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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25, 2016

 

제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어떻게 하여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항하여 특별한 조직의 강력한 지도도 없이, 그렇게 한꺼번에,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종교와 무관하게, 수개월에 걸쳐서 일어나서 독립을 부르짖을 수 있었을까? 흔히 역사가들은 3·1만세운동은 국내적 원인과 국외적 원인이 합쳐져서 한국인들에게 독립을 추구하게 한 운동이었다고 말해 왔다. 이들이 지적하는 국내적 원인은 일제의 폭압정치, 차별대우, 종교의 자유에 대한 탄압 등을 들 수 있으며, 국외적 원인은 미국의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러시아의 볼셰비키 공산혁명의 성공,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 등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이유들 가운데서도 한국의 경제적인 상황과 가장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본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시작해서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이기고 1905년에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기까지 일본이 노린 것은 한국의 농토와 곡물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서쪽 지방의 광활한 황무지(뻘밭)를 탐냈다. 그리하여 1904년에 고종에게 황무지 개간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가 거부당하자,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왕위에 앉힘으로써 1907년 말에 ‘황무지 개간법’을 통과시켰다.

일제는 1908년 의회에서 동양척식회사법을 통과시키고, 한국 정부에 이를 강요하여 천만 원의 자금으로 한국에서 척식사업을 목적으로 하여 회사를 설립하였다. 회사가 설립되자 한국정부로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출자받고, 1913년까지 토지 4만 7,148정보를 헐값으로 매입하였다. 1908년부터 1918년까지의 토지 조사 사업이 완료된 이후인 1920년 말에 회사 소유지는 전국 경작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만 7천여 정보에 달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하여 막대한 면적의 산림지를 가로채어 1942년 말 16만여 정보의 임야를 소유하였다.
일본은 각종 특혜를 주고 1910-1926년 17회에 걸쳐 일본인 이민 희망자 약 1만 명을 엄선하여 조선 침략의 담당자로 활용했다. 이들 일본인 이주민은 경기, 경상, 전라, 황해, 충청도에 많았는데, 그들은 조선 민중을 착취 압박한 일제의 대변자이며 첨병이 되었다. 이에 따라 1926년까지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 명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이렇게 동양척식주식회사에게 땅을 빼앗기고 이어 일본에서 들어온 농업 이민자들에게 땅을 빼앗기기 시작한 한국인들 가운데서, 특히 중답주(中畓主)들이 땅을 빼앗김으로써 생활의 터전과 의욕을 상실하였다.66) 농업이 주산업이었던 이 시기에 농토를 잃는다는 것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만주 혹은 간도등의 해외 이주를 시도하거나 나라의 독립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전개된 3·1만세운동은 기독교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첫째, 한국인들과 한국교회가 독립 염원이라는 기치 아래 단결력을 다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지금까지 일제는 한국인들의 지역감정을 건드리면서 민족와해정책을 시도하였으나 3·1운동은 지역, 계급, 종교를 뛰어넘는 결속력을 보여 주었다.

둘째,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를 제공하였다. 3·1운동은 개화기 이후로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 하였다.67)
셋째, 그간 기독교가 한국 땅에서 외래 종교로, 서양인의 종교로 인식되어 한국의 민족주의적인 지성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기독교계가 각지에서 3·1만세운동의 주축 세력이 됨으로써 한국인의 종교로 성장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넷째, 기독교가 민족주의적인 종교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기독교계 지도자들 가운데서 선교사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있었다. 다시 말해 선교사들이 주장하는 순수복음만을 전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복음까지 겸하여 전할 것인가 하는 큰 주제를 놓고 기독교계 내에서 갈등이 일어났던 것이다.

다섯째, 해외에서 진행되는 독립운동 단체가 기독교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배경에서 제주도의 독립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3·1만세운동이고, 둘째는 군자금 모금운동이다.


1. 조천리 3·1만세운동


제주도 주민으로서 육지에 있는 학교에 유학하여 공부하던 학생들 가운데 몇 사람은 1919년 3월 한 달 동안 전국 각지의 학교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과 같은 제주 출신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육지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유죄 선고를 받자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도 독립의 의지가 일어났다.

제주도의 자발적인 3·1만세운동은 조천에서 일어났다. 조천의 지도자 김시학(金時學)의 아들 김장환(金章煥)은 서울 휘문고보 학생으로서 서울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김장환은 3월 16일 숙부 김시우(金時宇: 서당 훈장)의 소상에 참배하기 위하여 귀향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장환은 당숙 김시범과 김시은에게 서울의 만세운동에 관한 소식을 전하였으며, 당숙들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21일 소상날 조객들을 중심으로 서당의 학동들까지 총동원하여 미모치(味毛峙: 미밋동산)에 총집결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조천의 독립만세운동이 진행되었다.68) 이날의 만세운동은 3월 22일에는 조천리에서, 23일에는 장터에서, 24일에는 함덕리에서 연일 이어졌으며, 연인원 2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이 운동에 참여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주동자에 해당되는 14명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조천리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언도 판결이 있었다.

징역 1년: 김시은, 김장환, 김연배, 황진식
징역 8월: 김필원, 박두규
징역 6월: 김경희, 김희명, 김재윤, 김용찬, 백응선, 이문천, 김형배, 김순택 외 10인은 3년 집행유예69)

이들은 5월 26일에 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유기징역 형이 내려지고 공소를 포기한 9명에게도 언도가 내려짐으로써 이들에 대한 형은 확정되었다. 이들은 대구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였으나, 6개월 형을 마치고 귀가한 백응선은 25세의 젊은 나이로 어린 딸 하나를 남기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66) 중답이란 지주층에서 자금을 대고, 농민들이 노동력을 제공하여 뻘, 습지 등을 개간하여 농토로 전환한 논을 말한다. 개간한 후에는 지주가 50%를, 농민들이 50%의 소유권을 공유함으로써 농민들은 매매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토지조사 기간에 중답은 지주의 땅으로 전환되고 말았다.
67) 1919년 만세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여성은 김마리아(Maria Kim), 황에스더(Esther Hwang), 류관순, 권애라, 오윤희 등인데 이들은 다 기독교인이었다. 1919년에 체포된 장로교인이 2,656명인데, 이 가운데 531명이 여성이었다. 기독교계 학교의 여학생들이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5배나 더 많았기 때문에 여학생들이 자연히 데모 대열에서 두드러졌고, 일본인들은 선교사들이 만세운동을 조장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68) 《제주도지》, 제2권: 역사, 2006, pp.644-645.
69) 《제주사연표 I》, p.371.​


2. 독립회생회와 군자금 모금 사건

조천리 독립만세운동과 마찬가지로 군자금 모금운동은 철저하게 제주도 교회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운동이었다. 이 운동에 제주도에서 목회하던 3명의 목회자가 모두 연루되어 그들이 제주도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제주도의 교회도 그만큼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이 운동의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봉호(趙鳳鎬)는 복역 중에 사망하여 애국지사가 되었다.

군자금 모금 사건의 핵심은 조봉호였다. 조봉호는 구우면 귀덕리 1292번지에서 1884년 5월 12일에 아버지 조만성과 어머니 김진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래에 동생이 2명 있었다. 아버지는 상당한 재력을 가진 부농이었으므로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눈을 떠서 1902년 아들을 5년제 중등교육을 실시하는 선교학교 경신(儆新)에 입학시켰으며, 조봉호는 이 시기에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조봉호는 아버지가 1904년에 사망함으로써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조봉호는 1906년에 조성벽과 결혼하였으며 아들 로득(路得)과 피득(皮得)을 두었다.


​▲ 조봉호

서울에서 공부하는 2년여 기간에 기독교를 배우고 또한 선진문물을 알게 된 제주도의 지식인으로서 조봉호는, 1908년에 이기풍 목사를 도와서 성내교회의 ‘남녀 소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1년에 황해도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남강 이승훈이 제주도에 유배되자, 그 영향을 받아 신학문에 대한 뜻을 다시 불태우게 되었다.
이승훈은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1년 마지막 즈음에 재수감되어 제주도를 떠났다. 이승훈은 조봉호를 도와 1912년부터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원금이 중단되고 또한 가정형편과 재정난으로 학업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조봉호는 1년 만에 귀가하였다.
이때로부터 조봉호는 이기풍 목사를 도와서 교회 일과 전도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915년에 세례를 받고 일제의 지시에 따라 제주 성내교회 포고계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기풍 목사가 질병으로 치료차 광주로 떠나자, 성내교회에서의 역할도 더 커졌다고 보인다.
이상과 같이 조봉호는 기독교적인 이력이 있으며 동시에 사회활동의 이력도 매력적이다.70) 조봉호의 초기 제주도 활동에서 ‘학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조봉호가 가입한 ‘호남학회’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호남학회’에 대하여 목포대학교 사학과 박찬승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말의 학회는 당시 서울에서 자강운동, 계몽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인사들이 출신 지역별로 집결하여 신학문의 수용, 신교육의 실시 등을 목적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즉 한말의 학회는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신교육의 실시와 산업의 진흥을 통해 실력을 배양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던…… 학보의 발간, 연설회의 개최 등을 통하여 홍보하는 한편 실제로 학교를 설립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실천에 옮기기도 하였다.71)


이러한 학회운동의 일환으로 1907년 7월 6일 재경 호남 출신 인사 등 112명이 참석하여 ‘호남학회’를 창립하였다. 이들은 창립 목적에서 “신문잡지를 발행하며 경성 및 도내 각 지방에 학교를 설립할 것”을 주된 활동으로 규정하였다. 회비로는 입회금 50전, 월부금 10전, 기타 기부금을 납부해야 하는데, 조봉호는 1909년 1월 22일 제주지역 호남학회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한편 일제는 한국을 강압적으로 점령하면서 각 지역의 유력인사들을 파악하여, 한쪽으로는 회유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억압하는 과정에서 회유 대상에게 신사라는 칭호를 붙였는데, 조봉호가 1910년 8월 29일에 호남 신사 명단에 오승표, 최원순, 김병의등과 함께 등재되어 있었다.72)
이렇게 볼 때 조봉호에게는 양면성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쪽으로는 기독교 신앙이고 다른 한쪽은 민족적 애국심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조봉호는 제주도의 지식인이며 동시에 제주도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조봉호는 1908년부터 이기풍 목사를 도와서 ‘영흥소학교’ 혹은 ‘영흥의숙’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이기풍 목사의 후임으로 최대진 목사가 부임하여 1917년까지 일할 때에도 함께 사역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17년 5월경 김창국 목사가 부임할 때 조봉호는 교회를 떠났다.73)
이렇게 조봉호는 1917년부터 교회를 떠난 상태에서 군자금 모금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김창국, 윤식명, 임정찬 세 명의 목사가 동참하게 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2000년에 제주노회에서 발간한 《제주노회사》에서 조봉호와 김창국 목사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묘사하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1919년 5월 7일 제주-목포 간 선편으로 산지 부두에 초라한 젊은이가 도착하였다. 허름한 노동복 차림의 젊은이는 성큼 김창국 목사 앞으로 다가가서는 “목사님, 조봉호 선생을 뵈러 왔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키가 훤칠한 30대 후반의 신사가 나타나서는 “제가 조봉호입니다”라고 했다. 조봉호는 독립회생회에 대하여 이미알고 있었고 언젠가 연락이 있을 것이라고 내심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김창규의 손을 꼭 힘주어 잡은 조봉호는 자기가 기거하고 있는 교회의 숙직실로 데리고 들어갔다.74)

1918년 11월에 교회로부터 출교당한 사람이 불과 5~6개월이 지난 1919년 5월에도 여전히 김창국 담임목사와 더불어 전도사 일을 지속한다고 생각한 것과 또한 출교당한 교회의 숙직실을 자신의 숙소로 정하여 살고 있었다는 기록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어찌되었거나 조봉호는 제주도에서 독립회생회 사건에 깊이 동조하여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이 모금에 김창국, 윤식명, 임정찬 등 당시 제주도에서 목회하던 세 목사가 다 같이 동조하였다. 이 부분에 대하여 2000년에 간행된 제주노회사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김창국 목사와 조봉호가 “평소에 친분이 돈독한 사이”이며 또한 “조봉호가 성안교회의 김창국 목사를 찾아가서……두 사람이 안방에서 숨을 죽여 가며 밀담을 나누었으며……이 일이 전도에 못지않게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고 인식하였으며, 더 나아가서 김창국 목사가 “두 분 목사(윤식명과 임정찬)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75)


《제주노회사》의 설명대로라면 김창국 목사를 비롯한 나머지 두 명의 목사가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어 석방되었을 리가 없다. 독립회생회 사건은 교회 조직을 기반으로하여 제주도 주민들이 가세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한 사건이었으며, 그 시기가 3·1만세운동이 끝난 바로 다음인지라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기획과 추진의 총책임을 맡은 사람은 조봉호이고, 그는 교회 조직과 일반 조직을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모금이 시작된 지 50여 일에 4,450명이 참여하여 만 원에 달하는 자금을 모금하였다.76) 여기에서 해결해야 할 의문점들이 여러 가지 생긴다.

첫째, 조봉호가 1918년 11월 김창국 목사가 당회장으로 재직하는 성내교회로부터 출교조치를 당하였다면 과연 1919년 3월에 성내교회 숙직실에 기거하면서 김창국 목사와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였을까?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봉호가 김창국 목사에게 찾아와 독립회생회의 일을 언급하자 김창국 목사가 “예배 중에 교인들에게 광고하여 7월까지 자금을 모금하였다”라는 것은 조봉호에 대한 권징과 출교가 담임목사인 김창국 목사의 의지가 아니라 장로들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고 판단할 수 있다.
셋째, 김창국 목사는 조봉호에 대하여 겉으로는 엄하였으나 내심으로는 다정하게 대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이러한 판단은 김창국 목사가 조봉호와 숭실대학 동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가능하다.
넷째, 이 당시 제주도 교인의 총수가 1,000여 명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4,500명이 군자금 모금에 기부하였다면 이는 교인들을 조직으로 하였을지라도 실제적으로 교회 밖에서도 더 많이 동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독립회생회 사건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기록에 의하면, 조봉호는 회원 1인당 2원을 입회금으로 하여 총 4,500여 명으로부터 만 원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관 이시영 앞으로 비밀리에 송금하였으나 곧바로 일제의 경찰에 적발됨으로써 조봉호, 최정식, 김창언, 문창래, 홍기철, 이도종, 문창숙, 그리고 세 명의 목회자 김창국, 윤식명, 임정찬 등 40여 명이 구금되어 ‘정사범 및 출판물 위반 사건’ 명의로 재판에 회부되기에 이르렀다.

조봉호의 의인(義人)적인 행동은 구금과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운동에 연루된 세 목회자의 무죄를 적극적으로 주장함으로써 그들이 집행유예로 방면되었다. 이 사실을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독립만세사건에 관한 보고서
목사 2인인데, 김창국 씨는 2년 반 집행유예, 윤식명 씨도 집행유예이오며.77)

이러한 무죄 방면은 당시 한국이 3·1만세운동과 연관된 재판이 곳곳에서 진행되었으며, 또한 아직까지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에서 일종의 유화정책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 가운데서 조봉호는 주모자로서 모든 책임을 지려고 하였으나, 등사기로 ‘임시정부 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을 등사하여 배포한 최정식과 신우면의 문창래가 1심 법원에서 최정식은 3년, 문창래는 6월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조봉호는 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하여 최정식은 1년 6월, 조봉호는 1년, 그리고 문창래는 무죄 방면되었다. 대구 복심법원의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들의 진술과 증거물을 조회하여 볼 때 피고 최정식과 조봉호가 허가를 받지 않고 국헌에 위반되는 문서를 인쇄한 행위는 융희 3년, 법률 제6호, 출판법 제11조 1, 2 항에 해당되며, 이를 반포한 행위는 동법 제1조 제1항 1호에 해당된다.……피고 문창래는 피고 조봉호가 주창하는 독립회생회의 취지에 찬동하여 문창숙 등을 권유하여 출금토록 한 후 이를 조봉호에게 넘겨줌으로써 안녕질서를 방해하였다는 공소 사실은 범죄의 증빙이 불충분하므로 형사 소송법 제224조에 입각하여 이를 무죄 언도한다.78)

최정식은 1년 6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였으나79) 조봉호는 1920년 4월 28일 대구형무소 제17호 감방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조봉호의 옥사 사실증명서는 다음과 같다.


본적: 전라남도 제주도 구우면 귀덕리 1292번지주소: 상
성명: 조봉호(趙鳳鎬)
생년월일: 1884년 5월 12일생
입소년월일: 1919년 10월 2일
죄명: 대정 8년 제령 7호 및 출판법 위반
형기: 1년
출소년월일: 1920년 4월 28일
출소사유: 사망
상기와 같이 당소에서 복역한 사실이 있사옵기 증명함
서기 1962년 2월 19일대구교도소장 전옥 이유근 80)


만 36세가 채 안되는 젊은 나이에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조봉호는 오랫동안 교회에서 잊혀졌다. 오히려 교회 밖의 제주사회에서 먼저 그의 공적이 인정받게 되었다. 1963년 3월 1일을 기하여 ‘건국 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77년에 건국 포장, 1990년에는 다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고귀한 희생은 1977년 사라봉 기슭 모충사에 제주의병탑, 김만덕 의녀 추모비와 나란히 애국지사 조봉호의 추모비로 세워졌다. 조봉호는 나라를 위하여 순국이라는 열매를 맺어 순국자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제주 기독교 내에서도 이러한 조봉호의 충직한 삶을 되돌려 그가 출교된 지 75년 만에 해벌 그리고 복권을 선언하였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적 순교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국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81)라는 논리를 따른 것이다.
성내교회(기장)는 1994년 2월 27일에 열린 공동의회와 3·1절 기념주일 예배에서 이를 바로 잡는 절차를 밟았다.


“조(봉호) 지사가 당시 제주기독교에서 책벌되어 교인으로서는 가장 무거운 형벌인 출교 처분을 받은 것은 정확한 사유가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이 같은 그의 행장은 당시 일제의 압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지고……또 이미 성경 말씀을 실천하여 신앙으로 순국했으므로 설사 그에게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용서받고도 남으며, 장로교 종교재판에 필수적인 피고소인을 위한 해명의 기회가 허용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가 잘못한 사실의 기록도 없다는 점에서 재판절차상 무효…….82)


이처럼 그에게 내려졌던 기독교의 책벌조치가 풀림에 따라 제주 기독교 내에서의 그의 위상 또한 복권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조봉호를 ‘기독교의 순교자로 볼 것인가’라는 질문은 아직도 남아 있다.
또한 교회 내의 사역과 직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단정할 수 있는 기록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예전에 전도사 혹은 조사로 불리운 것은 교회 밖의 제주사회에서 붙여준 칭호였다. 목회자 교육을 받지 않았고, 목사로 임직받은 일이 없다는 사실은 쉽게 확인된다. 교회의 일꾼이었다는 점을 배려하여, 향토사가들이 추정하여 임의로 붙여준 직분이라 본다. 목회자를 도와서 사역하였으리라는 생각에서 전도사라 호칭하였다. 그리고 백년 전에 이에 해당하는 직분은 조사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조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오랫동안 주저하다가 1915년에야 세례받았다는 사실이 조사로 사역했다는 추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출교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성내교회에서 그의 위상을 확인하는 것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어찌되었거나 조천 3·1만세운동으로부터 촉발되어 조봉호의 군자금 모금사건으로 끝난 1920년 전후의 애국운동은 제주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주도에서 목회하던 3명의 목회자가 집행유예로 방면되었으나 끊임없이 일제의 감시를 당하는 요주의 인물이 됨으로써 제주도에서의 목회가 쉽지 않았다. 목회자의 자유롭지 못한 행동이 한편으로는 영적인 풍성함을 주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 활동에 극히 제약을 받음으로써 교회 발전에 걸림돌이 되기에 이르렀다.

둘째, 제주 교회의 변화가 나타났는데, 발전의 속도가 느려졌다는 점이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성내교회의 김창국 목사는 1922년에 광주 양림교회로 옮기고, 임정찬 목사는 선교사 사역을 중지하게 되었다. 산남지방의 서쪽을 담당하던 윤식명 목사는 전라북도로 옮겨가면서, 산남지방과 모슬포교회는 당분간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이경필 목사가 부임함으로써 옛 힘을 회복하였다. 이에 비해 산남지방의 동쪽 지방에서의 선교가 또다시 공허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산남지방 동부의 애원서를 읽으면 이들의 곤란함을 알 수 있다.


제주 동반부 교회의 애원서
아 우리 제주도는 400여 리의 주위와 20여 만의 생명을 둔 바 전남 전북 두 노회에서 각이 전도목사 1인씩 파송하여 사역하되……동반 구역 주위 300리의 지대에 10여 만의 영혼은 황해노회로부터……1917년부터 본도 동반부에 래임하여……복음을 전파한 바……5개 성상에 교회가 두 개소가 설립되고 금년에 세화리에 교회가 신설되고 그 외에도 2~3개소의 기도소가 있어 교인 총수가 130여 명에 달하였으나…… 본 년 8월부터 황해노회가 본도 전도사업을 철폐한 고로……임 목사는 복음을 낳고 먹이던 양무리를 버리고 철귀하고……이 같은 참경을 당한 우리가 전선교우의 앞에 우리의 민망한 사정을 고하오며 특히 본도를 위하여 진력하시던 황해노회와 전남노회를 향하여 애원하오니 조량하시와 이에 동정하여 주시기를 엎디어 비나이다.
12월 5일
제주도 온 구역교회 일동 백83)


셋째, 3·1만세운동 이후 제주도 교회는 일제의 끈질긴 눈길을 받으면서 크게 성장하지 못하고, 상당 기간 현실 유지 혹은 퇴보의 기간을 겪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제주도 교회들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27년에 이기풍 목사를 다시 부르고, 이어서 최흥종 목사를 청빙하는 비상수단을 강구하게 된다.
넷째, 조봉호가 순국함으로써 제주교회 역사에서 제주인들이 제주도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금성교회 출신 이도종 목사(이덕련 장로의 아들), 김재원 장로의 아우인 김재선 목사가 등장하여 제주인으로서 제주의 교회를 이끌어 가는 새 역사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74) 《제주노회사》, p.16. 이 글은 교회 사정에 밝지 못한 서술이며,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그리려고 하였으나, 역사성은 매우 낮다고 보인다. 제주의 향토사가들의 짐작에 따른 서술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75) 《제주노회사》, p.18.
76) 이 당시에 쌀 한 가마는 4원이었다.
77) 제8회 총회록, p.114.
​78) 《제주항일독립운동사》, p.435
79) 부친 최학서 집사는 아들 최정식의 출소를 앞두고 두 달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최정식은 1898년에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제주시 일도리 1438번지 서문통에서 유기상을 경영하였고 성내교회의 신자였다. 최정식은 서문통에서 대서소 직원으로 일하였다.
80) 《제주항일독립운동사》, p.436​
81) 《제주일보》, 1994년 3월 2일자.
82) 《제주일보》, 1994년 3월 2일자: 《제주성내교회 100년사》,pp.317-319.

 

​3. 1919년 이후에 나타난 변화


3·1만세운동과 애국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제주도에서도 여러 방면의 사회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의 자각운동으로 발전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첫째,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운동 가운데 하나로 기독교계가 각 지방에 학교를 세워서 자녀들을 일깨우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학교설립기성회’가 전국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야학, 강습반, 학교 등의 계몽 교육을 시키는 교육기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제주도에서도 당연히 이러한 운동이 일어났다.
둘째, 전국적으로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사회단체, 즉 기독교 남자청년회(YMCA)와 기독교 여자청년회(YWCA)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2
년 6월 28일 제주 기독청년회(YMCA)가 설립되었으며, 기초 회원들은 거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셋째, 전국적으로 일기 시작한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금주 금연 마약퇴치 공창퇴치 등의 강연회, 계몽회 등이 지속되었다.

넷째, 제주도 도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으로 가서 근거지를 마련함으로써 제주도 도민들 중 일본으로 진출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와 동시에 일본으로부터 알게 된 공산주의 사상도 동시에 제주도에 전달됨으로써 빈곤에 시달리던 제주도민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대안으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83) 《기독신보》, 1922년 12월 6일자.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