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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Aug 01, 2016

 

제5장
최흥종 목사와 서서평 선교사

그렇다면 산남지방은 어떠하였는가? 이경필 목사가 1926년 말에 다시 부임하여 1930년 2월까지 재직하여 주로 고산교회에서 목회하다가 광주 금정교회(제일교회)의 청빙을 받아 떠났다. 그 사이에 모슬포교회는 자립의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에 단독으로 담임목사를 청빙하기로 하였으며, 최흥종 목사가 1929년 7월에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 사이에 동쪽 지방은 황해노회에서 양성춘 목사를 파송하여 서귀포교회를 설립하는 등 새롭게 부흥을 시도하였다.

1. 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산남지방의 핵심 교회라 할 수 있는 모슬포교회는 이경필 목사가 재차 부임하여 헌당식을 하고 사숙을 운영하는 등 자립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이 시기에 모슬포교회는 두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하나는 교회에서 큰 몫을 차지하였던 최정숙 장로가 성내교회로 떠나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모슬포와 대정 지역에 이재수의 난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주도의 지식층이 많은 관계로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전남노회 파송 선교사로서 이경필 목사는 이와 같은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슬포교회는 담임목사를 단독으로 청빙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슬포교회를 살릴 뿐만 아니라 산남지역 동쪽 지방을 전체적으로 살펴나갈 수 있는 큰 목회자를 요청하였는데 그 적임자가 최흥종 목사(1880-1966)였다.

그는 넉넉한 집안에서 성장하였으며, 젊은 시절 광주의 건달로 통했다. 1904년에 우연히 김윤수 집사를 통하여 복음을 접하였고, 1907년에 세례를 받았다. 남대리 선교사의 조사로서 영광군 염산리교회를 돌보기도 하였다. 1909년부터 1914년까지 포사이트(보위렴) 선교사를 돕는 의사로 일하였다.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하는 보위렴 선교사는 그에게 평생 큰 영향을 끼쳤다. 1912년 그는 포사이트의 의료봉사의 일원이 되어 제주도를 처음으로 찾게 되었다.

1915년부터 1918년까지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하였는데, 기미년 독립운동에도 적극 앞장섰다. 이 일로 14개월 옥고를 치러야 했다. 목사로 임직받은 이후에도 그의 활동영역은 교회의 틀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았다. 광주 YMCA를 창립하였고, 러시아 선교사로 사역하기도 하였다. 애양원 설립 과정에도 그의 역할은 매우 컸고, 신간회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감시는 나날이 심해졌고, 새로운 사역지에서 자유로이 사역하는 것을 원했다. 그리하여 모슬포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인 것이다. 최흥종 목사 위임식은 1927년 7월 24일에 거행되었다. 위임 예식 순서에 의하면 김영식 목사가 사회 및 설교를 맡고, 기도 및 성경 봉독은 원용혁 장로가 맡았으며, 권면에는 이경필 목사와 원용혁 장로가 맡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흥종 목사와 순서 담당자들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원용혁은 최흥종 목사가 1909년부터 관여하였던 광주 나환자 집단치료소(일명 광주나병원)에서 파송한 전도인으로 있다가 장로로 임직받은 사람이고, 김영식 목사는 최흥종 목사와 신학교 동기생으로 함께 졸업하고 함께 전남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아 사역하였던 목회자이다. 또한 이경필 목사도 최흥종 목사보다 선배 목회자로서 그의 사회봉사 목회자로서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모슬포교회 당회록은 이날의 예식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개회 …………………………………………사회자

찬송 ……………… 4장 …………………… 일동

기도 ………………………………… 원용혁 장로

취지 설명 ……………………………………사회자

찬송 ……………… 207장 ………………… 일동

성경 봉독 …… 고후 5:11-19 …… 원용혁 장로

설교 …………… 목회자의 책임 ………… 사회자

찬송 ………………………………… 김한유(나팔)

서약 …………………………………………사회자

악수례 …………………………………… 교회 대표

공포 …………………………………………사회자

권면 ……………신임 목사에게 ………… 이경필

본교인들에게 ………………………………원용혁

축사 …………………………………………김윤봉

답사 …………………………………… 최흥종 목사

찬송 ……………… 3장 …………………… 일동

축도 …………………………………… 최흥종 목사

최흥종 목사가 모슬포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자 이경필 목사는 곧바로 고산교회로 선교 거점을 옮겨서 산남지방의 서쪽을 담당하다가, 7개월이 지난 1930년 3월에 광주 금정교회의 청빙을 받아 이임하게 되었다.

한편 산남지방의 동쪽은 김성원 목사가 1926년 2월부터 돌보다가 1928년 7월경에 떠났다. 제주출신으로 목사 임직을 받은 김재선 목사가 삼양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지역 교회들까지 돌보기 시작하였다. 목양의 중심은 삼양교회였는데, 여타의 지역은 순회구역에 포함되어 성장이 더뎠다.

이러한 시기에 황해노회의 파송을 받고 1928년 10월경부터 양성춘(楊性春) 목사가 입도하여 성읍교회를 선교 거점으로 삼고 주변지역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양성춘 목사는 1929년 2월부터 8월까지 제주도 서귀포 지역을 순회하였는데, 이 시기에 서귀포의 박경옥 자택에서 10여 명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으며, 이 모임이 오늘날 서귀포교회의 시작이다.122)

그렇지만 또다시 황해노회의 재정적 압박으로 제주도 선교사 파송을 중단하여 양성춘 목사도 떠나고, 1930년부터 이도종 목사가 부임하여 산남지방 동쪽 지방의 중문리, 법환리, 서귀포, 효돈 등 4개처 교회를 맡음으로써 제주도의 선교는 선교사 파송시대를 접고 담임목회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혹독한 경제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으나, 1933년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교회 발전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122) 서귀포교회의 연보에 따르면, 양성춘 목사는 1928년 2월 8일에 첫 예배를 인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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