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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26, 2016


 

2. 산북지방의 선교


산북지방의 중심 교회는 아무래도 성내교회(당시는 서문교회)였다. 김창국 목사가 1922년 3월에 광주 양림교회로 떠나고 이창규 목사가 선교사로 전북노회의 파송을 받게 되었다. 이창규 목사는 1923년 1월 23일에 회집한 제12회 전북노회에서 “삼례교회를 시무하던 이창규 목사를 전도목사로 허락하노라”는 결정에 따라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창규 목사의 시무는 매우 짧았으며, 뒤를 이어서 김성원 목사와 김영식 목사가 짧은 기간 동안 산북지방의 여러 교회를 돌보았다.


가. 성내교회


이창규 목사가 성내교회에서 행한 중요한 사역은 예배당을 신축하는 일이었다. 성내교회는 1922년 8월 22일 제11회 전북노회에서 “…… 당석에서 연보한 금액이 140원이었다”는 보고와 함께 건축의 꿈이 익어가고 있었다. 이창규 목사는 1923년 부임 후 4월에 이르러 건평 52평의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건축은 그리 쉽지 않았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도 출향민들이었다. 이들이 1923년 6월에 70여 원을 헌금하여 보내왔다.

제주도 서문교회(성내교회)는 수년 전부터 성전을 신축코져 경영하였으나…… 금전의 공황이 여간 아닌 중에 일본 대판의 동포 중 믿는 형제 몇 분이 곤경에 처함을 알고 70여 원을 구집하여 보내었으므로…… 기부자의 이름과 금액은 고재만, 서삼룡, 장이보, 김사진 각 10원, 장두만, 문기천, 김재하, 무명씨 각 5원, 좌응순 3원 30전, 김경찬, 우병성 각 3원, 이중화 2원, 강좌규 1원…….103)

이상과 같은 헌금이 답지함으로써 성내교회 교우들도 힘을 합쳐서 성심성의껏 5,338원 80전을 헌금하여 부지는 620원에 매입하고, 총 건축비는 4,700여 원에 달하는 반양옥 예배당을 헌당할 수 있었다. 건축공사는 4개월 동안 진행되었으며, 1923년 8월 3일에 1,000여 명의 내빈이 축하하는 가운데 성황리에 낙성식을 거행하였다.104) 그렇지만 건축에 따른 부채가 청산되지 못하여 헌당식을 미루고 있다가 1925년 1월에 이기풍 목사를 초청하여 특별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 기간에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전남 제주 서문교회 김수사나 여사는 당년 70세의 노령으로 슬하에 일편혈육도 없이 독신으로 소소한 상업을 경영하여 현시 150원 가격의 가게를 장만하고 생활하던바 신앙 독실한 씨는 주의 사업을 위하여 그 가게를 교회에 기부하였으므로…….105)

이렇게 하여 성내교회는 건축 부채 500원을 갚아가기 시작하였으며, 1926년 8월 15일에 봉헌하였다.106)

성내교회가 아름다운 예배당을 신축하고 성장하기 시작하자, 이창규 목사가 성내교회로 하여금 선교지 교회에서 탈피하여 자립하는 교회로 독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단독으로 담임목사를 청빙하도록 촉구하면서, 자신은 산북지방의 다른 교회들을 돌보겠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이창규 선교사의 뜻에 따라 전남노회는 “전북노회 내 강도사 김정복 씨를 청빙하여 장립한 후 제주 서문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오”107)라고 보고하였듯이 김정복 목사는 1924년 2월에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4년 2월 23일 제주읍교회에서는 김정복 목사의 환영회를 김재원 씨의 사회로 개회하고 김두봉 씨의 환영사와 이창규 목사의 축사와……3월 2일에는 이창규, 이경필 목사가 김 목사의 위임식을 교인 일동의 서약으로 거행하였다더라…….108)


김정복 목사는 성내교회와 삼양교회 두 교회의 위임목사로 시무하는 한편 이창규 목사는 내도리, 금성, 한림 등의 산북지방 교회들을 맡아서 순회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그렇지만 이창규 목사는 제주도의 풍토가 맞지 않아 자주 발병함에 따라 1924년 9월에 사역을 중단하고 육지로 떠나고 말았다.

김정복 목사는 성내교회와 삼양교회의 위임목사로 사역하였으나, 1924년 9월 이후에는 이창규 목사가 떠남으로써 산북지방 여러 교회를 동시에 보살피는 광범위한 사역을 전개하였다.

김정복 목사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성내교회와 삼양교회에서 다같이 사숙을 운영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모슬포교회에서도 ‘광선의숙’을 재건함으로써 제주도에는 3개의 사숙이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1924년 총회록에는 서문교회와 성내교회 두 교회가 사숙을 가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유지해 오던 사숙(영흥학교)은 재정적 어려움과 학생수의 감소에 따라 폐교 조치를 하게 되어 마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러한 아쉬움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성내교회는 유치원을 개원하기로 결의하고서 전라남도 도지사의 허가를 얻기에 이르렀다.

사숙을 포기한 성내교회는 이왕에 전라남도 도지사의 허가를 받은 유치원 운영 경비를 교회에서 전담하기로 결의하였다.

본 월(10월) 1일로부터 개원하고 200명 학생이 공부하는 중인데, 원장은 김정복 씨 교사는 홍보영 씨요, 경비는 본교회의 제직의 전담으로 장차 더욱 확장할 계획이라하오며…….109)


성내교회의 이러한 결의와 딱한 사정을 알게 된 변호사 이창휘는 10원을 후원하여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이창휘 씨의 미거
제주: 경성에서 변호 사업에 종사하는 이창휘 씨는 당지 중앙유치원을 관람한 후 그 궁색한 정형을 듣고 10원금을 연조하였으므로 해 유치원이 감사한다더라.110)

김정복 목사는 1924년부터 성내, 삼양 두 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사역하다가 성내교회의 예배당을 신축하고, 고영흥(高永興) 장로를 장립시켜서 당회를 보강하고, 중앙유치원을 개원하고, 사숙을 성내, 삼양 두 교회에 설립하고, 이선광 여전도사를 재 청빙하여 여성 교우들을 강화시키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26년 가을에 성내, 삼양교회를 사임하고 벌교교회로 떠났다. 이기풍 목사는 1927년 2월에 고흥읍교회를 사임하고 성내교회로 부임하여 7월 31일에 위임받았다.

나. 산북지방 교회들의 선교


성내교회는 김정복 목사 때부터 자립 교회가 됨으로써 단독적으로 목회자를 청빙할 수 있었으므로 전북노회에서 파송하는 전도목사가 제주 성내교회를 거점으로 삼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전북노회는 1924년 6월에 회집한 제15회 노회에서 선교 거점을 한림으로 이전하기로 결의하였다.111)

이 과정에서 전북노회는 성내교회와 약간의 의견충돌이 있었다. 즉 성내교회 목회자사 택은 전북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이어서 기거하였을지라도 이 사택에 대해서는 성내교회 교우들의 헌금도 다소간 들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내교회는 교회의 사택을 매도하여 한림지역에 새로운 사택을 구입하겠다는 전북노회의 결의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북노회는 1925년 1년 동안의 목회를 위하여 춘기(5월) 성례전 집행과 목회 사역을 위하여 5월에 홍종필 목사를 파송하였으며, 추기(11~12월)에는 곽진근 목사를 파송하여 산북지방 여러 교회들을 돌보게 하였다.112) 이러한 상태로 1925년을 보내고 1926년 1월에 전북노회는 김성원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전북노회의 파송을 받은 김성원 목사는 1926년 2월 22일부터 28일까지 금성교회에서 산북지방 연합부흥성회를 인도하였다. 이 부흥회에서 “오전에는 40여 명이 공부하고, 오후에는 300여 명이 청강하며, 60여 명이 새신자를 얻었다.”113)

이처럼 김성원 목사의 활동으로 산북지방 여러 교회들이 힘을 얻었다. 그리고 김성원 목사는 1926년 6월에 회집한 제19회 전북노회에서 “세례교인 4인과 학습교인 16인을 문답하였으며, 김녕리에 교회가 새롭게 설립될 희망이 있사오며”라고 보고하였다. 특히 이 기간에 김성원 목사는 성내교회 사택을 매도하여 2,000원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 500원은 성내교회에 지불하고 나머지 1,500원은 식산은행에 저축하였다.

이 시기에 제주도 선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1926년을 기하여 지금까지 제주도 선교에 참여하였던 전북노회, 전남노회, 순천노회는 사회와 교회의 경제적 위축으로 인하여 한 노회가 단독으로 선교를 수행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세 노회는 ‘제주연합전도부’라는 이름으로 연합사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선교 본부는 전남 광주에 두기로 하였다. 전도 비용은 전북노회가 매년 500원을 지원하고 전남, 순천 양 노회는 세례교인 1인당 20전 비례로 회비를 거출하기로 하였다. 부족한 경비는 총회 전도부의 보조금과 독지가의 의연금으로 충당키로 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지금까지 전북노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받아 사역하던 김성원 목사는 전남노회로 이명하였다.

김성원 목사는 산북지방의 여러 교회와 전남노회에서 미처 손을 쓰지 못하던 산남지방의 동지방까지 맡기로 하였다. 이 시기에 제주도 산북지방의 대표적인 교회들은 금성교회, 삼양교회, 내도리교회가 있었고, 산남지방을 대표하는 교회들은 조천교회, 세화교회, 성읍교회 등이었다.

1) 금성교회와 이덕련 장로
금성교회의 1918년의 형편에 의하면, 이덕련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새로운 예배당 건물을 위하여 얼마간 저축도 하는 등 기도로 준비하여 왔으나,114) 1923년에 이덕련이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헌납하게 되었다. 이 부분을 《기독신보》는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 금성이란 곳에는 10여 년 전부터 주의 빛이 비추어 주 예수를 믿고 남여 10여인이 모여 예배하나 예배당이 없어서 일반이 우려하는 터이나 소수의 교인이라 물질적 힘이 부족함은 사실이더니 그 교회 영수 이덕련 씨가 자기의 주택 초가 한 채를 예배당으로 드렸으므로 일반은 씨의 성의를 축하며 열렬한 충심에 감복하다더라.115)

2) 삼양교회와 오주병 장로

삼양교회의 설립에 대하여 기록상으로는 1917년 12월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기풍 목사의 초기 선교사 시절부터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그곳에서도 나름대로 예배드리는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918년 7월 24일자 기독신보의 기록에 의하면 공식적인 설립에 이르기까지 30여명이 예배드린 것으로 보아서 산북지방 선교사와 전도인들이 삼양리를 순회구역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예배드리기 시작하다가, 1917년 12월에 이르러 오주병 씨의 변화가 교회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기독신보》는 이렇게 말한다.

삼양교회는 작년 12월 분에 비로소 설립된 교회로 남녀 30명이 이르러 재미가 많이 있는 중에 그곳도 형제의 집에서 모이는데 새로 믿는 오주병 씨는 이왕 술객으로 허망한 일을 많이 하던 것을 다 온전히 회개하고 믿는 날부터 열심히 믿는 형님이올씨다.…… 오십 원 가치 되는 자기의 집을 바쳤는지라 성안교회와 수원, 금성 양 교회가 그 형님의 열심 성의를 하례하는 중 이십여 원을 당장 연보하여 수리비로 도와주어……지금은 새 예배당에서 기쁨으로 예배하며…….116)

이렇게 보면 삼양교회는 1917년 12월에 비로소 교회로 설립되었으며, 점술사로 이름을 날렸던 오주병 씨가 예수님을 믿고 50원 가치가 있는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헌납하자 성내, 수원, 금성교회에서 수리비로 20원을 헌금하여 보탬으로써 1918년 여름부터 새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있었다. 이때에 지은 예배당이 8칸이었다. 오주병이 자가를 교회에 헌납하였다는 사실은 1919년 4월 2일에 회집한 제4회 노회에서도 “제주 삼양리 오주병이 자기 사택을 예배당으로 기부한 것을 보고하고”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헌신하던 오주병은 1923년 삼양리에 유치원을 세우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1924년 8월 6일에 장로로 임직받아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교회가 완전 당회로 발전하지 못함에 따라 목회자를 단독으로 모실 수 없었다. 성내교회의 김정복 목사를 삼양교회까지 겸하는 동사목회자로 청빙하자 교회는 또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교회가 부흥하자 1918년에 지은 예배당에 4칸을 확장시켜야 했다. 이 확장 공사는 일본 오사카로 떠났던 교우들이 헌금을 보내옴으로써 가능하였다.

삼양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게 됨에 따라 김정복 목사는 성내교회에 주력하고, 1926년 2월부터 김성원 목사의 지도 아래 크게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삼양교회는 김성원 목사가 재직하던 1926년 4월부터 1928년 4월까지 학습교인이 32명, 세례교인이 23명, 유아세례자가 8명이었다.117)
그러나 김성원 목사가 1928년 5월에 전도목사직을 사임하자, 삼양교회는 때를 맞추어 신학교를 졸업한 제주도 출신 김재선 목사를 단독 위임목사로 청빙하였다.


八. 전남노회 상황 보
고四. 특별한 형편
1. 금년 평양신학교 졸업생……김재선 씨는 제주 삼양교회의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목사로 장립하여 시무케 하였사오며…….118)


김재선 목사는 1928년 9월부터 삼양교회를 맡아서 목회하다가 1930년 11월 제주노회의 설립으로 인하여 사임하고, 이어서 “6. 삼양리, 조천리 2처 교회가 연합하여 목사를 청빙하기로 함”이라는 노회의 결의에 따라야 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제21회 총회 시에 제주노회 보고서에서 “순천노회에서 치리받았던 정태인 씨를 목사로 복직시켜 삼양교회 임시목사로 세웠사오며……” 라고 보고한 대로 정태인 목사가 삼양교회 임시목사로 재직하였다.

다. 산북지방 서부 지역


김영식 목사는 1928년 1월에 전북노회의 결정에 따라 김성원 목사의 후임으로 제주도 선교사로 부임하였다.119) 그는 부임 후 협재교회, 한림교회의 예배당을 건축하고, 애월리에는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내도교회를 재건하는 등 선교에 전념하였다. 김영식 목사는 전임 김성원 목사 때에 마무리된 그대로 570원을 들여서 한림포에 사택을 마련하고는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 협재교회
협재교회는 지역적으로 산남지방 관할이었다. 1921년 모슬포교회의 최정숙 영수가 이도종 전도인을 파송하여 예배드리기 시작함으로써 교회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신학생 전도인이었던 이도종 씨가 금성교회 출신인지라 형편상 산북지방으로 편입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호 마찰이 있었으나 1926년부터는 전남노회, 전북노회, 순천노회가 연합선교회 체제로 전환하면서 타협점을 마련하여 산북지방 에서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협재교회는 설립 이후 7년이 지난 세월 동안 예배당을 마련하지 못하고 조그마한 방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28년 봄에 150원을 들여서 집 한 채를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2) 금성교회의 신축

금성교회는 일찍부터 제주도의 초기 교회 가운데 하나였으며, 제주도의 교계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교회이다. 그런데도 반듯한 예배당이 없어서 항상 마음에 걸렸으나 이덕련 영수가 1923년에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헌납하였다.

이덕련은 1928년에 장로로 임직받으면서 교회는 더욱더 분발하여 발전하였다. 금성교회는 1930년에 지붕을 걷어내고 양철을 덮는 개량공사를 함으로써 신축 예배당처럼 보이게 되었다. 이 부분을 1931년 제주노회에서는 이렇게 보고되었다.

1931년 총회(제20회) 시에 제주노회 보고
예배당 건축
금성교회는 양철제 20평, 내도교회는 양철제 12평, 한림교회는 양철제 21평을 신건축 하였사오며.


​▲ 1932년 금성교회


3) 한림교회(수원교회)

한림교회는 1915년 이기풍 목사에 의하여 예배드리기 시작하였으며, 예배당이 없어서 믿는 형제의 집을 빌려 예배드리다가 김흥수 씨가 1916년에 가옥(바깥채 초가 6칸)을 지어 헌납함으로써 곧바로 부흥회를 개최하였으며, 교우들이 다 같이 열심히 전도하기에 이르렀다.120) 그렇지만 목회자가 상주하는 교회가 아니었으므로 교회 내의 유력한 평신도 지도자가 교회를 돌보게 되어 발전에 지장이 있었다. 이러한 상태로 유지되다가 1924년에 성내교회가 당회장을 단독으로 청빙함으로써 한림교회가 산북지방의 전도 목사가 거처하는 교회가 되어 교회의 발전을 예상할 수 있었다. 김성원 목사가 상주하면서 목회에 전념하였으나 교회는 큰 발전이 없었다.

김성원 목사의 후임으로 부임한 김영식 목사가 재직하던 1928년에 교회의 핵심이었던 고임생 집사가 사망함으로써 교세가 기울자 김영식 목사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1930년 제주노회의 설립 시기에 교회의 명칭을 수원교회에서 한림교회로 개명하고 21평 양철지붕 예배당 건축을 독려하였다. 이 부분을 기독신보는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 한림포는 예배당이 없어 유감으로 생각하여 지방 목사 김영식 씨는 백방으로 주선 중, 경성 연동교회 유명근 영수의 20원과 전남 부인조력회 총회서 10원 연보와 수십 명의 극력연보로 금춘에 22평의 양제로 건축하여, 5월 24일 주일에 헌당식 겸 문명옥 씨의 장로 장립을 김영식 목사의 인도로 이기풍 목사의 강설과 김영식 목사의 집행으로 헌당식과, 조상학 목사의 사회로 장로 장립식을 기쁜 마음으로 거행하고, 삼양 교우들의 많은 축하예물과 구세군 참위 이기성 씨와 성내 교우 지동국 씨의 축사가 있었고……모인 수효는 남녀노유 합하여 근 이백 명이나 되었다.121)


4) 내도교회와 그 밖의 교회

내도교회는 1919년 김창국 목사의 전도로 시작되었지만 크게 부흥하지 못하다가, 1931년 봄 김유진 집사와 김만수 영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양철제 12평의 예배당신축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 부분을 총회록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1931년 총회(제20회) 시에 제주노회 보고
예배당 건축
금성교회는 양철제 20평, 내도교회는 양철제 12평, 한림교회는 양철제 21평을 신건축 하였사오며.

애월리에서는 이도종 목사와 김영식 목사가 함께 신우면 면장과 지역 단체장들의 후원으로 전도 강연회를 개최하여 약 300여 명의 청중을 상대로 열변을 토함으로써 교가 설립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회추자도 전도는 제주도 선교 초기부터 지속되어 온 사업이었으나, 1928년 전남노회 제30회 회의석상에서 추자도 선교를 위한 당석헌금을 실시하여 400여 원을 모금하였다. 이 금액이 확보되자 서서평 선교사가 이끄는 부인조력회가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라. 이 시기 교회들의 특징

1921년부터 1927년까지의 제주도 교회의 모습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것이다.

첫째, 1927년까지의 제주도 교회는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인한 좌절에서 벗어나 자립의 단계로 들어서는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사이에 제주도 교인들의 헌신적인 헌금, 곧 주택을 바치거나 거액의 헌금을 함으로 예배당 신축이 곳곳에서 이루어졌으며, 산북지방의 거점인 성내교회와 산남지방의 거점인 모슬포교회가 각각 예배당 신축과 헌당이라는 과제를 해결하였다.

둘째, 이 사이에 제주도 교회는 교육을 통한 교회와 교인들의 부흥을 꾀하여 야학과 사숙 그리고 유치원을 설립하여 무학자들의 한글 교육과 어린아이들의 영적인 교육을 시도하였다.
셋째, 이 기간에 제주도 교인들은 제주도가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제사와의 마찰에서 영적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넷째, 이 기간에 제주도의 원주민 지도자들이 하나둘씩 교육을 통하여 성장함으로써 1930년대 제주도 출신 목회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도종, 김재선, 강문호 이상 3명의 목회자는 장차 제주도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였다.

다섯째, 제주도에도 YMCA, YWCA 등의 기독교 사회단체가 설립되어 기독교인들이 제주도의 각종 사회문제 개선을 위하여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여섯째, 제주도 출신 일본 거류민들이 제주도의 친지들과 잦은 교제를 통하여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공산주의 사상이 서서히 제주도에 파고들기 시작하여 결국은 제주도의 4·3사건까지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이 시기의 제주도 교회와 교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제사 문제로 인한 갈등이고, 두 번째는 제사 문제를 해결한 교인들이 자신의 집을 예배당 건축 부지 혹은 예배당을 지어서 헌납하는 등 헌금하는 정신이다.



제주도의 교인들은 용수교회의 김기평 장로로 시작하여 삼양리교회의 오주병, 조천교회의 김연배, 성읍리교회의 김일석, 그리고 두모리교회의 김관첨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제주도 지역이 가지고 있는 제사 풍습과 맞서 싸워 끝까지 승리한 사람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제주도 교인들은 각 지역에서 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자신의 가옥을 예배당으로 혹은 예배당을 지을 수 있는 금액을 헌금함으로써 타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앙의 큰 유산을 남기고 있다.


103) 《기독신보》, 1923년 6월 13일자.
104) 한인수, 《제주선교백년사》, p.98; 《동아일보》 1922년 8월 11일자.
105) 《기독신보》, 1925년 10월 7일자.
106) 《기독신보》, 1926년 9월 8일자.
107) 제8회 총회록, pp.119-120.
108) 《기독신보》 1924년 3월 26일자.
109) 《기독신보》, 1924년 10월 22일자.
110) 《기독신보》, 1925년 2월 11일자.

111) 전북노회 제15회 노회록(1924), p.29; 전북노회 제16회 노회록(1925), p.23.
​112) 홍종필 목사는 산북지방 각 교회에서 1일씩 체류하면서 학습, 세례, 성찬 예식을 거행하였다. 곽진근 목사도 홍종필 목사와 동일하게 활동하였다.
113) 《기독신보》, 1926년 4월 7일자.
114) 《기독신보》, 1918년 7월 24일자.
115) 《기독신보》, 1923년 7월 18일자.
​116) 《기독신보》, 1918년 7월 24일자.
117) 《호남교회춘추》, 통권 25호,p.124.
118) 제17회 총회록, p.96.
119) 김영식 목사는 1921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3월 23일 전남노회 임시회에서 선교사 맹현리와 함께 해남지방 9교회에 동사목사로 청빙을 받아서 목사로 임직하였다. 《사기》, 하권, p.302.

120) 《기독신보》, 1918년 7월 24일자.
121) 《기독신보》, 1931년 6월 17일자.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