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2016.08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24, 2016

 


제3부
1927-1945 제주노회의 조직


제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
1. 이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
2. 이기풍 목사의 재부임과 산북지방
3. 부흥회


제2장 제주노회 설립
1. 전남노회 및 총회의 결의
2. 목회자의 이동


제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전도대회 개최
2.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지원
3. 제주도 부흥의 주역 목회자들
4. 추자도 복음 전파
4. 제주성경학교 설립
3. 청년면려회의 조직과 활동


제4장 시련과 좌절
1.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2. 신사참배 강요
2. 일제 말기의 제주교


들어가는 말


1927년에 이르러 제주도 교회는 지역을 불문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존경하는 목회자이며 대스승인 이기풍 목사를 다시 청빙할 수 있었다. 이기풍 목사가 성내교회를 중심으로 산북지방에서 활동하였다면 1929년에 모슬포교회에 부임한 최흥종 목사는 산남지방의 교회 부흥에 크게 기여한 지도자였다.

이 두 지도자는 제주노회를 전남노회로부터 분립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제주노회의 발전을 위하여 성경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강화시키는 등 크게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1931년을 기하여 이기풍, 최흥종 두 목회자가 육지로 각각 떠나고 이어서 제주도 교회들의 힘은 미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 방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1929년에 몰아닥친 미국의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각 선교회들의 재정적인 타격이 한국에도 밀려들어와 교회의 자립도가 낮아지기 시작하였다.

둘째, 일제가 1931년 만주에 괴뢰 정권을 세운 이래로 한국에 대한 강압정책이 다시 집요하게 실행되었다. 그리하여 한국 전역을 일본의 병참기지화하면서 한국인들의정신을 일본화시키려는 정책을 강화시켜 나갔다.


셋째, 일제는 1925년 남산에 신사 본궁을 세운 이래로 전국적으로 신사를 세우고서한국인들에게 신사에 참배하도록 강요하였다.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각종 불이익을 주어서 교회의 힘이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넷째, 이러한 일제의 강압정책에 맞서서 국내에서는 반일운동도 그만큼 강해지면서 공산주의가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공산주의도 신사참배 못지않게 기독교에 대하여 반대함으로써 기독교권의 세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 이상과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서, 즉 한국에 대한 착취와 핍박 속에서 한국인들의 삶이 피폐해져 가고 한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여 갔다. 이는 그만큼 교회의 힘도 약화되었음을 말한다.


여섯째, 제주도에서는 걸출한 두 명의 목회자가 제주노회를 독립시켰으나 자립할 여력이 없는 제주도 교회들이 한동안 경제적 힘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일곱째, 1932년 이후로 제주도 출신 목회자들과 육지에서 청빙된 목회자들이 아직까지는 제주도 교회를 이끌어 갈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 기간에 제주도 교회들의 약화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와 정치적 압박, 즉 정치, 사회적 문제이다.

둘째 재정적 약화이다. 한국이 빈곤 국가로 전락하면서 경제적인 자립도가 퇴보했다.

셋째는 인적자원의 약화이다. 제주도 출신 목회자들은 아직 경험 부족인 상태였고 육지에서 청빙된 목회자들도 선배 목회자들의 능력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이 기간, 즉 1930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은 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시대였다.


제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


1 . 이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

1919년 3·1만세운동의 좌절로 인하여 한국인들은 민족적 자각심을 갖기 시작하였으나 이러한 힘을 하나로 뭉쳐 줄 조직력이 아직 미약하였다. 그때 나타난 단체가 기독교청년회, 즉 YMCA와 YWCA였다. 이 두 단체는 기존의 조직력을 강화시키면서 사회적 지도자들을 흡수해 갔으며, 그 에너지가 ‘노동공제회’라는 이름으로 뭉쳐졌다.

주로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된 노동공제회는 각 지역에 농업인, 상공인들이 하나로 뭉쳐서 일제의 착취에 맞서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투쟁’이라는 행동이 뒤따랐으며, 결과적으로는 1917년에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렸던 볼셰비키 공산 혁명의 이론과 방법론이 도입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인 지도자들 가운데 순수한 민족운동으로 출발하였던 사람들이 이 단체에서 빠져나오자, 노동공제회는 1925년에 조선공산당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순수한 기독교 사회봉사를 주창하는 기독교 운동이 전개되었다. 각 교회와 단체들이 주축이 된 교육(야학, 부인교육, 소학교, 중학교 과정 설립), 재정적 자립 추구(신용협동조합의 결성), 농업의 선진화 추구(농업 선교사 초청 농사 강좌와 농촌 선진화 지도운동), 빈민구제운동, 그리고 사회정화운동 등이 일어났다. 술과 담배 그리고 마약과 공창제도를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기독교대한부인절제회’라는 이름으로 주로 여성단체들이 앞장서서 이 운동을 전개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독교 사회운동이 제주도에는 아직 크게 밀어닥치지 않았으나 그 결과를 알 수 있는 운동들이 적잖이 있었다. 여기에 그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 교육운동
제주도의 교육입국운동은 박영효 대감과 제1기 이기풍 목사의 사역 기간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번진 교육운동이 제주도에도 불어 닥쳤다. 그리하여 민족 스스로 자립하려는 의지가 불타기 시작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21년   4월 12일.   제주교육기성회 결의. 사립학교 5개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제주면민이 경비를 부담하기로 함.
​1921년   5월 13일.   구좌면 내 각리 교육열이 치성. 개량 사숙을 곳곳에 설립하여 보통학과 과정에 학생이 5백 명.
​1921년   6월 26일.   제주면민이 공동부담 경영으로 ‘제주명신교’ 설립 승인.사립 명
​1921년 10월   1일.   신학교 삼양리에 분교 설치하여 개교.
​1921년 10월   4일.   신우면에서 교육진흥회를 조직하고 …… 백창우 씨가 사립학교 교사 건축비로 5천 원 기부하다.
​1921년 11월 25일.   제주 성산청년회 주최 야학회 개최, 지원자 10여 명.

​1922년   5월 .           여성 문맹 퇴치 강습소인 여수원(女修園)을 강평국(姜平國)과 최정숙(崔貞淑)이 설립하였으나 후에

                                 제주 명신사립학교에 통합되다.

나. 사회계몽운동
3·1만세운동 이후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민족의 자본 축적과 힘의 규합이라는 대의명제가 대두되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러한 대의명제를 실현시키거나 사회단체를 조직하는 기관은 없었다. 우선은 기독교 기관에서 세운 YMCA와 YWCA가 주축이되었다. 여기에 반하여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기관들도 힘을 합쳐서 사회단체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21년   8월 12일.   제주흥학회 대강연회 개최 청중이 7백여 명 참석.
​1921년   8월 27일.   조선여자교육회 순회강연단 제주에서 강연. 주제는 가정은 인생의 낙원(김미리사), 시간은 생명(김순복).
​1922년   6월 28일.   제주기독청년회 창립회.
​1922년   7월 18일.   기독청년회 주최 악연주 개최.

​1922년   7월 21일.   제주공립보통학교에서 제주청년수양회 주최 강연회 개최. 현대 청년의 문화적 사명(최원순),

                                 생활의식의 경신(국기열).제주
​1923년   4월   4일.   금연회 총회 개최(동아일보 4월 18일자).
1923년 11월 19일   제주금주회관 준공식 거행.

​1925년   9월 22일.   제주도 신촌마을 금주단연을 실천한 지 1년여가 지났는데 아직까지 성적이 양호하다.
​1925년 12월   9일.   제주기독청년회 주최 토론회 “현대 우리의 경제 파멸을 면하려면 보수계급을 각성시키고

                                 신흥청년을 촉진시켜야…….”
​1925년 12월 26일.   제주여자청년회 창립 총회.

​1921년   1월.            제주여자청년회 창립, “힘써 배우고 굳센 단결로 삶의 권리와 자유를 찾고자…….”
​1927년 8월 27일.     금주단연동맹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의 주민들이 절약을 목적으로 조직하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제주도 교회들은 1920년부터 1927년까지 크게 성장하였다. 그렇지만 이 기간에 몰아닥친 재정적, 사회적 압박은 1930년대에 들어서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기풍, 최흥종 두 목회자의 부임은 제주교회에 이러한 압박들을 이겨낼 수 있는 영적 준비 기간이 되었다.

2. 이기풍 목사의 재부임과 산북지방
이기풍 목사의 재부임은 전임자 김정복 목사의 준비를 발판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김정복 목사는 예배당 건축에 따른 부채를 청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록 출석 교인 150여 명 정도의 소규모 교회였지만 재정적 자립을 이룬 상태에 있었다. 이제성내교회는 교회 발전에 불을 붙여 줄 목회자를 찾고 있었다. 이기풍 목사의 부임 그 자체가 성내교회뿐만 아니라 제주도 전 교회와 교인들에게는 힘이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부임하면서 삼양교회와 함께 꽃주일 행사를 거행하였다.

가. 꽃주일 행사 거행

이 당시 꽃주일이란 개념은 교회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 교회 교우들에게 발표회를 갖는 일종의 학예회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문화공연이 적었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에게는 학교나 교회에서 실시하는 운동회, 학예회, 음악발표회, 연극 등이 단순히 주최 측의 행사가 아니라 전 지역의 행사가 되곤 하였다. 따라서 제주읍에 위치한 성내교회의 꽃주일 행사는 자연히 제주읍 전체의 행사로 치러졌다. 이 부분을 《기독신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1927년) 6월 12일 서문교회(성내교회)는 꽃주일을 지켰는데 김성택 씨 사회 아래 김창현 씨의 강도와 학생들의 유희, 창가, 군악, 동화가 있어 천여 명의 청중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더라.1)


이어서 1927년 6월 26일에는 삼양교회에서 꽃주일 행사를 거행하면서 이기풍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였는데, 성내에서 삼양리까지 이동하는 사람들을 배려하여 동부 자동차부와 서부 자동차부에서는 양 교회의 주일학생들과 교인들을 수송하기 위하여 자동차를 무료로 승차시켜 주었다. 여기에 군악대까지 동원되어 행사를 후원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성내교회와 이기풍 목사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알 수 있다.

나. 사숙의 중단과 유치원 개원
1920년대부터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사숙 설립 열풍은 의지는 좋았지만 실현 가능성에서는 희박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사숙의 운영에는 재정과 인력의 지원이 뒤따라야 하는데, 한 교회가 이 대사업을 지탱하기에는 재정적, 인적 자원이 부족하였다.

앞서 이기풍 목사가 처음 제주도에 도착하였을 때 영흥학교를 세우고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 남녀 소학교가 명맥을 유지하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김창국 목사가 부임하여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나누어 교육하였는데, 재정 부족으로 여학생 사숙은1918년에 중단하고, 남학생 사숙은 1924년까지 진행하다가 중단하였다. 이렇게 중단된 사숙을 이기풍 목사가 다시 개원하였지만 여전히 어려움에 직면하여 이렇게 보고하였다.


          3. 학교 형편
              경제 곤란으로 사숙은 정지하였으나 유치원은 근근이 유지하여 가오며.2)


영흥사숙은 재정적 어려움과 학생수의 감소로 1924년에 완전히 폐교되었으나 그대신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성내교회가 유치원을 개원하게 된 원인을 여러 면에서 찾을 수 있지만, 삼양교회가 1923년에 유치원을 개원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1924년 10월 1일에 사립중앙유치원이 개원하였다. 전남도지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선구적인 유아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다. 교회 밖에서도 자녀들을 보내어 전도에도 큰 도움을 얻게 되었다. 원장은 김정복 목사, 그리고 그의 부인 홍(보)영의 책임 아래 운영되었다.3)

다. 여타의 활동
이기풍 목사는 다시 성내교회에 부임하여 교인들을 새롭게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기도훈련과 성경공부와 전도였다. 두 번째는 구호활동을 벌이고, 세 번째는 임직식을 거행하고, 네 번째는 제주노회를 설립했다.


1) 교인들의 훈련
이기풍 목사는 개인기도, 가정기도회, 연합기도회, 특별새벽기도회, 금요구역기도회등을 독려함으로써 기도의 생활화를 실천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교인들의 성경 공부를 강화시킬 목적으로 매 주일 성경월보를 가지고 교육시켰을 뿐 아니라 총회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성경통신과에 적극적으로 참여케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기적으로 실시해 오던 부흥사경회와 더불어 개인전도, 부흥전도 등을 통하여 교회의 발전을 시도하였다.


2) 구호사업
성내교회는 교인들의 훈련뿐만 아니라 교회 밖으로 손길을 펼쳤다. 이기풍 목사는 교회가 아무리 힘들어도 구제사업은 빼놓을 수 없는 교회의 중요한 몫이라고 결정하였다. 1927년 여름에 수재민들이 생기자, 전 교회가 힘을 합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펼쳤다.

교회의 힘이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재정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사숙까지 중단할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문교회는 지난해 수해를 당하여 아픔을 겪었던 형제자매를 위하여 160여 원을 구제하였다.4)


이 당시 쌀 한 가마니에 6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구제금 160여 원은 상당히 큰 액수였다.


3) 임직식

이기풍 목사가 성내교회에 재차 부임한 이후, 세 차례의 임직식을 가졌다. 첫 번째는 1927년 10월에서 1928년 4월 사이에 최정숙과 강홍섭을 안수집사로 임직하였으며,5) 두 번째는 1929년 9월 29일에 최정숙을 장로로 임직하였고, 세 번째는 강홍섭을 1931년 4월 5일에 장로로 임직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내교회는 당회장 이기풍 목사, 장로는 김재원, 고영흥, 최정숙, 강홍섭으로 제주도에서 가장 튼튼한 교회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최정숙 장로가 모슬포교회를 떠나 성내교회에서 장로 임직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최정숙 장로는 모슬포교회에서 사업자금 수백 원을 헌금하여 모슬포교회의 예배당 건축뿐만 아니라 주변지역 선교에 열심이었으나, 사업을 벌이면서 주위 사람들과 금전적인 관계가 있었다. 최정숙 영수가 금전 관계 문제를 세상 법정에 호소하자, 이경필 목사는 이를 성경의 원리에 비추어 권징하였으며, 6개월의 시무 정지 처분을 내렸다.6) 그리고 이어서 이경필 목사는 1927년 6월에 신병 치료차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갔다.

바로 이 시기에 최정숙 영수가 성내교회로 이명해 간 것으로 알 수 있다. 최정숙 영수는 이경필 목사의 권징에 순수하게 응하였으나, 이 사실이 좁은 지역사회에서 그의 입지를 좁게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하여 사업상 제주읍으로 확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새로운 각오로 신앙생활을 지속하려는 결단을 내렸을 것으로 본다.


4) 전도 활동의 전개
이기풍 목사는 1931년 4월 16일에서 23일까지 한 주간에 걸쳐서 목포의 여선교사 마틴(Julia Martin: 마율리)을 초청하였다. 마틴이 남녀 전도인 각각 1명씩을 대동하고 도착하여 기존의 방식대로 낮에는 성경공부와 심방을 하고, 저녁에는 심령대부흥회를 개최하여 전도사역에 큰 힘이 되었다.


3. 부흥회
제주 교회들은 1927년을 기점으로 새롭게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선교비를 절감하기 시작할 무렵이며, 동시에 일제가 한국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할 무렵인 점을 감안할 때, 실로 큰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의 이면에는 부흥사들의 부흥회가 있었다. 이는 아직까지도 제주도 주민들이 말씀에 의한 변화보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사를 목격함으로써 개종을 결심하는 경우가 생겨났고, 동시에 기존의 신앙인들도 재결단하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제주도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부흥사는 김익두 목사와 개성의 김상준 목사로, 신유와 축귀 등으로 산남지방의 여러 교회들을 변화시켜 나갔다. 특히 산남지방의 교회들은 은사 체험과 희생적인 헌금을 드린 반면에, 산북지방의 교회들은 교회조직에서 튼튼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시기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이 정도의 부흥이라면 제주 교회들이 나름대로 독립할 수 있는 길을 가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내와 삼양교회에 이어 산남지역에서 모슬포교회의 위임목사를 청빙하기로 한 것은 제주 교회들의 발전과 독립의 시기가 왔음을 말해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제주도 출신 목회자가 이도종, 김재선 두 사람에 이르렀다는 것도 제주도 교회의 독립 시기가 다가왔음을 말해 준다.7)

1) 《기독신보》, 1927년 7월 13일자.
2) 이기풍, 서문교회 보고서, 1928년 6월 5일자.
3) 이 교육기관을 통하여 성장한 인물들 중에 박충훈(대통령 권한대행, 1980), 김은식 장로, 문기성 목사 등이 있다.
4) 서문교회 보고서, 1928년 6월 5일자.
5) 최정숙은 모슬포교회에서 영수였다.
6) 한인수, 《호남 교회 춘추》, 25 (2006년 5월) p.109.​

7) 이도종 목사에 대하여는 제16회 총회(1927년) 전북노회 보고란에서 “신학준사 이도종, 이근호 양 씨는 금년에 목사로 장립하였사오며……”라고 하였으며, 김재선 목사에 대해서는 제17회 총회(1928년) 전남노회 보고란에서 “김재선 씨는 제주 삼양교회의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목사로 장립하여 시무케 하였사오며……”라고 하였다.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