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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24, 2016

 


제2장

제주노회설립


이기풍 목사는 제주 선교사로 재차 부임한 후 1928년에 회갑을 맞이하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노년에 접어들어 옛날처럼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내교회에서 처음부터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던 김재원 장로의 동생 김재선 목사가 1928년에 제주도 출신으로서 목사로 장립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렸다. 이미 제주도 출신으로 전북노회에서 1927년에 임직한 이도종 목사에 이은 경사였다.

김재선은 1921년 6월 제8회 전남노회에서 신학 지원자로 허락을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고, 1928년에 전남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고 제주도 삼양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도종이8) 1922년 2월에 회집한 제9회 전남노회에서 신학 지원자로 허락을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하고, 1927년 6월에 전북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고 김제의 성말, 신풍, 월봉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김재선 목사는 1928년부터, 이도종 목사는 1930년부터 제주도 에서 사역하여, 이제 제주도가 나름대로 독립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이기풍, 최흥종 두 목사의 배려도 컸다. 즉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제주의 경제 상황이 어려워진 가운데 전라남도 여러 지방까지 정기, 임시노회에 참석하고 이어서 긴급한 서류 작성을 위하여 노회 사무실을 찾아야 하는 교통비와 번거로움 등을 감안하여 제주시찰이 전남노회로부터 독립하여 제주노회로 서게 하였다. 이한 독립은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와 전남노회에서 두 목회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 전남노회 및 총회의 결의
1930년 9월 12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한 제19회 총회 앞으로 전남노회는 제주시찰을 제주노회로 분립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당시 조직교회 6개처, 미조직교회 11개처였으므로, 형식상의 요건인 5조직교회라는 기준은 넘어섰다. 하지만 노회를 운영할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교통의 불편함을 감안하고, 분립 이후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이렇게 선택하였을 것이다. ‘전남노회 상황 보고’는 다음과 같다.

       ​4. 특별 형편
           1. 제주시찰 구역은 형편에 의하여 금번 노회 결의로 분립 청원을 하오며
           2. 제주 모슬포 지경에서는 반종교운동의 핍박으로 교역자와 직원의 곤란이 있사오며.9)


이상과 같은 청원을 받아들여서 총회는 이렇게 결정하였다.

      ​十. 전남노회장의 청원한 제주노회 분립 청원은 허락하되
          1. 명칭 : 제주노회로

          2. 장소: 제주 성내교회로

          3. 시일 : 본년 11월 내로

          4.조직 : 회장은 최흥종 씨로 5. 문부는 전남노회에 위임하기로

          ​6. 재정은 전남노회 청원대로 2/3는 전남노회에게 1/3은 제주노회에게 주되 채권채무가 있으면 이상과 같이하기로

          ​7. 전남노회 선교사 중 1인은 제주노회에 언권회원이 되어 방조케 할 일이외다.10)

이러한 총회의 허락에 의하여 제주노회는 1930년 11월 14일 창립 노회를 개최하였다. 창립 노회의 초록은 다음과 같다.

          ​1. 장소: 제주 성내교회당
          2. 일시: 11월 14일 하오 8시~17일 하오 1시
          3. 회원수: 목사 6인, 장로 7인, 언권방조회원 선교사 3인, 목사 1인
          4. 임원선거: 회장-최흥종, 부회장-김재선, 서기-이도종, 부서기-부상규, 회계-김재원, 부회계-이덕련
          5. 목사 이동: 이도종 목사는 중문리, 법환리, 서귀포, 효돈 등 4개처 교회 전도목사, 김재선 목사는 성읍리, 세화리 2처 교회와 남원리, 표선리, 오조리,    성산포, 김녕지방 전도목사
          6. 삼양리, 조천리 2처 교회가 연합하여 목사를 청빙하기로 함.
          7. 장로 선택: 4인 허락
          8. 시찰 구역은 동, 서 2구역으로 하되 동구역은 성내로부터 서귀포까지, 서구역은 법환리에서 내도리까지.
          9. 성경학원의 위치는 성내에 치(置)하기로 함.
        10. 노회 재산은 재단법인이 분립될 시까지 전남노회 재단법인에 보관하여 두기로 함.
        11. 별 신학생은 김재선, 주일학교 강습생은 김영식 씨로 함.
        12. 규칙은 당분간 내 정기노회 시까지 전남노회의 규칙을 준용키로 함.
        13. 내회 장소는 신우면 금성교회당으로 함.11)


노회 구성에서 이도종 목사는 서기에, 아버지 이덕련 장로는 부회계에, 그리고 김재선 목사는 부회장에, 형인 김재원 장로는 회계에 선출되었다.

제주노회는 설립되었지만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가 쌓여 있었다. 첫째는 1929년부터 시작한 미국의 경제공황으로 인한 재정적 압박을 이겨내야 했으며, 둘째는 설립노회 당시의 공로자들이 1932년에 이르기까지 떠나게 되었으므로 자체적으로 발전을 도모해야 했다. 셋째는 제주도에서 특히 왕성하였던 사회주의 계열의 반기독교적 정서를 달래야 했다. 넷째는 자체적인 사업으로 성경학교와 여타의 기관을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의 문제였다. 다섯째는 일제의 강압적인 신사참배 요구에 맞서서 신앙을 지키는 문제였다.

2. 목회자의 이동
전남노회로부터 제주노회가 분립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 최흥종 목사와 이기풍 목사이다. 특히 최흥종 목사는 광주 토박이로서 광주에서 개신교 유형의 첫 번째 예배인 광주 금정교회(현 광주제일교회)의 크리스마스 기념예배(1904년 12월 25일)에 참석한 이래로 광주 봉선리 나환자 집단치료소의 한국인 책임자, 광주중앙교회를 설립하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전념하다가 1921년에 목사 임직을 받은 후 총회 파송 시베리아 선교사 2회 역임, 광주 금정교회 담임목사 등의 목회 사역에 전념하였다. 이 사이에 최흥종 목사는 노동공제회 전남지회장, 신간회 전남지회장, 광주 YMCA 설립, 마약 퇴치 운동 등 사회 제반 분야에 걸쳐서 크게 활동함으로써 교회 안팎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도에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2. 제주 모슬포 지경에서는 반종교운동의 핍박으로 교역자와 직원의 곤란이 있사오며”12)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반기독교적 정서를 가진 사회운동가들을 기독교의 ‘인도주의적 사회봉사 활동’(Humanitarian Relief Activities)으로써 감화 시키는 방법을 도입하여야 했다. 따라서 최흥종 목사의 삶을 이끌었던 나환자들을 위한 ‘버림’(放)이야말로 반기독교적인 사회운동가들과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었다.

최흥종 목사의 부임과 활동으로 모슬포 지역의 반기독교적 정서는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 특히 최흥종 목사가 제주노회를 전남노회로부터 분립시켜 제주도 교인들의 자긍심을 높임으로써 교회 내 외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최흥종 목사는 이미 50의 나이에 이르렀으며 제주도 특유의 풍토병이라 할 수 있는 ‘수토불복증’이라는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는 이기풍 목사가 겪었던 ‘성음부족증’과 같은 유형으로 육지에서 제주도에 정착하려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질병이었다. 그리하여 최흥종 목사는 1931년에 이르러 “육지에서 1년간 휴양키로 하고 제주도를 떠났으며”, 그 빈 자리를 전남노회와 순천노회에서 공동으로 파송하는 조상학 목사가 제주도 산남지방을 맡아서 수고하였다.13)
조상학 목사는 고산교회에 주 거주지를 잡고서 인근 지역 교회들을 돌보았으므로 모슬포교회는 전담 교역자를 원하였으며, 이 사역을 감당한 사람이 최흥종 목사의 사위인 강순명 전도사였다.

강순명 전도사는 아직 목사 임직을 받지 않았지만 장인 최흥종 목사에 못지않은 사회봉사의 실천자였다. 그는 1928년에 전주 서문교회를 담임한 배은희 목사와 함께 ‘독신전도단’을 세워서 목회자가 없는 지역에 사회봉사 활동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여기에서 독신전도단의 모습을 잠깐 알아보기로 한다.
강순명 전도사는 1928년 7월에 배은희 목사, 유상백 장로(상업은행 대리), 신현창 장로(전주 의원장), 김병수 장로(이리 삼산의원장), 강봉의 장로(독농가) 등과 함께 독신전도단을 창설하였다.14) 1928년 8월 1일자 《기독신보》는 이렇게 전한다.

독신전도단
(전주) 전주에 있는 교회 몇 청년들은 누가복음 14장 26-27절과 마태복음 19장 12절 말씀을 터 삼아 아래와 같은 세 강령을 세워가지고 독신전도단을 조직하고 단원을 모집하여 홀로 전도에 진력하리라는데 그 강령은 아래와 같다더라.

一. 인류는 다 유물(唯物)의 길을 밟는다. 우리는 신국운동을 기함.
二. 시대는 예수 재림의 불원(不遠)을 고한다. 우리는 복음선전을 촉진함.
三. 경제는 교역의 현제(現制)를 위협한다. 우리는 가족책임을 초월함.

그렇지만 독신전도단의 헌신적인 사회봉사와 교회 사역은 주변의 목회자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이들이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헌신적인 섬김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질시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새벽기도를 비롯한 각종 기도회를 이끌었으며, 열정적인 설교는 교인들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교회는새로운 신자들이 등록하는 등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강순명 전도사의 이와 같은 열정적인 신앙과 섬김의 삶은 전라북도 익산군 춘포면에서 1년여 만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이단성 시비로 목회 사역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모슬포 지역에서도 강순명 전도사의 신학 학력에 대한 시비가 일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단성 시비까지 일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제주노회는 총회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제주노회 상황 보고
     4. 특별 형편
         교인들이 독신전도단에 해독을 받아서 유급 교역자와 치리회를 경히 보며 교역자에 대한 연보와 상회 상납금에 대한 연보와 기타 각항 연보의 힘을 잃고, 교역자 세우기에크게 곤란한 일이 있사오며.15)

아직 모슬포교회 당회장직을 유지하고 있는 최흥종 목사는 사위 강순명 전도사가 제주노회로부터 배척당하는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 이러한 배척은 사회봉사와 헌신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당시 교회가 받아들여 주지 않았던 상황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가운데 최흥종 목사는 1931년 10월 즈음에 여수 애양원 나환자들의 탄원서를 받는다.

    ​나병자들의 슬픈 원정(寃情)
    전남 여수 나병원 문밖에는 전국 각처에서 입원을 희망하고 모여든 환자가 날로 늘어감은 심히 유감된 바라. 정원 외에는 더 수용할 수 없는 사정에서……저 가련한 자들을 서로서로 구조하자는 생각이 불일듯하여 병원문 밖에 토지를 건설케 하고 조선나환자공제회라는 실로 애처로운 회가 병원 수용환자 중에서 현금 조직하여 나온 지가 4~5년이 되었도다……참담한 그들의 사정을 제주도 모슬포교회에 시무하시는 전 서 시베리아 선교사 최흥종 목사에게 고백하였더니……그들을 위하여 출마하시게 된 목사님의 허락은 나환자 2만여 명의 입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였도다. 최 목사님의 초연하신 허락은 사회 내 정치사업은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다음과 같은 총회의 허락을 바라더라.

    ​총회 진정의 건
    1. 전 조선 나환자를 위하여 구제부를 조직하여 주실 일
    2. 최흥종 목사를 전 조선 지교회에 동정 금품 및 물품 요구에 대하여 허락하여 주실 일
    3. 공제회 보고를 위한 언권 허락할 일
    4. 위급환자 50여 명을 위하여 1개월 식량을 당석 연보로 부조하여 주실 일
        여수군 율촌면 신풍리 조선 나환자 공제회 회장 이종수16)


그리하여 최흥종 목사는 사위 강순명 전도사를 모슬포교회로부터 철수시키기에 이르렀으며, 본인도 모슬포교회 당회장직을 사임하고 서울 YMCA에 ‘나환자근절협회’를 만들어서 전국을 상대로 한 모금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제주도의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첫째, 일제가 1931년에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고 한국을 병참기지화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함으로써 종교적인 면에서 피폐해지기 시작하였다. 둘째, 1929년 미국에서 일어났던 경제대공황이 한국 선교의 지원을 감축시킴으로써 교회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셋째, 일본으로 이주하였던 제주도 출신 출향인들에 의한 공산사상의 잠입이었다. 넷째, 이러한 상황에 목회자들마저 제주도를 떠남으로써 교회의 상황도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서 목회자의 이동을 알아보기로 하자. 이기풍 목사가 떠나고, 산북지방 전도목사를 맡았던 김영식 목사도 떠나고, 최흥종 목사가 떠나고, 산남지방을 맡았던 조상학 목사도 떠남으로써 새로운 목회자가 부임하여야 하였다. 이렇게 비게 된 목회자 자리에는 산남지방의 목회자로 전남노회와 순천노회의 연합으로 파송된 목회자 정순모 목사가 부임한다. 이 시기의 목회자 변동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 이도종 목사는 이덕련 장로의 장남으로 1892년에 태어나 금성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한학을 공부한후 1910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고, 1915년 4월 25일 이기풍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제주노회,“이도종의 생애와 순교”, p.56).
9) 제19회 총회록, p.90.

10) 제19회 총회록, p.34.
11) 《기독신보》, 1930년 12월 17일자.

12) 제19회 총회록, p.91.

13) 조상학 목사는 1930년 8월 15일 현지에 도착하여 시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와 함께 순교하였다. 전북노회는 1929년 말부터 제주노회 선교에 손을 떼고 충남선교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14) 독신전도단의 단원은 임완식, 문남칠, 이춘식, 최동훈, 백용기, 윤남하, 이남철 등의 남자 단원과 임영자,정순영, 백신애, 이준례 등의 여자 단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재정은 신현창, 유상백, 김병수 장로 등이 맡고, 훈련을 맡은 교사는 배은희 목사, 강순명, 김종흡(전주 신흥학교 교무주임) 등이었다.

15) 제21회 총회록(1932년), p.119.

16) “나환자들의 슬픈 원정”, 《기독신보》, 1931년 9월 2일자.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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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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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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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