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2016.07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 Jul 22, 2016



4.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협력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1893년 1월에 정한 선교원칙에 따라 자립 전도와 자립자조, 그리고 자립 행정을 적극적으로 고수하였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들이 행하는 각종 사경회, 전도, 교육, 의료 등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도와주었으나 재정적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을 때에만 조금씩 협력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부터 1914년에 이르기까지 제주 선교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전라노회의 전도국장은 니스벳(J. S. Nisbet: 유서백) 선교사가 맡았으나, 1914년부터는 한국인 목회자도 전도국장의 소임을 맡기 시작하였으며, 첫 번째 한국인 전도국장은 최대진 목사였다.

​1915년에는 선교비 부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도인을 2명에서 1명으로, 여전도인도 1명으로 줄이는 등 대책을 세웠으나 제주 전도비로 사용하게 될 감사주일 연보와 성탄절 연보의 모금액이 예산보다 67원이 부족하게 되자 순천 선교부의 그리어(A. R. Greer: 기안라) 간호사와 프랏(C. H. Pratt: 안채윤) 목사가 20원을 헌금하고, 나머지 부족액은 노회 당석에서 헌금하여 부족액을 충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윤식명 목사가 모슬포교회를 세우기는 하였지만 신창호 씨의 집을 교회와 예배처소로 그리고 사택으로 사용함으로써 매우 힘들었으며, 우물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교인들이 사용하기에 크게 불편하였다. 이에 1916년 제주도 현장을 방문한 선교사들이 성금 150원을 모금하여 지원하였다.26)
이상과 같은 재정적 지원보다도 더 큰 지원은 제주도 교회들의 전도와 교육, 그리고 의료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선교사들이 제주도 선교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제주도 교회들이 힘을 얻고, 아직까지 기독교에 대하여 생소함을 가지고 있던 제주도 도민들에게 기독교의 구원의 소식을 쉽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였다.

24) 《사기》, 하권,pp.304-305.
25) 《사기》, 하권, p.305​

​5. 교회들의 발전


제주 선교에서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첫째는, 복음으로써 제주도인들을 종래의 미신적 생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이기풍 목사가 지적한 대로 초기 교인들이 주민들로부터 “인심을 얻어……믿는 형제자매의 성질이 굳건하여……”27)라고 말할수 있다. 복음과 인심을 얻는 것과 성질이 굳건한 것, 이 세 가지는 제주도 선교의 핵심이었다. 이 부분을 1916년 1월 중순으로부터 2월 중순까지 한 달 동안 군산 영명학교
기숙사 청년회에서 헌금한 금액으로 제주도에서 전도하였던 김중수 씨의 보고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군산 구암 영명학교 학숙 청년회에서 매년 동기방학 시기를 맞이하여……인민의생활 정도를 잠깐 말하자면, 제주는 탐라고도라 유래하는 옛 풍도와 자취가 남아 있어 이제 사람들이 가히 역사를 상고할 만한 재료도 있으며, 의식주 세 가지 문제에 대하여 곤란한 정형과 미상한 정도는 가히 말할 수 없이 참혹한 점이 많더라. 마귀의 중독된 그 양심을 회복하시는 이는 하나님의 성신이시라. 그곳 교회 형제자매들과 남녀 학생들의 신앙 정도를 관찰하면 한라산같이 우뚝하여 표준적 될 만한 형제 자매들이 열심의 활동하는 역사의 향상 전진되는 것이 육지보다 오히려 성한 점이
발견되온즉 오래지 아니하여 육지에 전도는 전심으로 부러울 줄 믿고 희망하노라.28)


이 보고서에서 보듯이 제주도의 역사적 유구함, 생활 정도의 어려움, 마귀에 중독된 우상숭배의 삶……이러한 상황에서 한라산처럼 우뚝 솟은 도덕적 표준으로 살아가는 기존 기독교인들을 통해 전도의 진전이 크게 나타났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제주도 선교에서 중요한 요소를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제주도 산북지방, 즉 제주시를 중심으로 한 이기풍-최대진 목사의 선교 구역에서는 육지로부터 방문객들이 줄기차게 있어서 복음 전도와 의료 치료로 지역 주민들에게 크게호응을 받았다.

둘째로, 그렇지만 산남지방은 교통이 불편하여 육지의 방문객들이 많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목회자인 윤식명 목사 중심으로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서도 윤식명목사의 영적인 능력이 크게 나타나서 귀신 들린 사람들을 영적으로 축사하여 회복시키는 일이 있었다. 여기서 병자들에 대하여는 교인들이 따뜻하게 치료해 줌으로써, 다시 말하여 도덕적으로 정감어린 배려를 베풂으로써 전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부분을 목격하였던 맥쿠첸(L.O. McCutchen) 선교사는 1914년 9월부터 1915년 5월까지의 전도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금년은 제주도 선교사에 훌륭한 한 해이다. 뛰어난 사역자 이기풍 목사 외에도 윤식명목사가 이 섬에서 선교 사역에 착수하였기 때문이다. 기존 교회들과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믿기로 작정했다.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위대한 승리가 나타나는데, 귀신 들린 남녀들이 치유를 받았으며,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영생의 소망과 기쁨으로 충만하여 질병으로부터 회복되었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제주도 교회는 그 신실한 형제애, 즉 그들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기독교적 교제와 동지애를 통해 모든 방문객을 감동시키고 있다.29)

이미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제주도의 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 우상숭배와 조상 숭배(제사)의 마찰이었다. 이 부분에서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첫 번째 승리자는 김기평 장로이다.


26) 제6회 전라노회록, p.31.
27) 제4회 전라노회록(1914), p.12.
28) 김중수, “제주 전도 상황”, 《기독신보》, 1916년 4월 12일자.
29) L.O. McCutchen, “Mission Work of Chulla Presbytery”, Korea Mission Field, July 1915, pp.204-205.


 

제목
#30 4부4장 교파 분열 시기의 제주 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9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8 4부3장 한국전쟁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7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6 4부2장 4.3사건과 제주교회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5 4부1장 해방과 제주교회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4 3부4장 시련과 좌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3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2 3부3장 제주노회의 발전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1 3부2장 제주노회 설립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20 3부1장 노회 분립을 위한 준비[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9 2부5장 -2서서평 선교사의 제주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8 2부5장 -1최흥종 목사의 산남지방 사역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7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2.산북지방의 선교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6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1.산남지방과 이경필 목사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5 2부4장 제주교회의 정착기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4 2부3장 3·1만세운동과 군자금 모금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3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2 2부2장 고난 중에도 성장하다 -1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
#11 2부1장 이기풍 목사 이임 이후의 변화 -2 [제주기독교 100년사(통합)]