도 많아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였다 한다.27)


한림교회는 산북지방에 속하는 선교지 교회로서 자립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다가 1934년에 정순모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함으로써 자립 교회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전남노회와 순천노회는 연합전도부에서 정순모 목사에게 선교비로 지급해 오던 비용을 제주도의 여러 어려운 교회에 제공하게 되었다.
정순모 목사는 한림교회에 위임목사로 부임함과 동시에 첫 번째로 교회터를 마련하여 예배당을 신축하였고, 두 번째로 주변 교회들의 부흥을 이끄는 주역이 되었으며, 세번째로 1936년부터 성내교회 당회장으로 옮겨서 1943년 일제가 교회를 통폐합하여 목사직을 상실할 때까지 제주도 교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림교회에 부임한 정순모 목사는 한림교회가 전북노회 재산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고서 전북노회와 교섭하여 한림교회의 재산으로 독립시켰다. 이렇게 하여 기존의 교회 부동산과 동산에 대한 재산권을 확보한 다음에 ‘신건축기성회’를 조직하여 예배당 39평과 사택 18평을 친히 설계하였다. 정순모 목사는 광주 향사리교회에서 예배당을 신축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우선 기도로써 준비시킨 다음에 건축을 위한 헌금을 실시한 결과 400여 원이라는 헌금을 모을 수 있었다.
정순모 목사는 구 공동묘지 270평을 150원에 구입하여 교인들과 더불어 정지 작업을 마친 다음에 1935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8월 15일에 헌당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날 헌당식은 강문호 목사가 설교하고, 유년부의 찬양, 면려회의 연극, 내빈들의 축사등으로 이어졌다.28)
정순모 목사는 한림교회의 발전에 그치지 않고 조천, 김녕, 세화리교회의 당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이 교회들의 발전에도 기여하였으며, 1935년 4월에는 최희준 목사와 정태인 목사와 함께 모슬포교회의 부흥회도 인도하였다.


모슬포교회에서는 4월 2일부터 8일까지 춘기사경회를 개최하여 풍성한 성은을 받음이 여좌함.
강사: 정순모 목사, 최희준 목사, 정태인 목사
1. 오후 8시부터 정순모 목사의 영감적 열정으로 전도 강연하는 중 매일 밤 300~400여 명의 신불신 군중이……….


정순모 목사는 한림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해 오던 중 성내교회의 최희준 목사가 광주 내방교회로 이임하게 됨에 따라 1936년 여름에 성내교회로 이전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한림교회에는 박창욱 목사가 부임하고, 모슬포교회에는 이근호 목사가 부임하였다.29) 또한 고산교회 목회자인 정태인 목사는 1937년 2월에 순천노회로 이명함으로써 이도종 목사가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에는 1937년부터 성내교회에 정순모 목사, 한림교회에 박창욱 목사, 모슬포교회에 이근호 목사, 고산교회에 이도종 목사가 담임목사로 시무하기 시작하였다.


나. 이도종 목사
이도종 목사는 1927년 6월에 전북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고 시무하다가 1930년부터 총회전도부 파송 제주도 전도목사로 황해노회에서 파송하였던 양성춘 목사의 후임으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맡았던 지역은 중문, 법환, 서귀포 3개처 교회였다.
이도종 목사가 1931년 제20회 총회 보고서에 “서귀포교회가 설립되었으며……서귀포 신설 교회는 중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시민들에게 동정금을 모집하여 시가 500원의 구대를 매수하였사오며……”라고 보고한 것을 통해 서귀포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30)
1932년 9월 제21회 총회에서는 이도종 목사의 활동을 이렇게 말하였다.


제주 (가) 시무 목사 이도종, (나) 시무 구역: 동편 효돈 서편 서한현 지방, (다) 교인 도합 138인, (라) 직원 도합 12인, (마) 신설한 교회 1처에 교인 40인, (바) 면려청년회 3처에 회원이 35인, (사) 부인조력회 3처에 회원이 32인.31)


이로 보건대 이도종 목사는 총회 전도부로부터 200원의 보조금으로 생활하면서 제주도의 영적인 성장을 노력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설 교회란 그가 세운 남원 기도처가 교회로 발전한 데 대한 설명이었다. 이도종 목사는 1932년 11월에 삼양 지역에서도 다음과 같이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주 교회 진흥 활동
제주 삼양교회에서는 조선진흥운동의 시기와 방법에 수응하여 진흥 활동을 개시한 바 10월 16일부터 개인전도 공과를 수요일마다 가르쳐 제6회에 마치고, 11월 13일부터 1주간 부인조력회를 표준하여 새벽기도회를 하고, 11월 27일부터 1주간 서귀포교회 목사 이도종 씨를 청하여 매일 오전 5시부터 6시까지 교회 일동이 영적 부흥을 위하여 모이고, 오후 7시부터 8시까지는 불신자를 위하여 전도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제직회와 조력회를 합하여 전도대를 조직하고 11대로 나누어 사방 십리 안에 4천여 호 되는 각 마을을 11대로 나누어 매일 1대 1구로 전도하여 매 구역마다 7일간 매일 다른 전도대를 파송하게 하였는데, 이 진흥운동으로 말미암아 크게 부흥하였다더라.32)


이 보도에 의하면, 이도종 목사는 삼양교회에서 한 주간 부흥집회를 인도하면서 삼양지역 전역에 걸쳐서 전도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삼양교회의 부흥을 크게 진작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도종 목사는 1933년에는 중문리교회에서 ‘제주도 농촌 진흥 전도 강연회’의 강사가 되어 순회강연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중문교회의 악대가 동반함으로써 청중 동원에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활동을 《기독신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이도종 목사를 강사로 하고 중문 악대를 영솔한 농촌 진흥 순회 전도 강연단 일행은, 지방 각 기관의 후원을 수(受)하고 좌(左) 1면 10개리 중요 농촌 집단 부락 12개처에 순회 전도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각 동리에서 인민회의소, 청년회관, 학교 등을 집회 장소로 허락 환영하고, 지방 인사들은 남녀노유가 총출동하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이 목사의 진정한 동포애 및 영육공존 양생의 활로를 전개시키는 순복음주의적인 사자고함과 같은 진정 열정에서 울려나오는 열렬한 설교에 성신의 뜨거운 불이 같이하여 일반 청중은 불교인, 보천교인, 유교학자를 물론하고 죄를 각성 통회하며…….33)


이도종 목사는 1935년부터 총회 파송 전도목사로서의 사역을 중단하고 단독적으로 전도목사로서의 사역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 2월에 고산교회의 위임목사로 청빙을 받아서 부임하게 된다.
이도종 목사는 1935년 2월부터 1939년 5월까지 고산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동안에 교회를 부흥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의 재임기간의 부흥은 이렇게 비교할 수 있다.




이상의 통계에 따르면 낮예배 참석자가 38%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산교회는 2년 동안에 전반적으로 30%의 성장을 보여 줌으로써 자립의 단계를 넘어서 주변의 교회들에게도 나눠 줄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산교회는 주변에 있는 조수교회도 협력하였다.
그렇지만 이도종 목사는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1939년에 고산교회 위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원래의 전도목사 신분으로 전환하게 되고, 고산교회는 양동혁 목사가 맡는다.34) 이도종 목사의 사임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주된 이유는 1938년 4월 성내교회에서 회집한 제9회 정기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된 데 대한 반성의 표현이었을 것으로 본다. 특히 강력한 후원자였던 탈마지, 스위코드, 크레인 등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도종 목사의 이러한 반성의 표현이 그의 순교로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35)


4. 추자도의 복음 전파36)


추자도는 전라도와 제주도 사이에 놓인 섬이다. 1801년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하여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던 정난주는, 어린 아들 황경한을 추자도에 놓고 가야했다. 그 아이는 어진 어부의 눈에 띄었고, 살아남았다. 1908년 제주로 향하던 선교사 이기풍이 거친 바다로 인하여 잠시 추자에 기항하였고, 이때 복음을 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결실이 맺어지기까지는 더 기다려야 했다.
제주의 복음사역자 중에 원용혁(1890-1950)은 추자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8년 광주 봉선리교회에서 제주에 파송한 전도인이었다. 그의 동생 원용옥이 1922년 추자 신양리에 주일학교 선생으로 파송되었다. 이 사역은 서서평의 남다른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광주를 중심으로 모슬포를 방문하며 복음을 전하면서 다른 사역자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추자도를 주목한 것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여름에 지리산에 있는 선교사 휴양관에서 피서를 겸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서서평은 이 기간에도 쉬지 않고 새로운 곳에 복음 사역을 펼쳐나갔다.

1928년에는 채대일, 조영국, 김명숙 3인이 추자도를 방문하고 원상권 댁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결과 20여 명이 결신하기에 이른다. 여러 사역자들이 거쳐 갔지만, 교역자의 교체는 빈번했고 강단을 지킬 일꾼이 없는 시기도 있었다. 이제, 장기간 안정된 사역을 감당할 일꾼이 필요했다.

1928년 전남노회 제30회 회의석상에서 추자도 선교를 위한 당석헌금을 실시하여 400여 원을 모금하였다. 재정이 확보되자 서서평 선교사가 이끄는 부인조력회가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적절한 사역자를 추천하도록,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무 중이던 주기철 목사에게 부탁하게 된다.
주기철 목사는 방계성 장로를 추천하였다. 그는 주 목사가 초량교회에 부임한 직후에 장로로 장립한 일꾼으로서, 이후 평생 서로 신뢰하며 복음의 동역자로 일관한 신의의 인물이다. 그는 1930년 9월 1일에 신양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는 주일학교에 집중 하였고, 양태교 선생과 함께 야학교를 설립하였다. 1933년까지 사역하였는데, 교회는 부흥되었고, 교회당을 건축하기에 이른다.
1932년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동안의 내력을 정리한 글이 다음과 같다.


신양예배당 건축보고
하나님의 사랑은 크시고 차별이 없으시어 어떤 나라 어떤 민족 어떤 개인에게나 은혜베풀기를 좋아하십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옛날 유대광야에서 세례요한이 출현하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던 때부터 천국복음은 선전 전파되어 금일에는 땅끝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침 우리 추자도에서도 1928년(5년 전)부터 제주도 모슬포교회를 통하여 주의 사자 채대일, 조영국, 김명숙 여사 3인이 와서 원상권 씨 댁에서 천국복음의 씨를 뿌리게되어 처음으로 20여 명의 신자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전남노회 애원서를 제출한 결과 박남규 씨가 초대 전도사로 부임되었으며, 그 후 조영국 씨, 김용하 씨, 김재진 씨 등이 왔었는데 전도사의 교체가 빈번하고 무임 기간이 오래됨으로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신자들이 갈 바를 모르고 헤매어 전도의 성적이 좋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30년 9월 1일에 방계성 장로님이 부임하시면서부터 유년주일학교를 시작하여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야학을 개시하게 되어 교회의 싹이 자라나 점점 장성하여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이 협착하고 부적당함으로 여간 불편을 느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1931년(작금) 11월에는 힘과 능력이 없고 금전에 자유가 없음을 불구하고 다만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성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약자를 도와 강하게 하시고 빈자를 풍성하게 하시어 뜻이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방 장로님께서 전남 광주에 가서 부인협력회장 김필례 씨와 동 총무 서서평 양과 방계성 씨 명의로 동정금을 청하게 되었는데 전남 각지와 제주도와 경남 지방에서 의외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건축에 착수할 계획을 세우고 11월 초순에 방 장로님께서 친히 재목을 사기 위하여 목포에 나가서 풍선으로 운반 동승하여 오시다가 중로에서 풍파를 만나 많은 고생을 하였으나 신호지덕으로 무사 도착하여 11월 14일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2월 7일 금일에 완공되었습니다.

세상 일은 흔히 용두사미가 되기 쉬운데 우리 교회의 일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비록 유대 소읍에 출생하셨으나 그 성호가 전 세계를 울리는 것과 같이 교회의 사업도 또한 그리하여서 처음에는 겨자씨와 같으나 나중에는 광대한 결과를 맺게 됩니다.

특히 이 건축을 완성하기까지에는 방장로님이 말할 수 없는 노력이 든 것을 감사하는 바입니다. 금전 모집, 사고, 설계, 재목, 감독 등 목수 되신 이와 토공 되신 이의 수고도 더욱 감사하는 바입니다.

우리 교회 형제자매님들은 내일과 같이 전연 이 일만 위하여 노력하신 것은 오직 기독의 봉사의 정신의 발현임인 줄 알고 기뻐하는 바이며, 여러 주일학생 부형들까지 직접 간접으로 원조하여 주시니 다만 감사할 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주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옵니다.
1932. 12. 7. 양태교

방계성 전도사는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주기철 목사를 도왔다. 1937년에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부름받은 것이다. 그리고,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며 옥중에서 고초를 겪던 주기철 목사를 가까이서 대신하며 교회를 지킨 일꾼이 되었다. 주목사 순교 이후 교회를 지키다가, 1949년 12월 27일 공산당에 의해 죽임당하여,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된다.
신양교회는 이러한 신앙의 흐름 속에서 믿음을 지켰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제하던 시절에도 꿋꿋이 버티었고, 교회의 중요한 서류들을 탈취당하는 어려움 가운데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러한 불굴의 신앙의 전통 속에서 신양교회는 많은 일꾼들을 배출하였다.


5. 제주성경학교 설립


미국 남북장로교 한국선교회는 한국 지도자 양성으로 각 지방에 있는 선교부에서 주로 겨울에 성경학교를 운영하였다. 시골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주변 교회들과 연합하여 4박 5일 정도의 기간에 성경 전반에 걸친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성경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세례 받을 때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시골 지역 성경학교에서 교회의 지도자로 키울 수 있는 능력자는 주로 무급 조사(unpaid helper)를 양성하기 위하여 선교부가 도시에 남녀 반으로 나누어서 10일 성경학교(10day Bible school)에 입학시킨다. 물론 이때 사용되는 경비는 참석자의 자부담이다.

이 과정을 성실하게 마친 사람에게는, 한 달 동안 실시하는 ‘달성경학교’(one month Bible school)에 입학시켜서 5년간 꾸준히 교육을 받으면 유급조사(paid helper)로 인준하여 준 목회자의 사역을 시킨다. 유급 조사 가운데에는 학습을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도 하였으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각 선교부에서 실시하던 달성경학교가 점차 정규적인 ‘성경학교’(Bible Academy)로 발전하여 계절제 운영이 아니라 상시 운영하는 학교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각 노회는 자체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노회 직속의 성경학교를 하나씩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제주노회의 경우에는 육지와의 거리 관계상 성경학교 운영이 필수적이었다.

제1회 성경학교는 1931년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한 달 성경학교 과정으로 제주 성내교회 유치원에서 개원하였다. 참석자는 남녀 30명이었으며, 교수는 이기풍, 김재선, 조상학 목사였다. 이들 세 교수들이 육지로 떠난 다음에는, 이어서 제주도에 부임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교수진을 구성하여 지속적으로 운영하였다. 여기에는 선교사 탈마지 목사의 공헌이 컸다.

1934년에 실시한 교과과정은 이렇다.37)



제주성경학교는 1935년에 이르러 독자적인 건물을 가지고 운영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36년에 성내교회에서 기지 50평과 일금 300원을 기증하여 성경학교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성내교회가 제주성경학원을 위하여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정도로는 건물을 마련하기에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1936년 제25회 총회의 허락을 받아 전국 교회를 상대로 모금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도종 목사와 정순모 목사는1936년 가을과 겨울에 전국 교회를 상대로 직접 찾아가서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는 일을 떠맡았다. 이들이 먼저 찾아간 지역은 서울과 황해도 지역이었다. 이 상황을 《기독신보》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로 교제들이 한 달 동안 경성과 황해도의 각처 교회로 다니면서 여러 형제자매의 도와주신 덕택으로 몸도 평안하고 소기의 성경학원 건축 연보도 뜻대로 잘되었으므로, 우선 우리 두 사람은 제주노회를 대표하여 감사함을 마지아니하는 바이며, 연하여 아직 다니지 못한 북선, 서선, 영남 방면에서 음력 정초를 지나서 착착 방문하려 하오니 모쪼록 잘 후원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38)


서울과 황해도에서 1,210원에 이르는 만족스러운 모금의 결과를 거두고 이어서 1937년 3월에는 평남, 평북, 함남, 함북 지역과 만주 지역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돌면서 모금활동을 벌인 결과 1,046원을 모금할 수 있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순모 목사는 1938년 봄에 경성지방을 거쳐 북쪽 지방을 또다시 방문하여 970원을 추가로 모금할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39년에 건평 40평의 석재 성경학원과 35평의 아연제 기숙사까지 완공할 수 있었다. 이 상황을 총회 시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4. 특별 사항
② 전선 각 교회의 뜨거운 동정과 본 노회 안 교인들이 열심히 순 석재 40평의 성경학원과 아연제 35평의 기숙사를 건축하여 남녀 교역자를 배양하오며…….39)

1937년에 제주노회는 총회에 “성경학원을 신건축하여 교역자를 배양코져 하오며”라고 보고하였듯이, 성경학원 건축은 곧바로 목회자 양성과 공급이 최우선적인 목적이었다. 실제로 제주노회로서는 1930년 이후 1939년에 이르기까지 평균 20여 교회가 있었던 데 반해서 목회자는 4명에서 6명에 이르렀으므로, 목회자 한 사람이 평균 네댓 교회를 돌보아야 함으로 선교와 부흥의 차원에서도 인적 자원의 부족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이상과 같은 긴급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더불어 한국에 대한 경제적 착취가 가속화되기 시작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국 교회를 상대로 모금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38년 2월에 제주성경학원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이기방, 조남수, 고차숙, 좌환겸, 김태화, 윤재상, 이태주, 문태길, 강성립”40)등이었다.
제주성경학원의 교사진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6. 청년면려회의 조직과 활동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앤더슨(Wallace J. Anderson: 安大善) 목사는 안동 선교부에서 사역하는 동안에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청년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 줄 수 있는 조직으로 청년면려회(The Christian Endeavor Union)를 창설하였다. 이 운동은 미국 포틀랜드 회중교회 클락(F.C. Clark) 목사가 1881년 창설하여 미주에서 효과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21년 2월 5일에 경북 안동교회에서 ‘청년면려회’를 창설하여 당년에 10여처를 조직함으로써 한국기독교 청년면려회의 효시가 되었다.

193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청년면려회 사업을 적극적으로 권장함으로써 1934년 전국에 지회 1,067개소, 지방연합회 26개소, 총 회원 31,394명으로 발전했다. 청년면려회의 주요 사업은 교회 안에서 헌신예배가 대표적인 것이었고, 교회 밖의 사회운동으로 강연, 금주, 금연, 물산장려 등에 중점을 두었다.
1920년대 말경에 이르러 제주도에서도 청년면려회 운동이 보급되기 시작하여 성내교회, 모슬포교회, 한림교회, 삼양교회, 서귀포교회에서 미약하나마 조직되었으며,1931년 10월에 ‘기독청년면려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이 부분을 《기독신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조선의 남단 전라남도 제주도……그곳에 있는 기독청년면려회가 약 3년 전에 조직 되었는데, 지난 1931년 10월 18일 하오 4시에 제주읍 서문통 예배당에서 김영식 목사의 사회하에 성대히 개최되었는데, 9개 단체의 대표 32명이 출석하였으며 그 선거된 임원은 여좌하며, 임시 사무소는 제주읍 일도리 상교동 1449번지 본회 서기 김영범 씨 댁으로 정하였다.


고문: 김영식, 고영흥
회장: 지동국 부회장 겸 총무: 김종하
서기: 김영범 회계: 전우현41)


이렇게 제주도 교회들은 기독청년면려연합회를 조직하였으며, 각 교회들은 나름대로 청년면려회를 개교회적으로 조직하였다. 연합회의 조직과 활동을 자료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연합회가 활동하였을지라도, 연합회를 이끄는 지도자들과 활동도 결과적으로는 성내교회의 면려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3년 5월에 유급 총무로 발탁된 최광선도 성내교회 교인이었다. 또한 연합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성내교회 면려회는 교회 유치원 운영을 위한 ‘유지후원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밤’이라는 행사를 실시하였다. 이 행사에서 얻은 소득금은 유치원 기금으로 후원하였다.

또한 여름에는 ‘하기 아동학교’를 개설하여 성경, 한글, 동화 등을 가르쳐 주었으며, 1936년에는 사수동 기도처의 저녁예배를 회원들이 윤번제로 돌아가면서 인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서평 선교사가 1933년에 부르짖었던 ‘금주 선전 대운동’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다.

1935년에 시행하였던 금주운동에 대하여 《기독신보》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제주읍 서문교회 면려청년회 주관으로 제3회 금주 선전 대운동은 8월 12일 오후 8시반 당교회 유년 주교생 및 일반 신도 3~4백 명 된 대시위 행렬은 활영사(活暎社) 악대를 선두로 금주가를 고창하며, 금주 단연이라고 쓴 등을 일제히 들고 금주 삐라를 산포하며 시내를 일순하니, 천지를 진동할 듯한 금주가의 고창 소리에 몰려드는 시민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어……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었다 한다.42)


이기풍 목사가 성내교회 당회장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조직된 면려청년회는, 1931년에 제주도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참여하여 연합회를 조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3년에 피선된 유급 총무 최광선 씨가 1934년부터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연합 활동이 크게 부흥하였다. 최광선 총무가 2년여 활동하다가 중단하였으나 연합회는 힘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부흥하였다.

이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면려청년회는 결혼하지 않은 청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남선교회/여전도회의 연령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활동이 곧바로 교회의 발전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활동이야말로 제주도 교회들의 부흥과 직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제주도 내 교회의 절반 정도가 면려청년회를 조직하였다는 사실은 미조직 교회가 아직도 미약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

26) 로간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유진 벨 선교사의 사촌이다.
27) 《기독신보》, 1934년 2월 14일자.
28) 《기독신보》, 1935년 10월 2일자.
29) 이근호 목사와 이도종 목사는 전북노회에서(1927년 봄) 나란히 목사 임직을 받았다.
30) 제20회 총회 보고서(1931), p.96.
31) 제21회 총회 보고서(1932), p.16.
32) 《기독신보》, 1932년 12월 21일자.
33) 《기독신보》, 1933년 11월 29일자.
34) 양동혁 목사는 전라남도 담양 출신으로 탈마지(J.V.N. Talmage: 타마자) 목사가 경영하던 순담성경학교 출신이었다. 따라서 제주노회 방조회원으로 있으면서 제주성경학교 교수였던 탈마지 목사의 추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동혁 목사는 한국전쟁 기간 중 담양에서 순교하였다.
35) 한때의 실수가 다음 기회에 순교로 이어지는 경우를 목포의 박연세 목사(1883-1944)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36) 《모슬포교회100년사》, 백춘성, 천국에서 만납시다, 1980, 박용규, 한국교회와 민족을 깨운 평양산정현교회, 2006.​
37) 《기독신보》, 1934년 3월 14일자.
38) 《기독신보》, 1937년 1월 19일자.

39) 제28회 총회록, p.126.
40) 《기독신보》, 1938년 4월 12일자.

41) 《기독신보》, 1931년 12월 9일자.
42) 《기독신보》, 1935년 9월 11일자.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