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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26, 2016


제4장
제주 교회의 정착


3·1만세운동과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통치는 한국인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오히려 한국인들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정책으로 일관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사회운동이 전개되어 야학 실시, 신용협동조합의 결성, 노동조합의 결성, 소작 쟁의 등 당국으로서는 사회 불안을 야기시킬 것처럼 보이는 단체들이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면에는 항상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제주도에서도 1922년에 YMCA가 결성되고 1926년에 YWCA가 조직되었는데, 주로 기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한편 1922년을 기하여 김창국, 윤식명, 임정찬 세 명의 목회자가 육지로 떠나고 이어서 이창규, 김정복 목사, 이경필 목사가 내도하여 제주도 교회를 이끌어갔다. 이 사이에 제주도 교회들은 자립 단계에 접어들면서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 내에 사숙을 설립하고, 선교 활동의 대상에서 자립 교회로 독립하기에 이르러 1930년에 제주노회가 설립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기간은 또한 제주도 출신 목회자가 배출되어 제주도 목회자가 제주도 교회를 이끌어가는 기초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는 실로 복음이 제주도에 뿌려진 지 20여 년 만에 일구어 낸 희망이었다.

이 시기에 바르게 정리되지 못한 일도 생겨났다. 제주도에 사숙 설립을 위하여 모금하였던 자금의 행방이 묘연해진 사건이다. 이 일의 전말이 어떠하였는지 아직까지도수수께끼로 남아 있다.84)

​84) 제주선교 백주년을 준비하던 때에, 제주노회는 총회와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2007년 8월 23일에 총회를 향하여 발표한 성명서에는 다음와 같은 내용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대로 인용한다. “1920년 2월 23일전주 서문밖 교회당에서 개최된 임시노회에서 이러한 참상을 눈물로 호소하여 제주에 기독교 학교를(선교 차원에서) 지어 줄 것을 호소하였고, 이에 너나 없이 감동하여 즉석에서 선교헌금(학교설립 기금)을 한 결과 1,335원 50전이 헌금으로 연보되었습니다(《장로교회 사기 하권》 참조). 그 이듬해인 1921년 8월 23일 전라북도 옥구군 구암리 교회당에서 열린 제9회 노회에서 역시 제주 미션스쿨 설립을 위한 강연을 하고 즉석에서 헌금한 결과 329원이 연보되었습니다. 그래도 학교 설립에 필요한 돈이 200여 원 모자람으로 순회 선교목사인 김창국으로 하여금 전국 주요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모금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돈이 제주에 들어왔다는 얘기도, 들어온 흔적도 없이 증발되어 버렸습니다. 당시의 1864원 50전이라는 돈은 상대가치로 환산하면 오늘날 약 200억 원 정도의 막대한 돈입니다. 그 후에 전라노회가 이 돈을 어디에 전용하였는지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상회인 총회가 전라노회에 제주선교를 위임하였다고 했지만 역시 장본인은 총회이기 때문에 이를 감독 독려할 책임이 있는데 유구무언입니다. 제주노회가 총회를 상대로 학교를 지어 주어야 한다는 요구는 막무가내 식으로 떼쓰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정당한 권리요, 엄중하게 요구할 구속력을 지닌 사안입니다. 총회가 직접 감당할 수 없다면 총회 내의 유력한 교회를 감동적으로 설득하여 총회를 대신해서 이를 시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총회는 무책임의 부끄러운 굴레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1. 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이경필 목사는86) 목포 양동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직하다가, 전남노회의 결정에 따라 1921년 12월 22일 목포 양동교회에서 송별예배를 드리고 12월 27일 경흥환(慶興丸)을 타고 제주도에 도착하였다.87) 이경필 목사의 활동은 우선 선교의 거점 교회인 모슬포교회 사역이고, 그 다음은 산남지방의 여러 주변 교회들을 돌아보는 목양이었다.​


▲ 이경필 목사 내외​


가. 모슬포교회의 부흥


윤식명 목사가 1921년 5월 즈음에 전라북도로 떠났지만, 교회에는 최정숙 영수가 있었다. 그는 이미 앞에서 밝힌 대로 수백 원에 달하는 사업자금을 교회에 헌납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 교회들을 위하여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기다림 속에 부임한 이경필 목사는 모슬포교회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곧바로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집회를 계획하였다.

1922년 3월 20일에 이경필 목사는 산남지방 연합부흥사경회를 개최하여 10일 동안 지속하였다. 이 집회의 주강사는 닷슨(Samuel K.Dodson: 도대선) 선교사와 이기풍 목사였으며, 여기에 이경필 목사가 가세하여 큰 은혜를 나누었다.

모슬포교회 부흥사경회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는 구역 내 각 교회를 합하여 3월 20일부터 부흥사경회를 가졌는데 교사는 이기풍, 도대선, 이경필 이렇게 세 목사요, 공부하는 남녀 40여 명이며, 새벽기도회와 하오 공부와 저녁전도회에 무한한 은혜와 지혜를 얻고 받았으며, 특히 저녁에는 이기풍 목사의 열렬한 강도에 일반 신자가 통회하여 대대적 부흥이 되는 중에 더욱이 감사한 것은 새로 믿은 자 20여 명이었다더라.88)


닷슨 선교사도 모슬포교회에서 받은 감동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 모슬포 교회는 내가 보아온 것 중에 가장 소망스러운 교회이다. 교인 수는 적으나 교회 안에는 몇 분의 훌륭한 남녀 교우들이 있다. 주일학교는 잘 조직되어 있고모두 일곱 반이다. 불신 아동을 위한 주일학교가 정규 집회 전에 열리는데, 내가 한국에서 본 가장 활력 넘치는 모임이다. 교우들은 학교를 시작하기 위해 모금해 왔으나 아직까지 교사를 활보하지 못했다.……제주도 사역은 소망이 가득하며 활발히 자라고 있다.89)


이경필 목사의 부임 이후에 모슬포교회가 성장하자 당회의 필요성을 느끼고 1923년 7월 3일에 모인 제12회 전남노회에서 ‘장로 2인’을 청원하여 허락받았다. 모슬포교회는 1923년 춘계 신앙대부흥사경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김익두 목사를 강사로 청빙하였다. 이 행사는 제주도 각 지방의 목회자들이 새롭게 바뀐 상황에서 제주도 교회들의 영적 부흥과 단결을 꾀하기 위한 연합 행사였다. 이 부분을 《기독신보》는 크게 보도하였다.

제주도 대정면 모슬포교회의 주최로 제주 전도(全島) 각 교회가 연합 부흥코져 수월 전부터 특별기도 중 3월 19일부터 김익두 목사를 청빙하여……수백 명이 회집하여……방청인이 구름같이 모인 바 예배당 마당에 임시 장막을 치고 일주일간 대부흥을 받았는데, 특히 감사한 것은 많은 환자가 각색 병을 고침받은 것이며, 예배당 건축비로 연보한 것이 일천이백 원에 달하므로…….90)


1923년 3월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는 모슬포교회의 부흥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때로부터 나타난 변화는 첫째, 여전도회의 조직이고 둘째, 부인 야학의 실시이며 셋째, ‘광선의숙’(光蘚義塾)의 재건이었다. 앞의 《사기》에서도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한다.

1923년(계해)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 부인전도회를 조직하고, 순번을 따라 교체하여 열성 전도하므로 부인 야학까지 설립되었다.91)

윤식명 목사는 1920년에 광선의숙(光蘚義塾)을 설립하였으나 재정과 교사 등 여러 난관에 부딪혀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성장하게 되자 여전도회에서 이 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여성들의 교육은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실시하려는 사업이었으며, 한국교회는 이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YMCA, YWCA가 이 사업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다면 제주도에서는 여성들의 교육에 대하여 어떠한 준비가 있었는가? 1920년5월 3일 《동아일보》는 “제주도민, 여자 교육의 부진을 염려하여 여학교 설립 준비로서 제주여자장학회를 조직하고, 만 원의 의연금을 모집”이라고 보도하였다.92) 1922년 5월에는 여성 문맹 퇴치 강습소인 여수원(女修園)을 강평국(姜平國)과 최정숙(崔貞淑)이 개설하였다.93)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모슬포교회는 1920년에 광선의숙을 세웠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사업을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슬포교회가 1923년에 여성들의 야학을 실시하고 광선의숙을 재건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큰 사회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광선의숙의 교과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는 제3회로 광선의숙 교실에서 7월 26일부터 개학하였는데 당일 입학생이 30여 명이었으며 과목과 직원은 여좌하더라.
과목: 성경, 유희, 음악, 수공, 습자

직원: 교장 박남규, 교사: 문공언, 강규언, 정신경94)


두 번째로 이경필 목사가 시작한 사업은 예배당의 신축이었다. 1912년 설립 당시에는 신창호 씨의 집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하다가 예배당을 신축하였으나 예배당이 회집 인원의 수효를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1920년부터 신축 계획을 세웠다. 이 시기에 이미 4천 원 예산의 예배당을 계획하였으며, 최정숙 영수와 강흥주 집사의 열성이 곧바로 건축을 시작할 것으로 보도하였다.95) 그렇지만 건축은 쉽지 않았다. 재정난으로 교회 건축이 점점 미뤄지다가, 다른 교회들의 예배당 건축에 모슬포교회도 예배당 신축의 자극을 받았다.

1924년에 교회의 부지 256평과 초가 3칸을 650원에 구입하지만, 1926년에 비로소 대정읍 하모리 1075번지에 60평 규모로 새 건축술에 의한 목조기와 교회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많은 교우들이 힘써 헌신하여서 완공하자, 1929년 1월에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고 예배당도 봉헌하였다.96)

이경필 목사는 1921년 말부터 1926년까지 성심성의껏 제주도 산남지방의 여러 교회를 살피고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교인들에게 장로교 전통에 따른 권징을 강조하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면서도,97) 신자들의 삶의 도덕성을 매우 중시하였다. 치리의 원칙에 따라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일관성 있게 징계하였다.98)

그러다가 192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극심한 소화불량과 과로가 겹쳐서더 이상 목회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1927년 4월부터 12월까지 휴식을 허락받았다.99) 이 공백 기간에 김성원 목사가 목양의 책임을 맡아 수고하였다. 이경필 목사는 쉬는 대신 고산지역에서 전도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다가 1930년에 광주 금정교회(광주제일교회)의 청빙을 받게 되었다.100)

나. 두모리교회


이경필 목사가 목양하였던 산남지방 여타의 교회들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이 교회들이 두모리교회, 고산교회, 용수교회, 중문리교회, 조천교회, 성읍교회 등이었다. 여기에서는 우선 두모리교회에 대하여 언급하려고 한다. 두모리교회는 1920년에 시작된 교회이다. 두모리교회는 윤식명-원용혁에서 이경필-원용혁으로 이어지면서 1923년에 큰 발전을 보였는데, 제사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승리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923년 2월 14일자 《기독신보》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제주 구우면 두모리교회에서 이경필 목사와 원용혁 전도인을 청빙하여 4일간 부흥회를 하는데 김관첨 씨가 몇 번 방청하다가 성신의 능력으로 그 마음을 일으키사 믿기로 결심하였는데……자기 조모의 제일(祭日)에 참여치 아니하고……문중이 달려들어 무수히 괴롭게 함으로 예배당으로 피하여……자기 모친의 대상을 당하여 참여치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조객에게 암매한 시대의 폐풍을 들어 말하였는데……주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더라도……핍박을 받고도 굳굳하게 승리하였다더라.101)


두모리교회 교인들 가운데에는 제사 문제로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초창기에 예배 처소를 제공한 강성립, 고태행, 고용표, 김계공 등이 기독교와 제사 문제로 인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1930년대에는 여러 교회가 목회자 한 사람을 청빙하여 순회하며 목양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두모리교회는 1935년에 새 예배당 헌당식을 가질 정도로 힘이 있었다.


제주 두모리교회의 대성회

지난 5월 1일 제주노회 시에 두모교회 외 다섯 교회가 임시 목사로 시무중이던 정태인 목사의 위임식을 위원장 최희준 목사의 사회로 성대히 거행하고, 식이 마치자 두모교회의 헌당식이 최 목사의 사회로 거행되었는데 이도종 목사의 의미심장한 설교와 내빈 축사 등이 있었다더라.102)

​85) 《사기》, 하권, pp.299-300.
86) 이경필 목사는 1876년 6월 2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1894년 부모를 따라 전라북도 금산읍으로 이주하였다(금산은 1963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충청남도가 되었다). 1903년 8월에는 9품 종사랑에 임명되어 국세를 거두는 징세관으로 일하였다. 그는 1906년 마로덕(L. O. McCutchen)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1909년에는 그의 조사가 되어 용담 지방을 맡았으며, 191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그는 목사 임직 후 마로덕 선교사와 함께 동사목사로 사역하다가 1917년에 목포 양동교회로 부임하여 1921년까지 사역하였다. 1921년에는 전남노회장이 되었다.

87) 《기독신보》, 1922년 2월 1일자.
88) 《기독신보》, 1922년 5월 31일자.
89) Korea Mission Field, 18-19(1922) p.210.
90) 《기독신보》, 1923년 5월 23일자.
91) 《사기》, 하권, pp.322-323.
92) 《제주사연표 I》, p.373. 1921년 11월에는 제주 성산청년회 주최 야학회를 개최하여 지원자가 10여 명에 이르렀으며, 12월에 구좌면 종달리 김생길은 교육기관 설립을 위하여 일천 원을 기부하는 등 교육과 계몽에새로운 움직임이 교회 안팎에서 진행되었다. 《제주사연표 I》, p.378.
93) 《제주사연표 I》, p.379. 여수원은 재정난으로 명신학원에 편입되었으나 명신학원마저 3년 만에 중단하고말았다.
94) 《기독신보》, 1926년 9월 1일자. 강규언은 중문교회 초기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고, 1919년에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학생으로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유죄선고를 받았으며, 제주도 성안교회에서 운영하는 사숙에서 조봉호와 함께 교사로 활동하였다.

95) 1926년 9월 1일자. “모슬포 교당 건축”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신문에서는 최정숙 장로로 표기하였으나 이 시기에는 아직 영수였다.
96) 《기독신보》, 1929년 2월 13일자.
97) 《조남수목사 회고록》(1987), pp.81-85.
98) 《모슬포교회 100년사》(2012), pp.133-134.
99) 제16회 총회록(1927) p.83.
100) 1925년에 간행된 《제주기독교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제주선교 70년사》(1977)에도 인용되어서, 여기에 그대로 옳긴다. “이기풍 목사는 복음의 씨를 질머지고 와서 전파할 때 의관(衣冠)을 찢기워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뿌린 파종자(播種者)와 같으며, 윤식명 목사는 피땀 흘리고 팔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역한 灌水者(물 주는 자)이며, 이경필 목사는 조직적인 주의력을 가지고 밤낮으로 돌아보며 전도한 운경자이며, 이 세 목사를 도와 전도에 종사한 수많은 전도인들은 주님의 사업에 충실하게 수종 든 보조병들이라.”
101) 《기독신보》, 1923년 2월 14일자.

102) 《기독신보》, 1935년 6월 20일자.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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